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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누나가 내 선물이에요 (21/80)


21 누나가 내 선물이에요
2022.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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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깜짝 놀란 윤주가 서운한 얼굴로 도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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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아니, 그러니까 후…….”

짜증을 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도진이 당황한 얼굴로 입을 잠시 벙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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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 헛나왔어.”

아무렇게나 팔을 내리던 도진은 책상 위에 쌓아놓은 서류 더미를 건드렸다. 와르르, 삽시간에 바닥으로 쓰러진 서류들을 도진은 황망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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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윤주 씨, 정리 좀 부탁할게.”

당당하게 윤주에게 지시한 도진은 급하게 자리를 떴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걸린 사람처럼. 그답지 않은 안달 난 모습에 윤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

마지막 가게까지 다 돌고 나자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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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손목시계를 살피며 지나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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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이 바로 퇴근하라고 하셨는데……. 회사 차도 있고…….”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지나가 입술을 다물었다. 혹시나 싶어, 지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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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장님. 이지나입니다. 저희 업무는 다 봤는데 회사 차 반납유무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 부장의 목소리에 지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외라는 듯이 진우를 슬쩍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윽한 눈빛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다양한 표정 중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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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깍듯하게 인사하고 통화를 마친 지나가 진우를 보며 신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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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퇴근하래. 회사 차는 내일 반납하고.”

직접 듣고 말로 내뱉으면서도 현실감이 떨어졌다. 언제 적이던가, 외근 후 사무실로 복귀해 퇴근하라고 침 튀기며 열을 냈던 부장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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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래.’

입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니, 창사 이래인가.

내일 아무래도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 어쨌든, 사무실을 들르지 않고 퇴근할 수 있다니, 해가 어디서 뜨든 지나는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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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배 안 고파요?”

진우가 잘생긴 눈썹을 양쪽으로 내리며 불쌍한 척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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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니……. 그러니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지나의 배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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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조금 고픈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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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조금 고픈 게 아닌 거 같은데.”

짐짓 진지한 얼굴로 진우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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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나 원래 조금만 고파도 소리 나.”

민망함에 얼른 배를 두 손으로 가렸다. 그래봤자 소리를 가리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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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먹고 싶어요?”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진우가 지나의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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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먹지 뭐.”

갑작스러운 접촉에 지나는 슬그머니 잡힌 팔을 빼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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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뭐 먹고 싶은데?”

애써 민망함을 숨기며 지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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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술 먹고 싶은데. 누나랑.”

여름을 담은 뜨거운 온도가 담긴 목소리였다. 지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버리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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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도 안 진 평일 저녁부터 무슨 술이니.”

제 귀에도 어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나답지 못한 목소리에 귓가까지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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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먹고 술도 먹어요. 그럼 해 지겠네.”

능청스레 말하는 진우가 지나의 어깨를 감싸며 제 쪽으로 당겼다. 깜짝 놀란 지나가 고개를 올리자마자 방금까지 지나가 서 있던 자리로 퀵보드 한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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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되죠?”

여름의 온기가 들끓는 것처럼 지나의 뺨이 달궈졌다. 진우의 체향은 가슴이 떨릴 만큼 지나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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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거 먹을래.”

얼른 진우의 품에서 빠져나온 지나가 빠르게 걸었다. 저를 돕기 위해 자신을 잡아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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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요. 누나.”

청량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그 목소리마저도 지나에게는 뜨거운 태양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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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퇴근시간이 되었지만 도진은 웬일로 자리에서 일찍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기다리다 못한 윤주가 도진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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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윤주의 물음에 뒤늦게 고개를 든 도진은 오늘따라 피곤해 보였다. 그의 눈가 아래는 거뭇하게 그늘이 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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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좀 남아서.”

평소 빠르게 퇴근하던 도진답지 않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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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퇴근해.”

고쳐 올리는 안경 너머로 보이는 흰 눈자위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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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 보이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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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괜찮아.”

마지못해 미소짓는 도진의 얼굴은 어딘가 긴장되어 있었다. 윤주는 쌀쌀맞은 도진에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인사한 뒤,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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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피곤한가.’

서진우 인턴의 자리를 뒤적거릴 때부터 굉장히 예민해 보였는데…….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한편, 빈 사무실에 홀로 남은 도진은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둑해진 사무실에서 도진의 자리 쪽에만 형광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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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없어. 왜!”

이상했다. 분명 있을 법한 약점을 찾았는데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서진우가 여태 정리한 자료를 보니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해 입이 절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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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뭔가 있을 거야.’

서진우와 관련된 자료는 다 찾아봤지만 딱히 나오는 게 없었다. 온갖 포털과 SNS까지 다 뒤졌지만 없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도진의 눈앞에 지나의 미소 띤 얼굴이 떠올랐다. 저와 사귈 때, 웃지도 않은 여자였다. 늘 정숙하고 조용하게 감정 표현조차 없던 여자가 서진우 앞에서는 예쁘게 웃었다.

그뿐인가. 서진우를 보호하겠다고 제게 바락바락 대드는 모습을 보자니 절로 혈압이 올랐다.

