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마교있다 343
남궁묵과 인사를 나눈 단목진과 문숙경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을 향해 포권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검후님.”
“오랜만이군요, 송 공자.”
“잘 지냈는가?”
문숙경과 단목진이 차례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예.”
내가 대꾸하자 문숙경이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내게 물었다.
“다친 덴 없죠?”
“예. 공력이 바닥난 것 말고는 멀쩡합니다.”
내가 대꾸하자 문숙경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에 말했다.
“하령이 저 아이가 절정에 올라 있어서 놀랐어요. 훌륭한 친우들과 교류하며 지낸 덕분이겠죠. 송 공자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송 공자와 더불어 수련하고 대화하다 보니 무공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고, 무공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면서.”
“제가 도움이 되었다고 해도 미미한 정도일 겁니다. 강 소저 본인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지요.”
“후훗, 송 공자라면 그런 식으로 대답할 것 같았어요.”
“어쨌거나 축하드립니다.”
제자가 절정에 올랐으니 스승도 축하받을 일이다.
“고마워요. 사실 하령이 그 아이가, 내가 절정에 올랐던 나이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절정에 오른 거예요. 엄청난 성과죠. 염치없는 말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하령이 그 아이를 오랫동안 송풍장에 좀 맡겨야겠어요. 그러면서 내가 틈틈이 들러 한 차례씩 지도해주는 게 더 낫겠어요.”
문숙경이 빙긋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녀에게 대꾸했다.
“머물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머물게 하셔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검후님의 방문도 언제든 환영이고요.”
문숙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단목진에게도 축하의 의미로 말했다.
“단목홍신 공자는 가주님과 함께 싸우던 중에 절정에 올랐다고 하더군요. 좋으시겠습니다.”
“허허, 나도 깜짝 놀랐다네. 성취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몇 마디 조언해주긴 했는데, 이후에 녀석이 과하게 몰입해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겠나. 다소 염려하며 주시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절정에 오르더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네. 우리 세가에는 큰 복이지.”
제갈건과 황보충은 일류의 극후반이었지만 단목홍신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절정에 올랐다.
이론상 일류의 후반부터는 언제든 절정에 오를 수가 있고, 절정에 오르는 조건은 무인마다 다른 탓이다.
이번에 단목홍신의 경우에는 운이 많이 따라준 듯하다.
일단 그는 광서 수복전을 수행하며 단목강의 검법을 참고할 기회가 많았다. 실제로 단목강에게 궁금한 점들을 수시로 물어본 것으로 안다.
단목강은 절정의 중반에 가까운 고수이니, 같은 검법을 익히고 있는 단목홍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단목진이 등장하여 수준 높은 조언까지 해줬다.
한데 단목홍신은 마침, 실전 상황에서 그 조언을 바로 적용해볼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
그런 여러 요소가 딱딱 맞아 들어가며 이른 절정 진입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단목강도 이십 대 초반에 절정에 올랐었는데 단목홍신도 이십 대 초반에 절정에 올랐다.
미래 세대가 이렇듯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 단목진과 단목세가의 입장에서는 절로 흐뭇해지는 상황이다.
가주인 단목진마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앞으로 강호는 단목세가를 더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단목진과 문숙경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두 분을 이곳에서 뵙게 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어느 날 본맹의 문상부로부터 협조 공문이 내려왔네. 검후님과 함께 바닷길을 이용해서 광서의 해안가로 이동한 후, 정해준 경로를 따라 은밀히 합산현 남서부의 모처로 이동하여 대기하라는 내용이었지. 기한이 정해져 있었기에 서둘러 온 것이고.”
“아하, 그랬군요. 언제 도착하신 겁니까?”
“그제 밤에 도착했네. 멀리, 남서쪽 강 건너편 산지에서 잠복하고 있었지. 그랬더니 어제 새벽에 무당파의 도사님들이 합류하시더군.”
“아하.”
합산현의 서쪽에는 제법 험한 산지가 북에서 남으로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소수 정예가 마음먹고 은신하면 적의 입장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려운 지형이다. 참고로 홍수하가 그 산지의 앞을 따라 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두워진 후에 아득히 먼 곳에서 전투 소리가 들리더군. 조용히 헤엄쳐서 홍수하를 건넜네. 그 후에 이동 중에 적의 정찰조들을 여러 번 발견했지만, 몸을 숨겨가며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지. 어두운 그믐밤이다 보니 은밀히 움직이기에 더없이 좋더군.”
단목진이 말을 이었다.
