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막장 드라마의 맛
(25/80)
25 막장 드라마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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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막장 드라마의 맛
2022.10.25.
주말이 되었다. 도진의 집으로 가기 위해 지나는 준비 중이었다. 어차피 잘 보여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옷장을 열고 대충 보이는 옷을 아무렇게나 걸쳤다.
전신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나는 가방을 들었다.
집을 나선 지나는 도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오른 지나는 기사에게 도진의 집주소를 읊었다. 아예 잊어버린 그의 집주소를 찾느라 회사 인사과까지 전화할 뻔했다. 다행히 메모 앱의 오래된 저장목록에서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진우를 위해서야.’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다 일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듯 지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었다. 하필 오늘따라 창 너머로 잔뜩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이 먹구름처럼 드리워진 기분이었다.
***
도진의 집은 지나가 기억한 그대로였다.
“지나 왔니?”
도진의 어머니는 지나를 반겼다. 현관에 들어선 지나가 인사를 하기 무섭게 와락 껴안았다.
매번 만날 때마다 꼭 안아주던 그녀의 습관인 걸 알았지만 지금은 이 따뜻한 품이 어느 때보다 불편했다. 지나는 어색하게 그녀로부터 몸을 떼었다.
“지나야, 미안하다. 엄마가 대신 사과할게.”
지나의 양손을 꼭 잡은 도진의 어머니가 다짜고짜 사과했다.
지나는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 몰라하며 옆에 서 있는 도진을 바라봤다. 지나와 달리 도진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는 듯 보였다.
이지나, 네가 어디 잘 해내나 두고 보자. 이런 뉘앙스로.
“우리 지나 온다고 맛있는 거 엄청 많이 차렸는데, 가만 보자. 여기 편히 있어.”
한참을 지나를 꼼꼼히 살피던 도진 어머니가 불편한 발을 절뚝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지나는 그런 도진 어머니를 서둘러 말렸다. 마음 편하게 밥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지나의 비장함이 감도는 말에 도진 어머니는 팔팔 끓고 있는 국그릇을 들여다보며 국자를 집었다.
“일단 먹고, 먹고 얘기하자. 지나 너 더 말랐네. 엄마 마음이 아프다.”
지나는 차마 더 강하게 말할 수 없어서 손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도진과 달리 도진의 어머니에게는 딱 잘라 강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일단 자신은 도진과 윤주의 결혼을 허락 맡기 위해 온 것이니까. 그녀의 신경을 거스를 수 없었다.
안전부절못하는 지나를 놀리듯 도진이 다가와 물었다.
“물이라도 줘?”
지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도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도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먹기 싫으면 말고.”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몇 번이고 당장 이 집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지나는 진우를 생각하며 꾹 참았다.
발이 불편한 대신 손이 빠른 도진 어머니의 상차림은 금방이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은 맛깔스럽게 보였다.
“자, 얼른 먹어. 차린 건 없지만.”
도진 어머니는 지나를 향해 연신 미소지으며 숟가락을 쥐여줬다.
“저……. 어머님.”
지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도진 어머니의 눈썹이 축 처졌다. 지나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얼굴이었다.
“지나야, 내가 아들 하나 있는 걸 잘못 키웠다.”
“아…….”
갑작스러운 고해성사에 지나는 뒷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도진 어머니의 말씀이 백번이고 맞는 말이었다. 도진의 인간성을 이제 와서 생각하니 쓰레기에 가까웠으니까.
“너라면 우리 아들 믿고 맡길 수 있어. 엄마는 너 아니면 다른 여자는 안 되겠더라.”
이미 헤어진 아들의 전 여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도진 어머니의 간절한 말투에 지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제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김도진 과장님과 허윤주 사원의 결혼을 못 미덥게 생각하신다고 들어서요.”
여기까지 말한 지나는 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웠다. 전 여친이 전 남친과 바람난 여자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말하는 꼴이.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그랬기에 지나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잘 어울려요. 허락해주세요. 어머니.”
제발. 그래야 진우가 잘리지 않아요. 지나가 간절한 눈망울로 도진 어머니를 바라봤다. 도진 어머니는 지나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입을 쫙 벌렸다.
“지나야, 너는 자존심도 없니? 왜 그런 말을 네가 해. 나는 도진이 얘가 오늘 너 온다길래 그냥 둘이 다시 잘 되었나 생각했더니…….”
전혀 아니에요. 어머니. 우리 둘은 두 번 다시 죽어도 안 만날 거거든요.
그리고 자존심이요……? 일개 회사원이 그런 게 있나요. 그리고 지금 아주 중요한 사람의 직업이 걸려 있거든요.
지나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이미 허윤주 사원은 임신 중인 거로 알고 있어요. 손자까지 생기셨는데 받아주세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영혼 없는 얼굴로 지나가 말했다.
“뭐? 임신?”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도진 어머니가 도진을 바라봤다. 한심하고 실망스러운 눈빛이었다.
“너……. 엄마가 결혼 전에 조심하랬지! 너!”
