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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나도 좋아해 (30/80)


30 나도 좋아해
2022.11.11.


그와의 입맞춤은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김도진에 관한 상처와 아픔, 분노, 억울한 모든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을 만큼.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달콤한 맛이 났다.

지나의 키스에 서진우는 조금 놀란 듯 눈을 살짝 떴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부드럽게 나누는 입맞춤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달콤했다.

꽉 밀착된 서진우의 품은 더없이 따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소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얼굴을 뗀 지나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 나은 거 같아.”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지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도 뜨겁게 입을 맞춘 감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건조했던 입술은 어느새 촉촉해졌다.

진우는 여전히 지나의 얼굴을 꼭 감싸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지나의 물음에 진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코끝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그의 잘생긴 얼굴은 숨이 멎을 만큼 완벽했다.


“키스, 더 해도 돼요?”

진우가 조금 탁해진 눈으로 물었다.

몰아쉰 숨에서 그의 체향이 짙게 맡아졌다.

그의 질문에 지나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진우가 잠시 뒤로 물러나더니,


“안 멈춰요.”

경고하듯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성난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나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진우가 입술을 내렸다.

처음에 했던 키스가 사르르 녹을 것처럼 달콤했다면, 지금은 잡아먹힐 것만 같은 강렬한 키스였다.

저돌적인 그의 뜨거운 키스에 지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엇갈려 깊이 맞닿은 그와의 접촉이 더 밀착되었다.

진우가 품고 있던 열기가 쏟아졌다. 데일 듯한 뜨거움이 지나를 통째로 삼키려는 듯이.

숨이 멎을 것 같은 쾌감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심장이 쾅쾅 뛰었다.

가슴이 아니라 뇌에서 울리는 기분이었다.

졸지에 모든 것이 허물어져버렸다.

억지로 세워놨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 밤에,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진우와의 경계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집요한 진우와의 키스는 한참 뒤에야 끝났다.


“집에 보내고 싶지 않은데…….”

그의 아쉬움이 담긴 중얼거림이 가슴에서 웅웅 울렸다. 한결 탁해진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섹시하게 들렸다. 지나는 그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댄 채 듣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 눅진했다.

지나의 정수리 위에 닿는 그의 달큼한 호흡이 달게 느껴져 지나는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에요.”

지나가 짐짓 엄격한 말투로 장난스레 말하며 몸을 일으키자 진우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그의 어린애 같은 투정이 듣기 좋아 지나는 저도 모르게 진우의 뺨에 뽀뽀를 쪽 했다.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에 아직도 열기가 남아 있었다.


“좋아해요.”

뜨거움을 가득 다음 그의 고백이 새삼스럽게 들렸다.

이제야 온전하게 지나의 마음을 채우는 고백이었다.

그동안 무시하고 또 무시했던.

도망가져 부단히 애썼던 그 시간들이

사실을 외면하려 했던 것이란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나도.”

10년 전의 여름날의 고백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때,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좋아해.”

운동장의 뽀얀 먼지도, 귀를 울리는 매미 소리도,

우리들의 머리 위를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도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삭막한 회의시간,

도진은 지나가 내민 기획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

지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머금고 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진은 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서를 노려보다 이내 포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전보다 낫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내뱉는 도진의 모습을 보니 지나의 기분이 좋아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경질적으로 서류철을 덮은 도진이 회의를 서둘러 끝냈다.


“이 대리는 잠깐 나 좀 보고.”

의자를 밀며 일어나던 지나는 행동을 멈추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가자 도진이 등받이에 깊이 기대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잘할 수 있었으면서.”

느긋하게 말하는 도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없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와 단둘이 마주 보고 싶지 않아 지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순종적으로 보여 도진이 뒤늦게 피식 웃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어제는 안 좋아 보이던데.”

도진의 말에 지나는 어이가 없었다. 제 상태를 알면서도 야근을 하게끔 만든 장본인이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도진이 못마땅한 질문에 지나는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나는 서둘러 입에 꾹 힘을 줬다.


“아닙니다.”

지나는 얼른 자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산뜻하게 해치우고 싶었다. 도진과 일적으로도 단둘이 마주 보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허윤주 사원 좀 도와줄 수 있겠어?”

생각지도 못한 도진의 말에 지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네?”

“허윤주 사원이 임신한 건 아직 회사 사람들이 모르잖아. 윤주가 많이 힘들어해. 입덧하느라 일하기 힘들어하는 거 같기도 하고.”

이쯤 되면 전남친 죽여도 무죄 아닐까. 고작 이딴 소리를 지껄이기 위해 자신을 붙잡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황당했다. 지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저는 맡은 일이 많아서 따로 허윤주 사원의 일까지 맡을 여유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나의 진심 없는 사과에 도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나야.”

도진이 어르듯 지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 너 진심으로 사랑했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지나는 결국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야.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헤어졌지만 난 아직도 너에게 좋은 감정 있어.”

