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누나 마음이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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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누나 마음이 궁금한데
2022.11.15.
곧 문이 열리고 도진이 들어왔다. 그는 부장의 옆에 앉은 진우와 지나를 발견하고는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어, 김 과장, 마침 잘 왔어. 그 MZ세대 타깃 마케팅은 여기 이 대리한테 전격적으로 맡기려고 해.”
“네?”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이 도진의 얼굴에 떠올랐다.
“부장님, 제가 맡은 프로젝트입니다.”
“아이, 알지. 그런데 이 대리가 거의 다 맡아 한다며. 쓸데없는 중간 과정 확 줄이자고. 김 과장은 이것 말고 또 맡은 일이 많잖아.”
굳은 얼굴로 도진은 딱히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지나와 진우를 번갈아 노려볼 뿐이었다.
“김 과장 결혼하고 그러면 신혼여행이다 뭐다 바쁠 거 아니야. 밑에 사람한테 일 맡기고 중요한 거만 해.”
“부장님, 이지나 대리도 맡은 일이 많습니다.”
도진의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절박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이 대리 맡은 거 많아?”
부장이 지나를 향해 물었다. 지나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부장이 박수를 딱 쳤다.
“그래, 그 허윤주 사원한테 좀 맡겨. 누가 보면 이 대리 혼자 우리 부서 먹여 살리는 줄 알겠어.”
부장이 농담까지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장의 밝은 표정과 달리 도진은 사색이 되어 잔뜩 얼어버렸다.
“허 사원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윤주에게 일이 가는 걸 막아보려 물었지만 부장이 혀를 쯧, 차며 마뜩잖은 얼굴로 도진에게 말했다.
“그 정도 일도 못 하면서 월급은 왜 받나?”
도진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도진의 속도 모르는 부장이 교통정리를 끝냈다.
“둘은 나가보고, 김 과장은 용건이 뭐야.”
도진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가 가져온 서류는 오전에 지나가 제출한 기획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장실을 나온 지나는 진우를 데리고 탕비실로 갔다.
“어떻게 된 거야……?”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잠은 잘 잤어요?”
지나와 달리 태평한 얼굴로 진우가 따뜻하게 물었다.
“어? 응.”
첫사랑을 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심장이 두근거려서 한참을 뒤척였지만.
“난 한숨도 못 잤는데.”
지나의 말에 진우는 여전히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정 부장한테 뭐라고 말한 거야?”
“그냥…… 사실을 얘기했어요.”
별 것 아니라는 듯, 진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사실?”
“이지나 대리가 열심히 하고 있다고.”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하는 진우의 눈이 그윽하게 빛났다.
정말 그것뿐일까. 그게 다일까. 단지 그 말에 정 부장이 바뀔 거라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진우의 말에 지나의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우와 같이 있으면 쉴 새 없이 웃음이 나왔다.
따뜻하면서도 몽글거리는 감정이 좋았다.
햇볕이 내리쬐는 10년 전의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고 싶었어요.”
진우가 지나의 옆머리를 사르륵 넘겨주며 작게 속삭였다. 그 작고 작은 말이 불씨가 되어 지나의 마음에 불을 확 번지게 했다. 지나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별말을 다해. 정말.”
작게 중얼거리면서 지나는 두 손으로 양 뺨을 감쌌다.
“……나도.”
짧은 말을 던진 지나는 얼른 몸을 돌려 사무실로 돌아갔다. 진우가 반응하기도 전에 도망친 것이다.
잠시 헤어진 단 하룻밤 동안에도 그가 그리웠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진우와 나눴던 키스와 체온이 꿈만 같았다. 구름 위에 동동 떠 있는 기분에 현실감이 사라졌다.
지나의 입술에는 아직도 그의 뜨거운 체온이 짙게 남아있었다. 지나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빛도 여전히 제게 남은 듯 느껴졌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만큼 황홀했다. 그래서 불안했다.
자리에 앉은 지나는 한숨을 크게 들이 내쉬었다.
드디어 시작된 사내연애였다. 절대로 하지 않으려 했던 사내연애였다.
그야말로 단물만 빼먹고 버린 껌처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일 뻔했는데. 초라하고 볼품없는 자신이 다시 사랑을 시작해도 될까. 피할 수도 없게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진우를 끝까지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모니터를 멍하니 응시하던 지나는 지혜의 목소리에 상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자기!”
어딘지 다급한 목소리에 지나의 눈이 커졌다.
“서 인턴 지금 김 과장한테 끌려갔는데.”
“어?”
이제 대놓고 뭐라 할 생각인지. 김도진의 패악에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진우였다.
급한 마음에 지나는 벌떡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지나는 화장실 앞에서 도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깟 게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모르겠는데.”
빈정거리는 도진의 말투에 지나가 입술을 물었다.
“도대체 부장님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사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잔뜩 흥분한 도진과 달리 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사실? 이게 진짜 까불고 있네.”
도진이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야, 그 기획서 내 거야.”