“아, 엄마.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니야. 이게,”
다급하게 변명하던 도진을 향해 도진 어머니가 옆에 있는 쿠션을 던졌다. 쿠션은 도진의 어깨며 팔뚝에 맞고 떨어졌다. 조금의 타격감도 없어 보였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속이 다 시원했다.
“엄마가 그거 하나 조심하라고 했는데 어쩌면 엄마를 이렇게 실망시키니. 그렇게 여자애 임신부터 시키면 엄마가 허락할 줄 알았어?”
도진 어머니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도진은 쿠션에 맞은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 그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애를 어떻게 그냥 둬.”
“뭐?”
도진의 말에 도진 어머니는 그제야 지나를 의식한 듯, 당황한 얼굴로 지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복잡한 눈빛에는 어떻게 전 여친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진 어머니의 우려와 달리 지나는 막장 가족 드라마를 방구석 일렬에서 관람하는 기분이었다.
“이제 임신했는데 어쩔 거야. 그냥 결혼해야지. 나처럼 아빠 없는 애로 키울 수 없잖아.”
도진의 마지막 말에 도진 어머니는 마침내 바닥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방바닥을 치며 소리 내어 우는 도진 어머니와 그런 엄마를 바라보던 도진이 에이씨, 하면서 집을 나가버렸다.
지나는 불안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도진 어머니를 조심스레 바라봤다. 휴지라도 뽑아드릴 요량으로 가방을 열자 휴대폰이 우웅- 울렸다.
‘하필 지금.’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지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휴지를 도진 어머니에게 건넸다.
“고맙다. 지나야. 사실 내가 암 투병 중이거든.”
처음 듣는 소리였다. 도진이 말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나는 미처 방어하지 못한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
“그러셨군요.”
고작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나 죽으면 우리 도진이는 이 세상에 혼자 남는데……. 색시라도 좋은 여자 만나서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데.”
코를 훌쩍이던 도진 어머니가 휴지에 코를 팽 풀었다.
“허윤지인가 윤주인가 걔는 정말 아니더라. 어쩌면 인상부터가 싸가지가 없어.”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의견에 동조하는 지나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지나야, 나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우리 도진이 다시 만나주면 안 될까?”
예? 갑자기 왜 이러시나요.
지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이게 바로 막장 드라마의 맛인가. 매콤을 넘어 정신이 아득해지게 만드는 마라맛.
“우리 도진이가 잘못한 거 있으면 용서해주면 안 될까. 응?”
불편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도진 어머니가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장애인이고 홀어머니인 데다가 이제 병까지 얻어서……. 지나 너한테는 참 미안한데. 우리 철없는 아들놈 맡길 데가 너밖에 없다. 지나야. 이렇게 엄마가 빌게.”
울음 섞인 어머니의 애절함에 온몸이 굳었다. 이 와중에도 지나는 진우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건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대로 진우가 잘리는 걸까.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전, 저는…… 죄송해요. 어머니.”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현관문을 열었다. 금방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지나야. 제발. 응?”
도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나의 발목을 칭칭 감았다. 얼른 집을 나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때, 쿵 하며 집 안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지나의 앞에 쓰러진 도진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지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 간단한 세 개의 숫자가 자꾸 엇나갔다.
날카로운 연결음 소리를 듣는데, 오늘의 불행을 예고한 것 같은 차창 너머 본 음울한 잿빛 하늘이 떠올랐다.
***
정신없이 흔들리는 구급차의 불빛과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렸다.
도진은 어머니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고 지나는 길 잃은 미아처럼 길거리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가뜩이나 흐렸던 하늘에선 기어이 비가 떨어졌다.
우산 없는데…….
비를 피할 요령으로 아무 가게 앞에 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지나는 멍하니 비에 젖은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우웅-
울리는 소리에 기운 없이 휴대폰을 받았다.
- 누나, 어디에요.
“여기가…….”
어디더라.
- 비 많이 오는데 혹시 밖이에요? 우산 있어요?
진우의 따뜻한 목소리에 지나는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결국 진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목이 꽉 멨다.
- 누나, 제 말 들려요?
“어? 응응.”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 우산 없으면 데리러 갈게요.
“괜찮아. 나 우산 있어.”
진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거짓말을 해버렸다.
- 그래도 갈게요.
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내가 지금 널 볼 자신이 없는데.
- 어딘지 말해줘요.
“여기 나도 모르겠는데.”
- 네?
“나도 모르겠어.”
바보 같은 지나의 말에 진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 도로에요?
“어.”
- 그럼 택시부터 잡아요. 저도 그리로 갈게요.
통화를 끊고 지나는 기운이 없는 얼굴로 택시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였는지, 어두워진 밤하늘은 이미 개어 구름 한 점 없었다.
‘다 쏟아버리니 개운하겠구나. 넌.’
괜히 하늘에 대고 원망을 해봤다. 이제 어쩌지. 도진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돌려야 하지.
택시에서 내린 지나는 여전히 무거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마당을 느리게 가로질렀다.
“누나……?”
지나 뒤로 선연하게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지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몇 발자국 떨어진 나무 그늘에 서진우가 서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