아마 도진의 말과 표정을 보는 사람이라면 깜빡 넘어갈 것이었다.


‘그냥 연기를 해라…….’

사람 속이는 게 할리우드급이네. 지나는 동요하지 않는 침착한 눈으로 도진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는데,


“서진우 인턴 회사에 남아 있길 바라지 않나 봐?”

“굳이 제가 끼어들지 않아도 객관적으로 합당한 점수를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의 비열한 협박을 무시하며 지나는 회의실을 나갔다. 헤어진 이후에도 도진은 지나를 제 입맛대로 써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나가 순순하지 않으니 그녀의 부사수 격인 진우를 들먹였다.

불안하긴 했다. 김도진의 성격에 충분히 진우에게 불합리한 점수를 줄 수 있었다. 일단 그렇게 말은 했지만 지나는 불안해졌다. 그를 지키고 싶었다. 결국은 도진의 뜻에 따라야 하는 걸까.

어젯밤, 진우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평소보다 훨씬 뜨겁고 진득한.


‘진짜 가야 해.’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지나는 천천히 진우의 품에서 얼굴을 뗐다.

살짝 흐트러진 진우의 얼굴에 달빛이 은은하게 비췄다.

청아함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하나하나까지 모두다.


‘흔들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

진우만 바라봐도 심장이 쿵쿵 뛴다.

지나는 일부러 태연스레 진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직 제대로 흔들지도 않았는데…….’

지나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진우가 미소지었다.

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가슴을 징 울렸다.

밤하늘의 별이 박힌 듯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너에게 홀린 내 눈에만 이다지도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네가 너무 예뻐서 홀려버렸나 봐.’

‘누나가 훨씬 예뻐요.’

진우가 지나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천천히 손목 위를 매만지며 지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10년 전에도 예뻤는데, 지금도 예뻐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지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찬연하게 빛났다.

내 심장이 이렇게 뛸 수도 있구나.

새삼스러운 감각이 낯설었다.


‘좋아해.’

지나가 할 수 있는 말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녀의 수줍은 고백에 진우가 웃었다.


‘이젠 내가 누나를 지킬게요.’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완전한 밤이었다.

어젯밤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진우가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평생 진우에게 죄책감을 가질 것 같았다.

결국 지나는 진우를 지킬 생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턴십이 끝나는 기간까지만 참으면 된다. 도진의 자리로 향하던 지나를 누군가 불렀다.


“이지나 대리.”

같은 사무실 직원이었다.


“부장님이 부르셔.”

의문을 담은 채, 지나는 서둘러 부장실로 향했다.

부장실 문을 똑똑 두들기고 들어가자 부장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는 진우를 발견했다. 어두운색의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진우는 어제와 또 다른 분위기였다.

어제만큼 잘생긴 모습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나를 향해 진우가 싱긋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머뭇거리는 지나를 향해 부장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대리 왔어? 잠깐만 이리로 와 봐.”

지나가 소파 끝쪽에 앉자마자 부장이 말했다.


“서진우 인턴 사수가 이지나 대리라며.”

“아, 네.”

“우리 회사의 차기 인재잖아. 보통 인력이 아니지.”

부장의 칭찬은 5년 동안 회사를 다녔던 지나에게도 생소했다. 부하직원들에게 커피 한번 사는 것보다 훨씬 인색하기로 유명한 그의 칭찬에 지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앞으로 회사에 대한 미래지향적인 안목도 대단하고.”

진우 칭찬을 하기 위해 굳이 자신을 부른 건지, 지나는 슬슬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대리 부른 건 다른 건 아니고……. 우리 부서가 진행하는 MZ세대 패션 마케팅 기획안을 봤는데 그거 이 대리가 기획한 거라고…….”

“네?”

어떻게 안 거지? 분명 김도진 과장의 담당으로 되어 있는데.

순간 진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반짝이는 걸 지나는 목격했다.


“난 이 대리 기획안이 마음에 들어. 그래서 말인데 김 과장한테 얘기해서 빨리 결재받아 진행했으면 하거든. 어차피 올 3/4분기는 늦었으니까 4/4분기 쪽으로 해서 기획해보자고.”

“네.”

지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저 대답만 했다.


“그래, 매출 한번 내보자. 우리 팀의 저력을 보여주자고.”

부장은 연거푸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부장님, 그런데 김 과장님한테는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은데…….”

지나가 걱정스레 말하자 부장이 손을 저었다.


“그거야 내가 말할 테니 걱정 말고, 다음에는 나한테 바로 가져와.”

정말 그렇게 해도 될까. 진우를 힐끔힐끔 살피며 지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싶은 지나는 눈치만 살피며 일단 밖으로 나가 진우에게 따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지나와는 달리 진우는 부장 앞에서도 한결같이 여유로운 자세를 유지했다. 확실히 부장과 친해진 모양인지 자기처럼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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