내 안에 마교있다 260
적의 영역 안으로 진입할수록 산은 높아졌고 산림은 빽빽해졌다.
혈교의 경계망도 점점 더 촘촘해졌다. 그들은 주로 시계(視界)가 트여 있는 요소요소에 숨어서 아래쪽을 경계했다.
특수사조는 그러한 혈교의 경계망을 피해 가며 조심스럽게 잠입해 들어갔다.
적의 경계망이 촘촘하긴 하나, 산림이 빽빽한 데다가 우리가 고수들이다 보니 틈을 파고들 여지는 충분했다.
원래 경계가 주목적인 입장에서는 시계를 시원하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혈교는 외부로부터 거점의 위치를 철저하게 감추는 게 목적이기에 그럴 수가 없다. 빽빽했던 산림의 넓은 범위가 시원하게 정리되어 있으면 멀리에서 봐도 티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혈교의 입장에서 이곳은 대규모 거점이라 더더욱 열심히 감출 필요가 있다. 규모가 큰 만큼 시설을 구축하는 데에도 많은 자원이 들기 때문이다.
이동 중에는 조장인 도예주가 선두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며 여러모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전진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우리를 대기시킨 후 경계망의 틈을 찾기 위해 나서곤 했다. 그때마다 도예주와 함께 선봉을 맡은 남궁찬이 엄호 역할로 도예주를 따라나섰다.
도예주가 틈을 찾아내서 돌아오면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조용히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다.
잠입 작전인 만큼 이동 속도 자체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혈교의 척후들을 차례로 제거하며 이동하면 전진 속도는 훨씬 빨라질 테지만 그럴 수가 없다.
특수사조의 목적은 혈교의 거점 인근에 매복한 채 본대의 작전이 개시되기를 기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오래 대기할 수도 있는 만큼 우리의 침투 사실을 적들은 몰라야 한다.
그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사흘간 이동한 끝에 우리는 최종 목적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월 초사흗날, 인시 초(새벽 3시) 무렵의 일이었다.
우리의 매복 지점은 산 중턱의 비탈에 형성되어 있는 우곡(雨谷)이었다. 우곡은 평상시에는 물이 말라 있다가 강우 기간에만 물이 흐르는 깊은 도랑이다.
매복 지점이 적진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봉우리 위쪽이면 더 좋겠지만 그런 건 희망 사항이다. 그런 곳에는 당연히 혈교의 경계조가 있기 때문이다.
우곡은 물이 말라 있고 주변에 작은 나무들과 덤불들이 적당히 자라 있어 매복하기에 적절했다.
길면 며칠간은 이곳에 매복한 채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만큼,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어두운 시각을 이용해 우곡과 그 주변을 조용히 정리했다.
우곡의 폭이 너무 좁은 부분은 넓혔고 얕은 부분은 적절한 깊이로 더 팠으며, 바닥을 되도록 평탄하게 만들어 건초와 낙엽을 깔았다.
이후에는 다들 우곡의 바닥에 각각 피풍의를 깔고 그 위에 침낭을 펼쳤다. 조원들이 누울 자리가 도랑을 따라 일렬로 길게 이어지는 형태였다.
우곡 주변의 작은 나무들과 덤불들도 자연스럽게 정리하여 은폐 효과 또한 상승시켰다.
대강의 정리를 마무리한 시간에는 슬슬 동이 터오고 있어, 남아 있는 세부 작업은 밤에 다시 이어가기로 했다.
매복 준비가 끝나자 도예주가 조원들을 불러 모았고, 모두가 자세를 낮춘 채로 매복 진지의 중앙에 모였다.
도예주가 말했다.
“이 시간 이후로는 목소리 내는 걸 되도록 자제해 주시고 웬만하면 전음으로 얘기하십시오. 혹여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말해야 하는 상황이면 이런 식으로 해당 인원들을 최대한 가까이 불러서 조용히 얘기해 주십시오.”
조원들이 대답 대신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예주가 말을 이었다.
“적의 경계망이 촘촘한 영역인 만큼 운기조식을 여러 사람이 동시에 취하면 그 기운의 파장이 상당히 멀리까지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운기조식은 동시에 최대 두 명까지만 취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점도 유의해 주십시오.”
