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도망가도 돼요.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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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도망가도 돼요. 얼마든지
2022.11.29.
“회사 오실 때 저한테 미리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감미로운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하면서도 자상한 손자의 모습에 할머니의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런 게 그 뭐라더라, 스, 스, 스프라이저?”
할머니가 갸웃거리며 주름진 입을 움직였다.
“서프라이즈 됐어요.”
대답하는 진우의 시선이 잠시 지나에게 향했다.
“우리 손자 대견하기도 하지. 어쩜 이리 잘 컸누.”
할머니의 뿌듯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차마 시선을 들지도 못하는 지나는 제 앞에 놓인 물컵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이좋은 가족 틈바구니에 어색하게 낀 기분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가끔가끔 자신에게 향하는 진우의 시선까지, 모두 어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정리되면 만날 생각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고 우연하게는 아니었다. 여러모로 지나는 애꿎은 손가락만 꾸물거리며 물컵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학생이 돕지 않았다면 길을 헤맸을 거라우. 물 한 컵만으로 약소한데.”
할머니의 거듭된 칭찬에 지나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유, 당연히 도와야죠. 날씨도 더워서 잘못했다가는 쓰러지셨을 거예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하는 지나를 못내 기꺼운 눈으로 쳐다보는 할머니였다.
“초면에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난 학생같이 참한 여자가 우리 손주며느리가 됐으면 좋겠어.”
갑작스러운 말에 지나도, 진우도 당황했다.
“아…….”
너무 놀라 입술만 벙긋거리는데 할머니가 지나를 향해 웃었다.
“학생이 너무 예뻐서 한 말이야. 신경 쓰지 말아요.”
간 떨어질 뻔한 농담에 지나는 경직된 근육을 간신히 당겼다. 화제를 돌리듯 진우가 슬그머니 할머니에게 질문했다.
“아버지 뵙고 가시겠어요?”
순간, 자애롭던 할머니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후회하는 거, 그놈을 낳은 거다.”
뾰족한 음성에는 마치 가시가 돋친 것 같았다.
“하지만 잘한 것 또한 그놈을 낳은 거지. 이렇게 사랑하는 손주를 줬으니까. 거지 같은 놈팡이 안 닮고 이렇게 잘 컸으니 할미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봄바람처럼 따뜻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늙은이가 주책맞게 너무 오래 있었네. 이만 가야겠다. 일 봐야지.”
할머니를 따라 지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 그 보자기 안에 음식이랑 떡이 좀 있는데 학생한테 좀 덜어주련.”
그녀를 제지하듯 문 앞에 선 할머니가 말했다.
“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아 보이네요.”
흔쾌히 답한 진우에게 뭐라 하지도 못하고 지나는 그저 할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할 뿐이었다.
할머니가 사라지고 문이 닫혔다. 비로소 둘만 남게 되자 지나는 어쩐지 어색함에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나도 이만 가볼게……아니, 가보겠습니다.”
이제 함부로 말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누나.”
고작 두 음절이 지독하게 달콤했다.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아 지나는 서둘러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잠깐만.”
조금 다급해진 목소리에 지나는 어쩔 수 없이 발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자 진우의 시선과 맞닿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휴가라길래…… 보고 싶은 거 꾹 참고 있었는데…….”
나지막한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의 심장이 쿵 울렸다.
“할머니가 정말 서프라이즈해주셨네.”
어쩐지 감동받은 목소리였다.
“전무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감히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전무실의 주인으로 보란 듯이 서 있는 그를 보자 정말로 지나는 자신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무채색 톤의 인테리어는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나타냈다. 그리고 서진우.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곳의 주인 또한 그랬다. 인턴 때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지금은 확연히 달랐다. 원체 잘난 외모에 더해 지배자로서의 위압감까지 풍기고 있었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인턴이었을 때와 똑같은 서진우예요.”
문 앞에 멈춘 지나의 뒤로 진우가 다가왔다. 어딘지 애달픈 그의 표정은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지나를 향해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며 나직이 말했다.
“어떤 직위에 있든 누나를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한 번만 믿어주면 안 될까요.”
그의 목소리가 썼다. 구구절절 아픈 마음이 와 닿았다.
“내가 아직 용기가 없어서 그래. 자꾸만 도망가고 싶어.”
김도진에게 당한 아픈 기억은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아픔은 진피층까지 박혀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꾸만 통증이 느껴졌기에.
“그럼, 도망가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아프게 들려 지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도망가도 돼요. 얼마든지.”
진우의 목소리가 귓바퀴에 낮게 스며들었다.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는 마치 지나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내가 누나 곁으로 찾아갈게요.”
그게 어디든. 언제가 되었든.
“대신 제가 찾아가면 곁에 있게 해줘요.”
그 순간에도 지나는 진우가 얼마나 제 마음을 참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 순간에도 지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려,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걸 깨달았다.