“이동 중에 전장이 합산현의 동쪽 산지임을 알아챌 수 있었네. 한데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쪽에서의 전투가 끝나버리더군. 후에 동쪽 산지에 도착해서 전장을 살펴보니 무림맹 측이 압승했음을 알 수 있었네. 그래서 굳이 무림맹 전력의 뒤를 쫓지 않은 채 동쪽 산지에서 은신하고 있었지. 그러다가 합산지부 쪽에서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고 달려온 것이고.”
“아.”
이어서 문숙경이 입을 열었다.
“전장에 도착해서 발견한 적측 고수 두 명의 경지가 범상치 않아 보이더군요. 그들을 무당의 도사님들이 맡고, 우리는 혹시 모를 다른 고수의 존재를 찾아 나섰어요. 그러다가 송 공자가 있던 곳에 도착한 거예요.”
“그렇게 된 거였군요.”
대꾸해준 후에 바로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처음에 무당파의 도사님들이 상대했던 두 고수는 누구였다고 합니까?”
문숙경이 답했다.
“우리도 나중에 현송진인님한테서 들었는데, 한 명은 천마신교의 전대 비마인 게 확실하다고 하시더군요. 한데 다른 한 명은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어요. 여든 살 가까이 되어 보이는 노인이고, 검을 쓰는 고수였다고는 하는데.”
“그렇군요.”
전대 비마 장로의 이름은 후필목이다.
그와 나는 사사로운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이, 서로 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였다. 한마디로 서로 간에 호불호라는 게 없는, 데면데면한 관계였다고 할까.
그도 내가 사부님의 제자가 되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장로직에서 은퇴했다. 그렇다 보니 친해질 기회도 딱히 없었다.
후필목은 왕년에 최상위권으로 평가되는 최절정고수였고, 전대의 장로들 중에서도 무공 서열이 상위권이었다. 참고로 오태흥은 그중에서 중위권이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고수였기는 하나, 지금은 매우 연로하여 신체 기능이 현격히 낮아진 상태다.
그러니 현송진인을 당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후필목과 같이 있던 다른 노인은 나중에 시신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단목진과 문숙경은 그간의 내 활약상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한동안 민망해하며 응대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광동의 명숙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남궁묵과 인사를 마치고 내 쪽으로 온 것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었기에, 나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대화 상대가 돼줘야 했다.
낙문월 등과의 대화를 간신히 마무리 지었을 때쯤에는 날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근처의 개울로 향했다.
전투 중에 묻은 피와 얼룩 등이 피부, 머리카락, 의복 등에 많이 묻어 있어, 대충이나마 씻어내기 위함이다.
송유하, 왕철양, 심산화가 나와 함께했다. 세 명 모두 나와 함께 가려고 여태 대기하고 있었다. 참고로 공은림과 하조혁은 제갈수광을 따라다니며 부상자들을 돌보는 중이다.
옆에서 걷고 있는 송유하에게 물었다.
“몸 상태는 괜찮아?”
“활 쏠 때 쓰는 근육들이 다소 땅기는 것하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하고, 조금 피곤한 것 말고는 괜찮은 것 같아요.”
말을 마치며 손가락을 보여주고 있다.
시위와 화살을 동시에 잡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 부분에 물집을 터뜨린 흔적들이 남아 있다. 궁술을 수련하며 이미 굳은살이 잡힌 부위인데도 저런 상태라는 건, 그만큼 활을 많이 쐈다는 의미다.
다행히 심해 보이지는 않는다.
“뭣 하러 물집 잡힐 때까지 무리해서 쏴.”
“무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활쏘기 좋은 각이 계속 보여서요.”
배시시 웃고 있다.
애가 예전보다 더 자주 웃는다.
편한 사람들 앞에서는 더욱, 내 앞에서는 더더욱.
“검도 제법 휘둘렀나 보네?”
의복의 이곳저곳에 피가 튀어 있어서 물은 것이다.
“네. 제갈 교관님께서 종종 전면으로 나서라고 지시하셔서요.”
“아.”
역시 제갈수광이다.
궁술을 펼치며 싸우는 것도 실전 역량 향상에 도움이 되지만, 직접 검을 부딪치며 싸우는 것만큼은 못하다. 그래서 송유하에게 틈틈이 검을 휘두를 기회를 줬을 것이다.
송유하에게 물었다.
“어때? 검술 성취도 좀 느는 것 같아?”
“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느는 느낌이에요.”
“이번 경험이 앞으로 성취를 늘려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네, 그럴 것 같아요.”
송유하가 대꾸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잠시 말없이 걷다가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리고…….”
송유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나는 손에 꺼내든 철비정을 보여줬다. 그러고는 동작을 천천히 하며 철비정을 날렸다.