조원들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도예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위치에 대해 말씀드리죠. 이곳이 최종 목적 지점이라고는 해도 혈교의 거점에서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는 위치입니다. 이곳에서 산등성이 두 개를 넘어야 혈교의 거점이 나오는데, 우리 조의 신법 속도라면 일각 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이곳이 빽빽한 산속이고 우리가 고수들이라 해도 적들의 거점 코앞까지 다가가서 매복하는 식의 도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도박을 하다가 적의 경계망에 걸리면 무림맹이 공들여 준비한 전체 작전이 완전히 어그러질 수 있다.
그렇기에 적의 거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매복 지점을 잡은 것이다.
“현재 우리 조가 위치한 이 지점은 혈교 거점의 남쪽입니다. 무림맹 토벌대 본대는 북쪽에서 혈교의 거점을 공격해 들어갈 테니, 우리는 적의 후방에서 진입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 시점에 다른 특수작전조들도 각각 다른 방향에서 혈교의 거점으로 진입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작전에 임하면 됩니다.”
모두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도예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위험 지역에서의 매복인 만큼 가장 중요한 건 빈틈없는 사주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 임무는 이인 일조로 하여 매복 진지의 중앙인 이곳에서 두 시진(4시간)씩 담당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근무조를 정하죠. 첫 근무조는······.”
도예주가 말을 줄이며 조원들을 둘러보기에, 얼굴 쪽으로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첫 근무조의 한 자리는 제가 맡을게요.”
조원들은 지난 사흘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잠입 작전을 소화했다.
다들 정신적,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한 상태다.
심지어는 신룡대의 조장인 도예주의 얼굴에도 적잖은 피로감이 드러나 있었는데, 이는 그녀가 잠입 작전을 주도하며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신룡대인 길초량의 경우에도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경우는 경험 부족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잠룡관도로서 보낸 세월을 생각하면 아마도 이런 식의 본격적인 잠입 작전 경험은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흑풍대 시절에 고난도의 잠입 작전을 수도 없이 수행해 본 덕분이다. 그래서 첫 근무자로 지원한 것이다.
잠시 후 남궁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제가 송 오라버니와 함께 첫 근무조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도 그리 피곤하지 않아서요. 무공 관련해서 송 오라버니에게 물어볼 것도 있구요.”
도예주가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길초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는 다음 근무에 참여하겠습니다.”
그러자 남궁찬이 곧바로 나섰다.
“나도 다음 근무에 참가하겠소.”
그렇게 남궁찬과 길초량이 우리의 다음 근무조를 이뤘다.
그다음 조는 백송학과 단목강이었고, 그다음 조는 제갈수광과 윤단영이었다.
경계 근무는 그 순서로 계속 순환하기로 했고, 조장인 도예주는 인근을 틈틈이 정찰하기로 했다.
잠시 후 완전히 동이 텄다.
모두가 각자의 침낭 안에서 잠든 상태에서 나와 남궁설은 각자 반대 방향을 주시하며 경계 임무에 들어갔다.
반 각 가까이 조용히 전방을 주시하다가 남궁설에게 물었다.
[안 피곤해?]
[피곤하긴 한데 앞으로 두 시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송 오라버니는요?]
[나도 뭐, 버틸 만해.]
[겸손하기도 하셔라. 딱 봐도 버틸 만한 수준을 넘어 쌩쌩한 느낌이신데.]
하여튼 쪼끄만 것이 눈치는 빠르다니까.
[작년에 삼청산에서 합숙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진짜 강철 체력이셔.]
남궁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를 더 보탰고, 나는 미소만 지어 주었다.
잠시 후에 그녀에게 물었다.
[무공 관련해서 나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네. 실은 무녕현의 당하 객잔을 출발해서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계속해서 제갈 교관님과 전음을 주고받으며 은잠술의 기초를 익혔어요. 교관님께서 경공을 펼치는 중에 전음으로 이론 강의를 해주셨고, 저는 휴식 시간 및 노숙 시간을 활용하여 은잠술을 연습했죠. 물론 실력은 초보 수준이지만요.]
제갈수광과 남궁설은 이동 대형의 중진에서 나란히 달렸다. 그런 만큼 전음을 주고받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남궁설이 기초 은잠술을 배우고 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잠깐씩 남궁설 주변의 기운이 미세하게 변하곤 했는데, 딱 기초 단계의 은잠술 수련으로 인해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은잠술 고수의 입장에서 내가 그걸 못 알아챌 리 없다.
남궁설의 전음이 이어졌다.
[사실 은잠술은 도 조장님에게 배우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만, 우리를 안내하느라 집중하고 있는 분을 방해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다가 최근에 잠입 작전을 하면서 보니까 백 소협께서도 은잠술에 조예가 제법 깊어 보이시더라구요. 제 바로 뒤에 있던 기척이 쓱 사라지는데, 처음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어요.]