“너…….”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몸을 휙 돌려 진우를 바라봤다. 지나의 혼란스러운 눈동자에 턱을 꽉 물고 있는 진우의 얼굴이 비쳤다.
“저는 몇 번이고 할 수 있어요. 누나라면 기다릴 수 있어요.”
거짓말일까. 또다시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진우의 말을 지나는 경계했다.
아니, 아니야. 저렇게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거짓일 리 없어.
마음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여린 갈댓잎이 꼭 자신과 같았다. 너무나도 유약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이었다.
“가보겠습니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잠시 진우를 만났을 뿐인데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진이 다 빠진 것처럼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그렇게 머리로는 정체를 숨긴 진우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진우를 보며 당장이라도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 보고 싶었다. 너무나 다른 정반대의 감정에 지나는 스스로에게 환멸이 일었다.
굳은살이 돋아 과거 따위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직도 그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게 자신의 모습이었다.
다급하게 회사를 빠져나온 지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진우의 마음에 심장이 터질 만큼 벅차올랐지만 겁먹고 채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얼마나 바보처럼 느껴졌을까.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입술이 찢어질 정도로 꽉 물었다. 그렇게 목적지도 없이 지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
임원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할머니, 강복희 여사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나뿐인 손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아니, 회사를 하나 차린다고 하더니 무슨 생각인지 제 아비 회사로 돌아왔단다.
강복희 여사의 아들 서일준 회장은 어미의 하나뿐인 자랑이었다. 그 자랑이 사라지게 된 계기는 이혼이었다.
강복희 여사는 진우의 친모를 예뻐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를 낳아준 것부터 모든 게 예뻤다. 그런데 그렇게 예쁜 며느리 몰래 바람을 피운 건 제 자랑인 아들이었다.
‘네 아비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잊었니?’
남편의 바람에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알면서 제 아비와 똑같은 짓거리를 되풀이하다니. 아들에 대한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제 손으로 일군 회사의 대표로 아들을 앉혔던 강복희 여사는 그날로 아들과 연을 끊었다. 어떤 연락도 받지 않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강수에 아들이 사죄하며 제 처와 자식에게 빌 줄 알았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을 강행한 일준은 바람을 피운 내연녀와 결혼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나쁜 자식.’
진우는 어미를 택했다. 어미를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진우 모친은 진우의 미래를 위해 아비와 지내라 했다.
피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강복희 여사는 그 장면만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흘렀다. 동시에 아들을 향한 분노가 일었다. 손끝이 떨릴 정도로 주체가 안 될 정도였다.
띵- 하강하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더니 나타난 이는 하필 서일준 회장이었다. 강복희 여사를 발견한 일준이 못내 당황했다.
“여기 어쩐 일로……?”
엘리베이터에 오를 생각도 못 한 서일준의 반응에 강복희 여사는 괘씸하다는 듯이 손가락을 들어 닫힘 버튼을 꾹 눌렀다. 하지만 서일준의 비서실장은 제법 유능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잽싸게 잡았다.
“회장님, 타시지요.”
비서실장의 말에도 넋이 나간 듯한 서일준이었다.
“다음 거 타거라.”
강복희 여사는 어림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늙은 꼬부랑 할머니의 기세에 놀란 비서실장이 어물거리며 손을 뗐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혔다. 서일준은 오랜만에 마주친 어머니와의 만남에 어딘지 복잡한 시선으로 마른기침을 뱉었다.
“저놈은 여전히 꼴 보기 싫구나. 안색이 어찌 저래 죽을 빛이니. 살아 움직이는 시체인 줄 알았네.”
아들의 병을 알지 못하는 강복희 여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못내 분한 듯 구시렁거렸다.
“저놈은 끝까지 어미 속을 뒤집는구나.”
강복희 여사가 이를 짓씹으며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이 회사의 전신을 창립한 창립주의 퇴장은 알아보는 이 하나 없이 쓸쓸했다.
***
“아, 여기 집이 괜찮네요.”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몇 번째인지 모르는 집이었다. 중개사와 함께 도착한 곳은 언덕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빌라촌 가장 끝 쪽에 위치한 오래된 빌라였다.
옥탑방이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마당도 있었고 주인이 일 층에 거주해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하라고 하는 점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특히, 저 멀리 반짝이는 푸른 한강이 보이는 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봤었던 비싼 오피스텔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저렴했지만 그럼에도 한강뷰라는 사실에 좋은 물건을 거의 공짜로 얻는 기분이었다.
옥탑방은 말 그대로 방 하나였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각오를 하라는 어느 인터넷 유저의 댓글이 스치듯 떠올랐지만, 이 정도 가격에 한강이 보이는 집을 얻기란 불가능했으니까.
“계약할게요.”
드디어 집을 구했다. 심장은 여전히 터질 듯 둥둥 뛰었지만, 지나는 애써 제 마음을 무시하며 새로운 보금자리를 둘러봤다. 왜인지 진우가 자꾸만 떠올라 반짝거리는 한강을 째려보았다.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