“과장님 기획서를 왜 이 대리님이 하셨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도진의 목소리가 화장실 벽에 왱왱 울렸다.
“제가 이지나 대리님 부사수라서 일을 돕거든요.”
당연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대기업은 잘 몰라서 그런가 본데……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래. 기획자는 이름만 올리는 거야. 이름만.”
어딘지 비굴한 변명이 이어졌다. 남자 화장실이라 쉽게 들어가지도 못하는 지나는 화장실 입구에 서성였다. 지나의 걱정처럼 진우가 도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아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저렇게 밉보이면 어떻게 하려고…….’
아무리 진우가 결백하다 해도 인턴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부장이랑 뭐 있지?”
이어지는 추궁에 진우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뭐 네 입으로 말 안 해도 인턴 점수 보면 알겠지. 뭐.”
피곤한 듯한 한숨 소리가 나더니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도진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지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을 모른 척 지나가길 바랐지만, 뚜벅거리는 발소리는 지나 앞에서 뚝 멈췄다.
“이 대리.”
마치 사냥감을 만났다는 듯이 지나를 바라보는 도진의 눈빛이 번득거렸다.
“아무리 나한테 사적인 감정이 있어도 이렇게 복수하면 안 되지. 공과 사 구분도 제대로 못 하나?”
도진의 억측에 눈을 내리깐 지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적인 감정 없습니다.”
단호한 지나의 대답에 도진이 하, 헛웃음을 쳤다.
“우리 어머니 의식 돌아오자마자 너 찾더라.”
“…….”
지나는 묵묵히 있었다. 도진의 어머니에 대해 자신이 알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하등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내가 효자는 아니지만, 우리 어머니 잘못되면 복수 정도는 하려고.”
어머니가 위독하게 된 것이 지나 때문이라며 도진이 위협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나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그를 무시하듯 지나가 몸을 휙 돌렸다. 그때 도진이 지나의 손목을 잡았다.
“이지나.”
놀란 지나의 눈이 커졌다. 도진은 뭔가 지나에게 할 말이 더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차마 말하진 못했다.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대리님.”
동시에 지나가 잡힌 손목을 휙 뺐다.
“응, 진우야.”
온도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빛의 색깔도 달랐다.
사랑이 물씬 풍겨나는 따뜻하면서도 다정한 지나의 태도에 도진의 입가가 허탈하게 비틀렸다.
“허.”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도진은 보폭을 넓혀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혹시 나 때문에 난처해진 거예요?”
지나를 먼저 걱정하는 진우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니. 난처해진 건 너지.”
인턴 주제에. 지나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누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주고 싶은데……. 역시 한계가 있네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진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이제 내 생각 말고 어떻게 하면 정직원으로 남을 지나 생각해.”
순간 진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제가 누나 곁에 남아도 돼요?”
대수롭지 않게 진우를 바라보던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말할 뻔한 지나가 입을 얼른 다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당연히 네가 여기 있으면 너한테 좋으니까.”
길을 잃은 말들이 더듬더듬 흩어졌다. 지나는 애써 설명했다.
“누나 마음.”
진우가 지그시 지나를 바라봤다.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딘지 설레 보였다.
“누나 마음이 궁금한데.”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진우와 눈을 마주한 지나는 포기한 듯 말했다.
“네가 있으면 좋겠어.”
그게 뭐든, 무슨 형태든. 이제 네 빈 자리는 상상할 수도 없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서진우는 잔뜩 찢기고 할퀴어진 상처를 감싸주었다. 도진을 봐도 이제 아무렇지 않을 만큼, 지나는 자신의 상처가 다 나았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기를 쓰고 정직원이 돼.”
명령하는 말투와 달리 지나가 해사한 미소를 띤 채 진우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먼저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 지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
회장의 호출이었다. 진우는 은밀하게 회장실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숨이 막힐 듯한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엘리베이터 앞의 복도부터 느낄 수 있었다. 회장실 앞에 당도하자 호리호리하면서도 다부진 이미지의 비서가 우아하게 일어나 진우를 맞이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고개를 까딱 숙여 보이고 진우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진우의 아버지, 서일준 회장이 소파 가장 상석에 깊숙이 앉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공손하게 인사하는 진우를 향해 회장이 매서운 시선을 들었다.
“인턴 놀이는 재밌더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가장 끝자리에 앉은 진우의 대답에 회장은 가래 끓는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약속했던 두 달이 오늘까지다.”
아버지가 불렀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설마 정직원이 되겠다는 헛소리는 안 지껄이겠지.”
서 회장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후계자 교육 제대로 받아라.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정식으로 근무하고.”
비정한 아비의 걸걸한 목소리에 여태 눈을 내리깔고 있던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남자였다. 한 번도 아버지라 생각한 적 없었다. 꾹꾹 눌렀던 원망이 피어올랐다.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는 평생 아버지 입맛대로 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돌아온 이유는 오직,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 곁에 있기 위해서.
“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진우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진우의 무릎 위에 올려진 주먹이 천천히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