백송학도 이동 대형의 중진이었다. 남궁설의 앞이 제갈수광이었고 뒤가 백송학이었다.
백송학과 포연월이 익힌 소요곡의 심법은 내공 경지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조차도 포연월이 무공을 펼치기 전까지는 그녀의 경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소요곡의 심법은 기본적으로 은잠술을 익히기에 유리한 성질의 심법이다. 이런 심법들을 익히면 은잠술의 경지 대비 실제 은신 효과가 더 좋아진다.
물론 나도 비슷한 경우다.
애초에 은잠술 경지가 높았는데, 거기에 회회심공의 성질이 더해지며 실제 은신 효과도 더 증가하는 것이다.
[은잠술을 배우기 시작한 입장이다 보니 참고할 목적으로 백 소협에게도 은잠술에 대해 여쭤봤어요. 그런데 본인의 은잠술은 그다지 뛰어난 수준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구요. 제가 볼 땐 대단한 수준 같은데도.]
남궁설이 전음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이왕 배울 작정이면 제대로 배우라고 하셨어요. 도 조장님에게 배우라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송 오라버니 얘기였어요. 송 오라버니의 은잠술 경지가 매우 뛰어나다고······.]
백송학은 빼어난 내 은잠술 실력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대단한 고수였던 부리부리 놈을 은잠술로 크게 당황하게 만든 바 있는데, 그때 같이 있었던 이가 바로 백송학이었다.
[원래는 비밀인데 송 오라버니와 내가 친하다는 걸 아니까 해주는 얘기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부탁하면 신경 써서 가르쳐 줄 거라면서.]
‘상황이 상황’이라는 백송학의 말은 남궁설의 은잠술 실력이 조금이나마 나아질수록 우리 조 전체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조만간 적진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치고 빠지는 전투를 펼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에서는 은잠술이 여러모로 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은잠술 경지까지 그렇게나 대단하다니, 송 오라버니는 대체 얼마나 천재인 거예요? 물론 송 오라버니라면 은잠술도 기본 이상은 하겠거니 여기긴 했지만 백 소협이 뛰어나다고 인정할 정도면······.]
남궁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대꾸해줬다.
[아하하, 천재 같은 건 아니고, 은잠술을 익히면 위험한 상황에서 생존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 호기심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연구를 계속할수록 흥미를 느껴서 수많은 은잠술 서적들을 섭렵한 거지. 그랬더니 중요한 요소가 뭐고 묘리가 뭔지 대강 알겠더라고. 그런 식으로 재미를 느껴서 한동안 은잠술만 팠던 거야.]
[결국 독학으로 은잠술을 높은 수준까지 익혔다는 건데, 보통은 그런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르거든요? 당장 저만 해도 독학이 아닌데도 어렵던데.]
[내 경우에는 은잠술과 성질이 잘 맞는 심법을 익히고 있어서 더 수월하게 성취를 올릴 수 있었던 것뿐이야.]
그러자 남궁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한동안 이곳에서 가만히 대기해야 하잖아요. 멍하니 있느니 은잠술 경지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고 싶어요. 은잠술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혼자서 조용히 수련할 수 있으니 이런 환경에서 익히기에도 안성맞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대로 배우려고 송 오라버니와 같은 근무조에 지원한 거구요.]
이런 시간조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어떻게든 발전을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거다.
참 대단한 애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주변의 아이들은 다들 독하다 싶을 정도로 본인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애들인데, 그중에서도 송유하와 남궁설이 가장 독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성취가 상승하는 속도도 빠르다.
[많이 귀찮게 안 할게요. 송 오라버니가 가르쳐주는 내용을 토대로 스스로 수련하다가 궁금한 것만 한 번씩 물어볼게요.]
배우고자 하는 간절함이 느껴지는 한편, 최대한 내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기색도 역력했다.
[알았어.]
적진 한가운데에서의 매복 작전은 대개 경계 임무를 제외하면 딱히 할 일이 없는 환경이다.
무공 수련을 할 수도 없고, 도예주의 말마따나 운기조식조차도 마음껏 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무가 아닐 때는 누워서 쉬며 체력을 보충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멍하니 있는 게 대부분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남궁설의 은잠술 수련을 집중적으로 도와주는 건 그나마도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 조 전체에 도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겨우 며칠 은잠술을 익힌다고 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내가 집중해서 지도한다면 약간의 유의미한 성과 정도는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매복 작전은 무난하게 나흘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