휙- 푹!
날아간 철비정이 대여섯 보 앞에 있는 나무 기둥에 반쯤 박혔다. 일부러 힘을 담지 않고 날렸기에 조금만 박힌 것이다.
어젯밤에 송유하는 철비정을 배우겠다고 했었다. 선우린한테 배우겠다고 했는데, 그전에 약간의 도움을 주고자 천천히 시범을 보여준 것이다.
송유하는 집중해서 내 시범을 눈에 담는 모습이었다.
눈썰미가 있는 아이이니 이렇듯 시범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내가 그렇게 말하며 철비정 하나를 더 꺼냈을 때쯤, 우리의 뒤에 있던 심산화가 앞으로 나서더니 송유하의 옆에 섰다. 그러더니 철비정을 쥔 내 손에 시선을 두었다.
집중해서 바라보는 눈동자를 보니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왜? 산화도 배우게?”
내 말에 심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산화는 친부와 의부의 영향으로 비도에만 집착하던 아이였다. 그러나 저 작은 체구로는 비도를 지니고 다녀봐야 몇 개 못 지니기에, 우리는 적당히 소비도로 타협을 봤었다.
그 후로 지금껏 소비도에만 관심을 뒀던 심산화가 처음으로 다른 암기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대충 이유를 알 것 같다.
심산화는 이번 광서 수복전에서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았다.
녀석은 은잠술이 특기인데,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은잠술을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무공 경지가 높아져야만 어느 정도 활용할 여지가 생긴다.
결국 일반 전투에서는 심산화도 남들처럼 진형을 갖춘 채로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심산화의 무기는 소검이라서 전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후열에서 암기 지원을 하는 게 최선이다.
문제는 심산화가 다룰 수 있는 암기가 소비도뿐이라는 점이다.
소비도는 가죽띠에 최대한 많이 장착해서 몸에 두른다고 해도 수십 개가 끝이다. 그나마도 심산화처럼 체구가 작으면 장착할 수 있는 수량이 더 줄어든다. 가죽띠의 길이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전투용 행낭에 여분의 소비도를 챙겨 봐야 많이 챙기지도 못한다. 전투용 행낭은 무겁거나 부피가 크면 전투에 방해되기에, 애초에 작고 납작하게 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 심산화는 후열에서 암기 지원을 거의 못 했다. 따라만 다니는 수준에 가까웠다.
그 과정에서 느낀 게 많았던 모양이다.
송유하와 심산화가 집중해서 내 쪽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더 먼 곳의 나무를 향해 철비정 하나를 날렸다.
철비정은 당연히 나무의 정중앙에 얕게 박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심산화가 나를 향해 양 손바닥을 모아서 뻗었다.
이에 그 손바닥 위에 철비정 하나를 올려주었다.
그러자 심산화가 자세를 취하더니 이전에 내가 철비정을 꽂았던, 가까운 나무를 향해 손을 털어냈다.
휙-
심산화의 철비정은 나무 기둥에 스치지도 못하고 옆으로 날아갔다. 소비도와는 무게감도 다르고 무게 중심도 다르다 보니 저럴 수밖에 없다. 곧바로 고개를 갸웃하며 철비정을 주우러 달려가는 모습이 귀엽다.
송유하에게도 철비정 하나를 건네자 그녀가 철비정을 받아서 쥐었다.
일단 철비정을 쥔 손의 모양부터가 안정적이다.
나를 보고 따라 했을 텐데, 확실히 눈썰미가 좋은 아이다.
송유하가 고민하지 않고 먼 쪽의 나무를 향해 손을 털었다. 내가 방금 철비정을 꽂아 넣었던 나무다.
핏!
철비정이 제법 빠르게 날아가는가 싶더니 먼 쪽의 나무 기둥에 박혔다.
기둥의 중앙은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외곽도 아닌 지점이다.
높이는 내가 꽂아 넣은 철비정의 높이와 얼추 비슷하다.
즉, 내 철비정을 표적 삼아 날린 것이다.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내가 꽂아놓은 철비정을 노린 거지?”
“네에…….”
“보통이 아닌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이에 나는 철비정 하나를 더 건넸다. 그러면서 말없이 먼 쪽의 나무 기둥 방향으로 턱짓했다.
송유하가 뜸 들이지 않고 철비정을 털어냈다.
핏!
초보인데도 손목을 이용하는 모습이 상당히 안정적이다.
순간적으로 천섬무를 일으켜서 관찰했는데, 처음 날렸을 때와 동작도 거의 비슷했고 철비정을 놓는 시점도 거의 비슷했다.
푹!
