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나랑 해요, 결혼. (22/80)


22 나랑 해요, 결혼.
2022.10.14.



 


“응, 뭔데?”

유효기간을 염두한 듯, 진우는 선물을 결정한 듯 보였다. 지나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얼른 넘기고 진우를 바라봤다.


“결혼해줘요.”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는 순간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하게 귓가에 울렸다.

놀란 지나의 얼굴과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지나를 바라보는 진우는 사뭇 긴장된 듯 입술을 다문 채였다. 장난이라고 손을 저을 분위기가 아니란 걸 알기에 지나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전에 말했잖아……. 사내연애는 당분간…….”

“사내연애 아니에요.”

지나의 흐릿해진 말끝을 자른 진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목소리조차 지나를 놀래키지 않으려는 듯이 매우 신중해 보였다.


“사내연애 아니고 사내결혼.”

헉.


“이건 선물이니까……, 누나 마음이에요. 주고 싶거나 주기 싫거나.”

진우가 목소리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진우에게 미처 대답할 수 없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지나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 안에 술을 한 번에 털었다.


“하…….”

쓴맛이 감돌자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이따가 대답해도 돼?”

시간을 끄는 수밖에……. 어딘지 비장한 눈빛으로 묻는 지나를 향해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유효기간은 오늘 밤까지요.”

따라 하기는……. 속으로 피식 웃는 지나는 연거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나마 당장 대답을 안 해도 된다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마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답답함이 희석되는 기분이었다. 지나는 쉴 새 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얼마나 마셨을까.

머리가 아팠다. 취기가 올라 오감이 뭉근하다. 현실과 환상이 혼재되었다.

이내 귓가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누가 내 옆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가까이.

그 사람의 숨결인지 모를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정신……려…….”

무슨 말을 하는지 온통 뿌옇게 들린다.

청각까지 마비된 기분.

술기운에 잠식되어버린 몸의 오감이 흐릿하다.

지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지나를 바라보는 남자가 보였다.

티브이 속에 나오는 남자 연예인처럼 잘생긴 얼굴이었다.


“되게 잘생겼네요.”

바짝 마른 입술에서 나온 소리 끝이 갈라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말인데 그 남자도 그런 건지 입술을 말아 올린다. 그 모습조차 근사했다. 세상의 잘생김을 한데 뭉쳐 이 남자를 빚은 것처럼.


“고마워요.”

“제가 아는 누구 닮았는데…… 누구더라.”

지나는 뿌연 안개가 깔린 것 같은 머릿속을 열심히 헤쳤다.

하지만 기억은커녕 일부러 헤집은 머리에서 두통이 일었다.


“아야…….”

“너무 많이 마셨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누나.”

“어……? 나보다 동생? 와. 대박.”

지나의 반응에 남자가 쿡 웃었다.


“왜 대박이에요?”

“아니, 이렇게 잘생긴 데다가 나이도 어리다니. 진짜 부러워서.”

“하하, 나 돈도 많아요. 그런데, 누나도 예쁘고 어려요.”

그 남자의 칭찬에 지나의 가슴이 울컥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었다.


“땡, 틀렸어요.”

지나가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나는 예쁘지도 않고, 어리지도 않아요. 그것뿐인 줄 알아요?”

“…….”

남자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5년 사귀던 남자친구는 젊은 신입사원이랑 바람이 나서 나와 헤어졌어요. 아, 물론 헤어지자고 내가 먼저 말했지만. 그게 그거죠. 뭐, 비참하게 차일 뻔한 거 내가 먼저 찼어요.”

남 얘기하듯이 말하는 지나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흐릿한 시야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울컥 치솟았다.


“아니,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날 안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고. 흑.”

훌쩍이는 지나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내가 바보야. 내가. 연애도 개뿔 못해.”

지나의 흐느낌과 넋두리에 진우가 어두워진 시선으로 말했다.


“누나를 놓친 사람,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그러니까…….”

뜨거운 손길이 지나의 얼굴에 번진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마요.”

마음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의 손길에 지나는 취한 와중에도 그의 손길을 덥석 붙잡았다.


“잘생긴 사람이 마음씨도 참 착하네요. 친절해.”

이왕 주는 친절, 마음껏 받자는 생각에 지나는 진우의 손을 잡은 채, 얼굴에 문질렀다.

진우는 그녀의 돌발 행동에 당황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술에 취한 모습이 귀여웠다.


“유효기간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대답 안 할 거예요?”

은근슬쩍 묻는 진우의 말에 지나는 무아지경으로 입술을 벌렸다. 취기가 올라서인지 홍조가 물씬 오른 두 뺨과 더 붉어진 입술이 촉촉해 보였다.


“질문이 뭐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순진무구하게 묻는 지나의 모습에 진우가 미소지었다.


“결혼해주세요.”

“나랑?”

“……의 대답.

이미 뒷말은 들리지 않는지 눈을 크게 뜬 지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지금 나랑 결혼하자는 거야?”

“네.”

“와, 대박. 대애애애박. 계탔다.”

지나가 신난 얼굴로 외쳤다. 평소의 그녀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대답해줘요.”