겨우 인턴 나부랭이랑 뭘 해보겠다고 저러는 건지.

도진의 눈에는 지나가 도진에게 반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 잡은 물고기인 윤주에게 관심이 식기 시작한 건, 서진우가 나타난 직후였다.

혼자 비참하게 지내며 울어야 할 지나의 옆에 서진우가 등장한 뒤로.

자신이 보기에도 지나는 더 생기가 넘쳤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진은 어떻게든 서진우를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 외근도 지나와 진우를 보낸 것이었다. 물론, 사무실로 돌아올 줄 알았지만……, 그대로 퇴근한 모양이었다.

건방지게.

도진의 핏줄이 터진 눈빛이 어둠 속에서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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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가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지.’

어떻게든 서진우를 내보내기 위해 도진은 없는 서류도 조작할 생각이었다. 도진의 얇은 입술 끝이 길게 올라갔다.

***

진우와 함께 간 곳은 꽤 고급스러운 한정식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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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에 이런 곳이 있었어?”

평범하지 않은 식당 분위기에 지나가 주변을 살피며 작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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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족끼리 왔던 곳이에요. 조용하고, 밥 먹으면서 술도 먹을 수 있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종업원이 지나와 진우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모든 자리는 룸으로 되어 있었고 룸 안에는 가운데 크게 식당이 자리해 있었다.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은 지나는 어딘지 기죽은 얼굴로 마주 앉은 진우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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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엄청 비쌀 거 같은데.”

곧 종업원이 방을 나가자 조용함이 맴돌았다.

마치 우리 둘만의 세상에 갇힌 것처럼.

다른 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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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게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미소짓는 진우를 향해 지나가 눈에 힘을 팍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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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슨 날이야? 인턴이 돈이 어딨다고.”

물이 든 유리잔을 들어 보이며 지나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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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월급 꽤 될걸요. 아직 안 받아봤지만.”

알 수 없는 미소는 자신감에 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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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됐어. 인턴보다 대리 월급이 낫지.”

지나가 손사래를 치며 얼른 메뉴판을 들었다. 동시에 메뉴판을 탁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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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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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잔뜩 얼어붙은 지나의 표정에 진우가 눈썹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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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물도 안 마셨어. 그러니까 그냥 나가도 될 것 같아.”

동그라미가 몇 개 붙었는지 세다가 기겁한 지나는 내려놓았던 가방을 집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에 진우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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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늘 생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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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갑작스러운 진우의 말에 지나는 행동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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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일이니까 맛있는 거 같이 먹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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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말 안 했어? 생일이라고.”

어쩐지 미안해진 지나가 슬그머니 가방을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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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네가 생일인데 내가 이런 거 먹어도 되는 거야?”

이거 한 끼가 네 월급일 거 같은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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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번뿐이잖아요.”

어깨를 으쓱거린 진우는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듯, 종업원을 불러 주문한 진우와 달리 지나는 연신 물컵만 들어 홀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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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선물도 준비 못 했는데…….”

이건 너무 뻔뻔한 거 아닐까, 싶어 지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똑바로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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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진우가 지나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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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지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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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물이에요.’

말하고 싶은 진심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나의 무구한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진우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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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나랑 밥 먹어주는 게 선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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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게 뭐야.”

눈을 깜빡거리던 지나가 그를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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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이제라도 사줄 생각에 지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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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거 아무거나요?”

반가운 얼굴로 묻는 진우의 반응에 지나는 눈을 접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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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러엄.”

이 정도 고급 식사를 얻어먹었으면 각오해야지. 당당하게 대답한 지나는 얼른 목소리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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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월급 감안해서 말해줘.”

그녀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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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밥 먹으면서 생각해볼게요.”

곧 전채음식이 나왔다. 앞에 놓인 흑임자죽이 따뜻하면서 고소해 입맛을 돋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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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래 생각하지는 마.”

흑임자를 싹싹 긁으며 지나가 말하자 진우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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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기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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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유효기간 있지. 그럼.”

됐다 싶어 지나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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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진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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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까지.”

이왕이면 촉박하게 줘야지, 싶어 지나가 장난스럽게 말하고 히죽 웃었다. 시계를 확인한 진우는 어딘지 급해진 눈빛으로 종업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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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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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좀 갖다 달라고 해야겠어요.”

지나의 장난에 맞춘 진우의 장난스러운 말투는 지나의 마음을 간질였다.

죽에 이어 상큼한 유자 소스가 뿌려진 샐러드가 나왔다. 아삭거리는 야채가 아주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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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은근 고급 한정식 좋아했나봐.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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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원래 복스럽게 잘 먹잖아요.”

뿌듯한 얼굴로 지나를 바라보는 서진우는 젓가락을 들지도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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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안 먹어. 오늘 처음 외근 나와서 배고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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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누나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닭살스러운 소리에 지나가 얼른 시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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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해도 유효기간은 안 늘려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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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안 통하네요.”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서진우가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갈비찜에 이어 구운 야채와 해물탕이 연달아 나왔다.

정신줄을 놓은 사람처럼 해물탕을 그릇까지 삭삭 긁어먹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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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내 생일선물 정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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