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다 해주고 싶어요
(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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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 해주고 싶어요
2022.10.07.
순간 진우가 무릎을 굽히고 지나의 발을 살폈다.
“발이 까졌네요.”
“아……, 오늘 외근 나갈지 모르고 샌들을 신어서.”
하필이면 오늘 아침에 신발장에 선 지나는 늘어진 신발을 보다 최후로 고른 것이 굽이 있는 하얀색 샌들이었다.
그나마 지나가 갖고 있는 신발 중에 가장 예뻐서, 저도 모르게 진우를 떠올리고 신은 것이었다.
“너무 안일했다.”
어쩐지 다리도 금방 아프더라니.
지나는 한숨을 얕게 푹 내쉬었다.
“집에 가서 쉬면 돼.”
내일부터는 당분간 플랫 슈즈만 신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는 다시금 샌들에 발을 구겨 넣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넣었지만 신발에 닿을 때마다 쓰라린 걸 피할 순 없었다.
“누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우가 돌연 신발을 벗었다. 제 신발을 지나 쪽으로 돌려놓는 모습에 지나의 눈이 커졌다.
“응? 넌 어쩌려고.”
흰 양말이 신겨진 그의 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파서 못 걸을 것 같아요. 두 군데 다닐 동안만 이거 신어요.”
“넌 거의 맨발과 다름없잖아. 발바닥 다쳐.”
하지만 지나는 그의 배려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뻔히 그가 다칠 걸 알기에.
“자, 골라봐요.”
진우는 맨발을 하고서 아무렇지 않은지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1번 누나가 내 신발을 신는다 2번 내가 누나를 업는다.”
“어……?”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둘 다 선택하기 어려웠다.
“나 괜찮아. 내 신발 신고 가도 돼.”
다시금 신발에 억지로 발을 넣으려 하는데 진우가 좀 더 빨랐다. 제 발밑에 있던 신발은 어느새 진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서진우.”
“상처…… 피 날 거예요.”
어딘지 낮아진 눈빛이 제법 진지해 보였다.
“근무 중이잖아. 어떻게든 내가 해야지.”
“3번 서진우를 시킨다.”
3번이 있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항목에 지나의 눈썹이 살짝 솟았다.
“네가……?”
“네. 제가 할게요.”
그는 고작 인턴이었다.
“너 혼자…… 할 수 있겠어?”
물론 진우를 무시하는 말은 아니었다. 본사에서 나온 직원이 인턴 혼자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래도 진우 혼자 시키기에는 마음이 걸렸다. 아주 많이.
“그래도 어떻게 널 혼자 보내. 분명 걱정될 거야.”
지나가 한층 작아진 목소리로 말하자 진우가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걱정한다는 그 말이 참 좋은데……. 또 누나 걱정하게 하고 싶진 않네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나는 진우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 테이블에 올려뒀던 진동벨이 울렸다.
“커피 가져올게요. 그동안 생각하고 있어요.”
다정하게 말한 진우가 일어나 카운터로 다가갔다. 신발 없이 맨발로 주저 없이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지나의 가슴 한구석이 쿵쿵 뛰었다.
신발을 신지 않아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진우의 모습은 눈길을 끌었다. 카페 내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지나도 느낄 수 있었다.
“어머, 저 사람 봐.”
“와, 진짜 잘생겼다.”
“피부 왜 이렇게 하얘.”
“연예인인가?”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진우의 외모에 신발의 유무는 관심조차 없던 모양이었다. 지나는 또 한 번 진우의 잘생긴 외모를 인정해야 했다.
이내 커피를 받아온 진우가 지나 앞에 앉았다. 여전히 이쪽을 향한 시선들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누나, 결정했어요?”
지나는 제 몫의 커피잔을 들고 이내 입을 열었다.
“4번.”
보기에 없었던 번호의 등장에 진우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편안한 슬리퍼 사기.”
지나가 미리 꺼내든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카페 옆에 편의점에 삼색 슬리퍼 팔아. 사이즈는 240.”
“아…….”
지나와 카드를 번갈아 보던 진우가 결국 웃고 말았다.
“네. 알겠습니다.”
더운 여름 공기 속에 청명하게 퍼지는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에 지나의 입가에도 웃음이 터졌다.
“법카로 쓸까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진우가 묻자, 지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중에 한 번에 산재 요청할까 봐.”
“하하, 그래요.”
못 말린다는 듯이 진우가 작게 웃었다.
“얼른 다녀올게요.”
신발을 제대로 신은 진우가 빠르게 카페를 나섰다. 그의 커피는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채.
지나는 문득 오래전, 도진과 처음 외근을 나갔던 날이 떠올랐다.
‘지나야, 여기서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지나는 모든 게 서툴렀다. 당연하겠지만.
깔끔한 외모인 도진은 지나의 사수로서 그녀의 실수에도 화를 내기보다 설명을 자세히 해줬다.
그즈음, 지나는 꽤 좋은 사수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아야.’
그때도 지나의 여린 발은 입사하면서 구매한 새 구두에 살갗이 까졌다. 도진은 그런 그녀를 위해 약국에 들어가 밴드를 사 왔다.
‘처음에는 다 이래. 적응되면 괜찮을 거야. 굳은살처럼.’
‘혹시 운동화 같은 편한 신발을 신고 나와도 될까요?’