술에 취한 여자에게 진지하게 묻는 진우는 스스로 웃음이 흘렀다.


“당연한 걸 왜 물어봐. 나 이제 후회 안 할 거야.”

혀가 꼬부랑거리는지 말이 곱아들었다.


“후회요?”

“아니, 내가 어릴 적에 좋아하던 첫사랑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쪽처럼 되게 잘생……겼는데…….”

아……. 말하다 보니 그 남자애랑 되게 닮았네요. 그쪽…….

지나는 말을 멈추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진우를 바라봤다.

여전히 뿌옇게 보이는 시야는 힘을 주고 눈을 부라려도 선명하질 않았다.


“그 남자애 놓친 거 후회해요?”

진우의 낮은 목소리가 지나의 귓가에 묵직하게 울렸다.


“응. 후회해.”

돌연 진우의 얼굴이 내려왔다.

지나는 진우의 숨결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 숨결에 흠뻑 취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그래요. 지금부터는 후회하지 마요.”

“응……?”

순간, 입술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지나는 그만 눈을 꼭 감았다.


 

***

목이 말랐다. 가뭄 난에 쩍쩍 갈라지는 논밭처럼 잔뜩 갈라진 입안이 떠올려질 만큼


“무……울.”

동시에 두개골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아오…….”

지나가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뜨는데 눈앞에 웬 남자가 보였다.


“여기 물.”

다정한 목소리에 따뜻한 눈빛.

서진우였다.

내가 왜 너와 여기에……?

지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눈에 봐도 익숙하지 않은 실내는 고급 호텔의 인테리어처럼 세련되었다.

하얀 햇빛이 비치는 통창 너머 도시의 풍경이 낯설다.

아니, 여기는 저번에 왔던 진우의 방이었다.


“일단 물부터 마셔요.”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가 어젯밤 무슨 짓을 한 거지?


“너…… 설마.”

지나를 향해 미소짓는 진우의 잘생긴 얼굴에 대한 신뢰가 단번에 깨졌다.

날 선 경계심이 단숨에 전신으로 퍼졌다. 지나의 의심 어린 눈동자에 물컵을 들고 있던 진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요.”

그의 단 한마디에 긴장감이 사라진 지나는 얼른 이불 아래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제 입었던 옷이 그대로인 걸 확인한 지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제 누나 술 너무 많이 마셔서 완전히 뻗었거든요.”

“아……. 오해해서 미안.”

민망한 지나는 물컵을 건네받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제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나, 어제 저한테 말한 거 기억나요?”

“응?”

침대 끄트머리에 맵시 있게 서 있는 진우가 지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여태 경험상, 진우가 저렇게 웃으면 뭔가 불길했다. 자신이 무슨 큰 실수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내가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했어?”

욕이라도 했나.

지나는 입술을 손으로 더듬으며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캄캄한 밤길을 더듬듯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저한테 선물 주기로 했는데.”

“선물?”

아, 뒤늦게 지나는 어제가 진우의 생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머.”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지나는 자신이 아무것도 챙겨주지 못한 걸 깨닫고 작게 외마디소리를 외쳤다.


“내가 아무것도 못 챙겨줬네. 어쩜 좋아.”

“아닌데. 줬는데…….”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서진우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하얀 햇살이 그의 흰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수려한 외모가 빛이 났다.

반짝거리는 모습에 지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줬다고?”

아, 불길하다. 불길해.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이 점점 빨라졌다.

어느새 서진우가 가까이 서 있었다. 집요한 그의 눈동자가 지나에게 곧게 쏟아졌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그의 달콤한 체취가 일렁거렸다.

순간, 어젯밤의 토막 난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결혼해주세요.’

동시에 지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거기에 자신이 뭐라고 답했더라…….

소리 없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가운데, 진우가 여유로운 자세로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유난히 매혹적으로 보였다.


‘키스.’

마지막에 가까이 다가오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산 넘어 산이었다. 지나는 푹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누나가 뭐라고 했냐면…….”

매혹적인 진우의 입술이 열렸다. 지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지나는 가까스로 흐물거리는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그러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듯 지나가 피식 웃었다. 한결같이 여유로웠던 서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잘생긴 미간부터 곧은 입술까지.


“진우야, 누나가 술김에 한 소리잖아.”

여유를 가장한 지나가 팔을 뻗어 진우의 단단한 어깨를 쓰다듬었다.

늘 그랬듯이 아무렇지 않게.


“술김에 무슨 말을 못 해.”

싱긋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젯밤에 기억도 나지 않는 말들을 그저 웃으며 넘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순간 진우가 지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내뿜는 열기가 손목을 따라 지나의 팔을 타고 전신으로 흘렀다. 뜨거운 올무에 잡힌 것처럼 여태 여유로웠던 지나의 몸이 굳었다.


“취중진담이라고 하죠. 보통.”

그냥 지나쳐주면 안 될까.

공중에서 지나의 흔들리는 눈빛과 단단하기 그지없는 진우의 눈빛이 얽혔다.

한 치의 물러남도 보이지 않는 진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난 이제 누나 후회하게 두지 않을 거예요. 나랑 해요. 결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