철비정은 이번에도 먼 쪽에 있는 나무 기둥에 박혔다.
아까보다 표적에 약간 더 가까운 위치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송유하에게 말했다.
“운……?”
“그, 그게…….”
내 시선을 슬며시 피하고 있다.
내가 다시금 철비정 하나를 건네자 송유하가 자세를 취하더니 또다시 손을 털어냈다.
핏! 푹!
이번에는 표적에 더 가까워졌다.
이에 내가 눈동자만 돌려 송유하를 바라보자, 송유하가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동자를 돌렸다.
송유하에게 말했다.
“나, 철비정을 처음부터 이렇게 잘 던지는 사람은 처음 봐.”
송유하는 눈동자만 굴릴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누이지만 정말 기가 막히네. 표적만 있으면 그냥, 도구가 뭐가 됐든 간에 어떻게든 맞혀낼 수 있다는 거구만.”
과녁을 맞히는 쪽으로는 타고난 모양이다.
“그게……, 오라버니나 임 선배님, 설이, 린이가 철비정을 날릴 때, 그 모습을 종종 눈여겨 봐뒀거든요. 직접 던져보지는 않았지만, 던지는 동작만큼은 한 번씩 혼자서 따라 해 봐서.”
대단하고 대견스럽다.
어느새 심산화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기에, 나는 송유하와 심산화에게 철비정을 한 움큼씩 나눠줬다.
“이걸로 연습들 해. 누이는 린 매한테 배운다고 했으니 그러면 되고, 산화는 은림이하고 조혁이한테 배우도록 해. 둘 다 기초 과정을 넘어 기본 과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때부터는 내가 한 차례씩 봐줄게.”
“알겠어요, 오라버니.”
“네! 헤.”
송유하와 심산화가 동시에 대꾸했다.
심산화는 아이처럼 좋아하고 있다.
* * *
개울에서 적당히 씻고 돌아와 보니 많은 이들이 여기저기에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있었다.
우리도 줄을 서려고 가는데 멀리 구석 쪽에서 황성락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살펴보니 그쪽에도 소규모의 배식대가 있어, 황성락과 엄상평이 배식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에는 줄 선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황성락이 말했다.
“특수 편제 쪽 배식은 이곳이오.”
“아. 그렇구려. 두 분이 고생이 많으시오.”
식사는 죽이었다.
쌀과 불린 육포와 근처에서 구할 수 있는 채소들을 넣어서 끓인 듯하다.
여러모로 취사 여건이 열악한 상태라, 지금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식사다. 다들 오랜만에 뜨거운 음식을 창자 속에 넣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것이다.
황성락과 엄상평은 우리에게 죽을 푸짐하게 퍼줬고, 특히 왕철양에게는 두 그릇이나 퍼줬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황성락이 왕철양, 심산화와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는 척하며, 은근슬쩍 송유하의 그릇에 두어 국자를 더 퍼줬다는 사실이다.
역시 황성락다운 눈치와 감각이라고 할까.
송유하가 식성이 좋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저러는 것이다. 잠룡관도 시절에 ‘섣달그믐날’의 인원들끼리 식사 자리 겸 술자리를 종종 가졌었으니 잘 알 수밖에 없다.
엄상평과 황성락이 마지막 남은 죽을 본인들의 그릇에 나누어 담으며 말했다.
“우리 쪽 배식은 네 분이 마지막이오.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소.”
“고맙소. 아, 그러고 보니 마교의 전대 권마에게도 식사는 챙겨줘야 할 텐데.”
내 말에 엄상평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무당파의 도사님들이 챙겨 가셨소.”
“아.”
현송진인과 진허자 등이 갔으면 오태흥에게 밥을 먹이는 데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황성락이 한적한 나무 아래로 우리를 이끌었다.
엄상평은 왕철양과 심산화를 처음 보는 자리이기에, 가는 길에 소개해줬다.
우리는 나무 아래 둘러앉아서 식사하며 대화를 나눴다.
“나, 아까 전투 중에 정말 깜짝 놀랐소. 송 소저의 궁술 경지가 실로 엄청나더구려. 적시에 정확하게 지원해주시는 모습이 그야말로 대단했소.”
엄상평이 송유하에게 그렇게 말하자 황성락도 말을 보탰다.
“나는 송 소저의 궁술이 빼어나다는 사실을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잖소. 그렇듯 알고 보는데도 경이롭더구려.”
송유하가 민망해하며 대꾸했다.
“과찬이세요.”
“과찬 아니오.”
황성락의 말에 송유하는 더욱 민망해했다.
그러자 엄상평이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동천비룡께서는 아예 저 높은 하늘 위의 반짝이는 별이 되어 계시고.”
