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복수는 ‘꾸안꾸’로 (32/80)


32 복수는 ‘꾸안꾸’로
202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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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여름의 정점이었다. 참을 수 없는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휴가 날짜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주를 기점으로 휴가시즌이었기에 더욱 간절했다.

얼마 전 청첩장을 뿌렸던 김도진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진의 결혼식 따위 잊고 있던 지나는 회사 직원들의 소리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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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사이가 별로 안 좋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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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결혼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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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사원 언제부턴가 웃질 않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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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니. 둘이 싸운 거 아니야. 나 결혼 전날, 파투나는 커플도 많이 봤어.”

탕비실에서 속닥거리는 직원들의 목소리에 지나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왔다.

MZ 세대 마케팅 기획안은 이제 결재만 남은 상황이었다. 어쩐지 뿌듯해진 마음에 지나는 진우 자리를 힐끗 쳐다봤다. 오전에 어딘가로 불려간 진우는 아직도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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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갔지…….’

혹시나 김도진이 붙잡고 행패라도 부릴까 걱정되는 마음에 도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진은 언제나처럼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에게 기획서를 빼앗긴 뒤로 도진의 신경질은 더 늘었다.

입덧 때문인지 윤주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고 패셔니스타로 자랑하던 윤주는 요즘 들어 편한 옷만 걸쳐 입고 출근했다. 그게 불만인 건지 도진과 윤주 사이는 처음과 같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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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앞두고 설마 권태라도 온 거야……?’

왜인지 윤주는 부쩍 도진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듯했다. 예전처럼 애교를 부리거나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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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말자.’

아닌 게 아니라 사실 지나가 신경 쓰는 건 진우뿐이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연락을 할까 고민하던 찰나, 진우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반가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길 뻔했다. 지나는 꾹 참는 대신 진우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진우도 지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언제나처럼 청명하고 심장이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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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리님.”

지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진우가 곧장 지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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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뜻밖의 말에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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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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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진우의 말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상하게 진우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면 안정이 됐다.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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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께 말씀드리고 퇴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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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렇게 진우는 책상을 정리하고 부장실로 향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진우가 부장실을 나왔다. 가방을 든 진우는 어딘지 애틋한 눈길로 지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사무실을 완전히 나갔다.

단지 조퇴일 뿐인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지. 진우가 간 뒤, 지나는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상했다.

제일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도 같고. 아니면 놓친 것 같기도 했다. 점심시간에도 입에 들어가는 음식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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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오늘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던 지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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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더워서 지쳤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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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요즘 일 엄청 열심히 하더니. 빨리 휴가 가고 싶다.”

휴가. 휴가를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더 콱 막혔다.

도진과 헤어지기 전, 오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같은 날짜에 휴가를 냈다. 그게 그러니까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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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휴가 다음 주부터야.”

공교롭게도 도진은 제 결혼식을 휴가 시작 날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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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김 과장님이랑 휴가가 같구나!”

속을 모르는 지혜가 입을 크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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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사무실 바빠지겠네.”

일하는 사람 세 명이나 빠졌으니. 지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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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8월 말이거든. 성수기에 가면 사람에 치여서 이게 쉬는 건지 일하는 건지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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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네.”

지나가 칭찬하자 지혜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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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지혜잖아.”

제 이름을 들먹이며 생색내는 꼴이 귀여워 지나도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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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내일 결혼식 때 뭐 입지? 요즘 하도 옷을 안 샀더니.”

내일 도진의 결혼식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진우가 있었더라면 아무렇지 않게 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알맹이가 쏙 빠진 껍데기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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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표정이 왜 그래. 말은 안 해도 김도진 과장 좋아했던 거 아냐? 짝사랑하는 남자의 결혼식 뭐 이런 거?”

지혜의 농담에 지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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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정말 김 과장 극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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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알아. 알아. 그런데 여기 아직 회사거든.”

회사 앞 식당에서 상사 욕을 하는 건 좀……. 지혜가 난감해하며 서둘러 지나를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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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를 극혐하는 건 직장인들의 운명이지. 슬픈 운명이야.”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슬픈 목소리로 지혜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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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일 입을 옷 사러 갈래? 뭐, 겸사겸사.”