지나의 질문을 들은 도진은 어딘지 한심한 눈빛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지나야. 우리 회사가 패션계열잖아. 품위는 지켜야지.’
역시 안되는 거였구나. 밴드를 붙였음에도 여전히 쓰라리고 홧홧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나는 입술을 꾹 물고 통증을 참았다.
‘힘내자.’
도진이 웬일로 미소를 그리며 기운을 북돋아줬다. 아니, 그때는 그걸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도 김도진은 겉모습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에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의 행동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바보였어.’
다음부터는 품위고 자시고, 무조건 편한 신발이다. 아니, 운동화가 어때서.
요즘 예쁜 운동화가 얼마나 많은데. 일의 능률을 높이는 파워템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자.
괜히 분한 마음에 지나는 빈 주먹을 꽉 쥐었다.
제 작은 신음소리조차 제 통증처럼 받아들이는 진우를 보자 진짜 사랑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얼음 녹는데 왜 안 오지?’
진우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커피에 지나의 시선이 닿았다. 금방 올 줄 알았던 진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편의점을 못 찾은 걸까. 길이라도 잃은 걸까. 한번 시작된 걱정이 꼬리를 물고 줄줄이 이어졌다. 전화라도 해볼 생각에 휴대폰을 집어 드는데,
“누나.”
턱까지 찬 숨을 가쁘게 쉬며 진우가 드디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삼색 슬리퍼 대신 예쁜 플랫슈즈가 들려 있었다.
“어? 그거 뭐야.”
“안 신은 것처럼 편하대요.”
지나 앞에 한쪽 무릎을 접은 진우가 그녀의 발에 신발을 신겼다.
“상처 안 닿죠?”
신발은 맞춘 것처럼 꼭 맞았다. 푹신한 밑창은 정말 안 신은 듯 가벼웠다.
고개를 올려 지나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동자는 유난히 촉촉해 보였다. 그래서인가 진우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잘생겨 보였다. 민망해진 지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음……. 편하다.”
잘생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쓱 닦는 진우는 그제야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다행이다.”
“고마워.”
아주 작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지나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런데 이거 얼마야? 비싸 보이는데.”
지나가 줬던 카드를 돌려주는 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안 비싸요.”
“밖에 더운데 고생했어.”
“네.”
얼음이 든 커피를 한 입 마신 진우가 입꼬리를 휘었다. 분명 힘들고 귀찮을 텐데 그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애쓰지 마.”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지나의 말에 진우는 말없이 지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보기 싫다는 말이야.”
혹시라도 오해할까봐 지나가 얼른 말을 보탰다.
“아…….”
진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슬며시 시선을 낮췄다.
“다음부터는,”
“고생 아니에요.”
지나의 말을 자르며 진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심장을 둥둥 울릴 만큼 낮은 저음으로.
“부족하죠. 내 마음 같아서는 신발 가게 하나를 통째로 사고 싶었는데.”
낮게 깔렸던 시선이 천천히 지나를 향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 여름의 열기가 담뿍 담겨져 있었다.
“다 해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런 말 말아요.
진우의 곧은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닿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왜인지 갈증이 나서 애꿎은 커피만 자꾸 홀짝였다.
“어……. 음…….”
목적어 없는 말이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에게 휘말려버릴 게 분명했다. 지나는 일부러 휴대폰을 들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일하러 가자.”
아직 커피는 반 넘게 남아 있었다. 지나의 행동이 뻔히 보이지만 진우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대리님.”
그의 사무적인 호칭에 지나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숨기며 앞서 걸었다.
***
한편 도진은 진우의 책상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지나가던 지혜가 의아한 얼굴로 잠시 쳐다보자 그 시선을 느낀 도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 서진우 인턴이 자료를 안 주고 가서.”
지혜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자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에 자리에 앉은 지혜는 휴대폰을 들었다.
도진은 진우의 컴퓨터를 뒤지는 중이었다. 분명 오전에 부장이 도와달라고 한 문제를 본인이 해결했다는 게 수상했다.
보통 실력으로는 접근도 할 수 없을 텐데. 아침 일찍 부장은 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장의 개인 노트북이 문제가 생겼는데 중요한 자료가 들어있어 이대로 날아가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도진이 듣기로도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전문가에게 맡겨야 할 거 같다며 전화를 끊었고 그 이후 부장이 진우와 함께 사무실에 늦게 돌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전공했어도 그 정도로 실력으로 왜 굳이 여기 인턴으로 왔지?’
수상했다. 도진이 다시 한번 훑어본 진우의 입사서류는 그가 해외에서 공부한 유능한 인재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 회사에 임원까지 노리는 건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가 온 뒤로 제 말이라면 껌뻑 죽는시늉까지 하던 지나가 변했다. 이별을 먼저 요구해 결국 헤어졌다. 물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거기에 부장까지 진우에게 홀딱 넘어간 것처럼 어딘지 그를 보는 눈초리가 달라졌다. 인턴 나부랭이 따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분명 오늘 아침에 부장한테 대단한 뇌물이라도 먹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진우의 컴퓨터는 너무나 깨끗했다.
회사 자료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책상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외근까지 내보내며 만든 기회였는데.
‘되는 일이 없네.’
그때 윤주가 살금살금 다가왔다.
“오빠.”
도진의 옆에 다가와 작게 속삭이자, 도진이 황급히 상체를 세웠다.
“야……. 회사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짜증 섞인 그의 목소리에 윤주의 커다란 눈망울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