“하하, 별은 무슨. 부끄럽소.”
빙그레 웃어준 후에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아까 전투 중에 보니 엄 공자의 도법 성취 또한 보통이 아니더구려. 머지않아 절정에 진입하시겠구나 싶었소.”
“하핫, 절정은 무슨. 아직 멀었소.”
내가 파악한 엄상평의 경지는 일류의 중후반이다. 일류의 중반보다는 후반에 가까운 편이라, 빠르면 이삼 년 안에 절정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절정까지 멀다고 볼 수만은 없다.
엄상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련하다가 정신이 느슨해질 만하면 송 공자 소식이 들리더구려. 그럴 때마다 각오를 다잡고 더 열심히 수련했소. 언젠가 재회할 송 공자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그때 장강 사건과 통합 잠룡대전을 겪으면서 송 공자는 이미 내게 영웅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보니.”
“아하하, 영웅은 무슨…….”
민망해하며 그렇게 대꾸하자 엄상평이 빙그레 웃었다.
이번에는 황성락에게 말했다.
“황 공자 얘기도 좀 해봅시다. 아까 전투 중에 보니 황 공자의 발전상이 경악할 수준이더구려. 아니, 대체 못 본 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이무기라도 한 마리 고아 드신 것이오?”
“푸하핫! 이무기래. 푸하하핫!”
웃음을 터트린 황성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우리 집이 좀 잘살잖소.”
이에 잠시 말을 끊으며 한마디 해줬다.
“그 정도면 ‘좀’ 잘사는 수준이 아니시지.”
내 말에 황성락이 민망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장남이고 하니 아버지께서 신경 좀 써주신 것이오. 아시다시피 영약이라는 게 이류 때 복용하는 것보다는 일류 때 복용하는 게 효능이 훨씬 좋잖소? 마침 내가 잠룡관 육 년 차에 일류에 오른 터라, 그대로 졸업 후에 본가로 돌아가서 영약을 복용한 것이오. 덕분에 공력이 많이 는 것이고.”
고개를 끄덕여준 후에 말했다.
“한데 아까 보니 단순히 공력만 증가한 게 아니더구려. 검법 성취는 말할 것도 없고 무공의 성취가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돼 있던데.”
“내, 무공 성취가 내공 성취를 못 따라간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이 악물고 열심히 했소. 오늘 이렇듯 송 공자로부터 칭찬을 들으니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황성락이 뿌듯해하며 그렇게 말했다.
충분히 뿌듯해할 자격이 있다.
잠시 후에 엄상평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곳에서 이렇듯 재회한 김에, 이 길로 송 공자를 따라가서 이제부터는 나도 송 공자의 장원에서 지낼까 했었소. 스승님께서도 허락하셨는데…….”
계획이 달라졌다는 듯한 투였기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셨는데?”
“그 직후에 남궁묵 선배님께서 제안을 하나 하시더구려. 본인이 이끄는 특수 조직에 들어오지 않겠느냐면서. 동부지맹의 신룡대 같은 조직이라고…….”
“그건 그렇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주자 엄상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수락해버렸소. 지금의 내게는 송 공자의 장원에서 여러 공자, 소저들과 어울리며 자율적으로 수련하는 방식보다는, 한계를 시험하는 고된 훈련 환경이 더 낫다고 판단했소. 잠룡관도 시절 친분이 있었던 주 공자, 목 공자, 사 소저도 그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하니, 적응하기도 한결 수월할 것이고.”
주경명, 목태월, 사옥연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내가 이해한다는 의미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엄상평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황성락이 말했다.
“실은 나도 이대로 송 공자를 따라가서 송풍장에 눌러앉을 계획이었는데, 엄 공자와 함께 그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소.”
“헛! 황 공자도……?”
“그렇소. 나야말로 송풍장에 가서 친우들과 함께 수련하며 즐겁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소. 거기에서 지내도 실력이 쑥쑥 향상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고.”
황성락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인이 되기 위한 수련보다는 전사가 되기 위한 훈련이 필요한 시절이라고 판단되오. 그래서 이번 기회를, 나를 한 차례 더 채찍질하는 계기로 삼을 생각이오. 우문 공자와 단목홍신 공자도 그곳에 소속되어 있으니 나 또한 적응하기가 수월할 테고.”
황성락은 우문직과는 각별한 사이고, 단목홍신과도 친분이 깊다.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말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참으로 대단한 각오들이시오. 응원하리다.”
내 말에 엄상평과 황성락이 씩 웃었다.
둘 다, 사서 고생하면서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그래야만 하는 시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