돌연 지혜의 눈이 번쩍거렸다. 안 그래도 전남친의 결혼식이었다. 그곳에서 초라하게 보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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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지나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속은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

결국 내일이 오고 말았다. 밤늦게까지 기다렸던 진우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던 지나는 퉁퉁 부은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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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망했다.”

어제 퇴근 후 지혜와 쇼핑을 한 것이 무색하게. 아무리 옷이 예쁘면 뭐 하나. 얼굴이 패션의 완성이거늘.

화장실 세면대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나는 두 뺨을 붙잡고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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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친 결혼식에 이러기야!”

그 뒤에 지나는 화장실에서 꽤 오래도록 나오지 못했다. 차가운 물로 얼굴 마사지를 한답시고 뿌려대는 통에 옷이 다 젖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붓기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 지나는 아침임에도 기력이 모두 소진되었다. 힘없이 방으로 들어온 지나는 휴대폰이 울리는 걸 발견하고 잽싸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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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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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바빠요?

진우였다. 어제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의 목소리에 지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왈칵 눈물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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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바빠.”

목이 메는 바람에 목소리가 싸늘하게 튀어나왔다. 정확하게는 서운함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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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요. 어제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무슨 일? 묻고 싶은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지나는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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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혹시 집이에요? 김 과장 결혼식 갈 준비 중이죠?

다짜고짜 묻는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는 서운함도 잊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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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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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조금만 기다려요. 데리러 갈게요. 20분 뒤에 집 앞으로 나와요.

20분? 김도진 결혼식은 분명 오후 1시였다. 지금 9시였으니 시간은 아직 여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놀란 지나가 더 묻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20분이면 아무것도 못 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나는 급해진 손길로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두들겼다.

20분 뒤, 정확하게 지나의 집 앞에 진우가 서 있었다. 그것도 까맣게 선팅된 고급차 앞에서. 멋들어진 정장을 입은 진우는 평소 출근 복장과 사뭇 달랐다.

어딘지 더 고급스럽고 귀티 나는 정장에 지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에 반해 화장도 거의 못 하고 머리만 간신히 말린 지나는 어제 산 옷만 입고 나온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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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창피해.’

창피함에 지나는 진우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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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지금 저 모습 그대로 화보를 찍어도 문제없을 만큼 근사한 진우가 지나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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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디 가는 거야?”

이유도 모르고 일단 진우의 차에 올라탄 지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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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면 알아요.”

운전하는 진우가 눈을 반짝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30분 정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강남 청담동의 한 미용실이었다.

주로 연예인들만 상대한다는 미용실이라서인지 입구부터 고급스럽기 짝이 없었다. 100프로 예약제라는 말답게 손님은 오로지 지나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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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에는 왜?”

지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실내를 둘러보는데 실장이라는 명패를 단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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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나 님. 이쪽으로 오시죠.”

역시 설명은 없었다. 직원에게 끌려 자리에 앉은 지나는 투명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부은 얼굴을 직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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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세상에.”

아침에 치른 붓기와의 전쟁은 소용이 없었던가. 참혹한 결과물에 지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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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남친 결혼식장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숍의 명예를 걸고 신부보다 훨씬 아름답게 치장해드릴게요.”

네?

실장의 말에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나의 뒤쪽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진우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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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우.”

당황한 목소리가 진우를 불렀다. 진우가 긴 다리를 움직여 지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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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꾸며도 신부보다 예쁘지만……. 누나가 복수하는 방법을 잘 모르길래 내 멋대로 예약했어요. 누나 화났어요?”

서진우는 요물이다. 할 말을 잃은 지나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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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복수 따위는 생각도 안 했는데…… 그리고 이렇게 하면 일부러 의식하는 거 같잖아.”

고작 전남친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치장하는 게 싫었다. 없는 자존심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면 됐다. 어떤 눈으로 쳐다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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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민 거 티 나지도 않을 거예요.”

지나의 뒤에 서 있던 실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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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안꾸. 저희 숍의 모토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게 저희 숍의 최장점입니다. 혼자 지내는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 다 저희 숍 들렀다 가요.”

굉장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듯이 실장이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삼단 카트를 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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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메이크업 지금부터 진행하겠습니다. 눈 감아보실래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 지……. 혼란에 빠진 지나의 눈동자는 이내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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