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잘생긴 이삿짐 직원 (36/80)


36 잘생긴 이삿짐 직원
2022.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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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별로였다.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해야 할 신랑은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버진로드를 걸었다.

중간에 윤주의 드레스자락을 얼마나 밟는지 균형을 잃는 바람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영원한 반려가 될 자신에게 집중해도 모자를 시간에 신랑은 식 순서마다 허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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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세요. 신랑님.’

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는 순간, 사진기사의 지적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인내심마저 사라져버렸다. 결국 신랑신부 모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로 사진을 찍었고…….

그날 출발한 신혼여행에서부터 냉랭한 분위기는 오늘까지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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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인데.’

제주도의 밤은 아름다웠다. 그에 반해 호텔 창에 비친 윤주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진 채였다.

방금 샤워까지 꼼꼼하게 하고 나왔건만 미동 없이 그대로 잠든 도진이었다. 이대로라면 하루 종일 잠만 쿨쿨 자대는 도진을 째려보다 여행이 끝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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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윤주는 최대한 인내심을 끌어모아 도진을 불렀다. 침대에 똬리를 튼 듯 이불을 덮고 있는 도진은 대꾸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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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이제 그만 자. 호텔비가 얼만데 잠만 자러 왔어?”

신생아로 돌아간 것처럼 24시간 잠을 잘 생각인 건지. 인내심이 바닥난 윤주가 이불을 확 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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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야!”

이불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도진 대신 베개더미가 쌓여있었다. 윤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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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어.”

황당함에 이어 배신감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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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네.”

입술을 비틀며 깨문 윤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갓 결혼한 임신 중인 와이프를 두고 혼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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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새끼…….”

어깨까지 흘러내린 가운을 추켜 입으며 윤주는 휴대폰을 집었다. 끊임없이 울리는 연결음 뒤에 끝끝내 도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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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윤주는 불안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좋은 남자인 줄 알았다.

다정한 남자인 줄 알았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남자의 실체는 형편없었다. 윤주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남자는 자신에 둘러싼 소문을 해명하고 나자 180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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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회장님이랑 너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지……?’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로 묻는 남자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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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오빠. 나 소문처럼 로열패밀리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런 소문이 붙었는지 모르겠어.’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니던 모습 때문일까. 윤주는 애교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때부터 어딘지 불안함을 느꼈지만 윤주는 애써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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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제길.’

무거운 한숨 끝에 붙은 욕설까지 들었지만 윤주는 설마 자신에게 화가 난 걸까 싶었다. 아니, 그때 알았다 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배 속에 이미 생명이 깃든 후였기에. 윤주는 자신의 성급한 행동을 후회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설레고 행복해야 할 결혼식과 신혼여행이 최악으로 얼룩졌다.

끝까지 연결되지 않는 휴대폰을 떨군 윤주는 서둘러 호텔방을 뛰쳐나갔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

한편, 도진은 호텔 일 층 바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 당일,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지나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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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회장 조카라는 소문에 윤주에게 관심을 보였다. 설마 뜬소문일 줄이야. 도진은 온더록스잔을 꽉 움켜잡고는 한입에 털어 넣었다.

거기에, 서진우.

한낱 인턴 나부랭이라고 생각했던 서진우가 전무라니.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서진우는 여유로우면서도 느긋한 지배자였다. 손을 마주 잡던 도진은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쩔쩔맸다.

정작 자신이 로열패밀리라고 잡았던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지푸라기였던 것이었다. 자기가 버린 이지나의 손을 잡아끈 서진우야말로 황금줄이었다.

자기 여자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겉만 화려한 허윤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똑똑하고 아름다웠다. 그저 수수하게 입은 것만으로 마뜩잖게 생각하던 자신의 머리를 냅다 후려갈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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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지나를 잡으면…… 안 될까.’

실수였다고 싹싹 빌면 안 될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도진이 인상을 구겼다. 바닥을 드러낸 술병은 벌써 여러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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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병 더 추가.”

술 냄새가 풍기는 도진의 주문에 바텐더가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찌푸렸다. 신혼여행이라고 온 게 분명한데 신부는 어디에 내팽개치고 혼자 와서 구질구질하게 앉아있는 건지…….

안 봐도 뻔한 사연이 짐작되었다. 고급스러운 바 테이블 위에 또 한 병이 추가되었다. 도진은 멍청한 시선으로 병을 집으려는데, 누군가 술병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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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도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피식 웃으며 반쯤 꼬인 혀로 반갑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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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어서 와. 내 마누라.”

빌어먹을. 저 하얀 옷은 설마 가운인가? 도진은 흐릿한 시선에 힘을 주며 윤주를 바라봤다. 바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느낀 윤주가 가운을 꽁꽁 여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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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빨리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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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앉아. 심심한데 술이나 마시자.”

윤주의 말에 아랑곳없는 도진은 옆의 빈자리를 툭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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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임산부한테 술을 권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술통에 빠진 것처럼 술 냄새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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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여기서 자꾸 그러면 나 바로 서울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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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도진은 빈 잔에 술을 쪼르르 따르며 키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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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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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지 마.”

방금과는 다르게 도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마치 술에 취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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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오빠 소리 하지 말라고.”

지나가 부르던 부드러운 목소리와 결이 달랐다. 윤주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고막을 박박 긁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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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얼굴 보기 싫으니까 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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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도진의 말에 충격받은 윤주가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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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지금 술을 먹고 정신이 없나 본데……. 우리 지금 신혼여행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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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이고 나발이고 꺼지라고!”

시끄러워 미치겠으니까!

쨍그랑!

동시에 날아간 술병이 깨졌다.

깜짝 놀란 윤주가 어깨를 움츠렸다. 놀란 건 윤주만이 아니었다. 홧김에 던진 도진도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그대로 낭패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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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명백한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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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는 지금 가운을 입고 여기까지 내려오는 게 제……정신이야?”

괜히 윤주를 타박하는 도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윤주는 커다란 눈으로 도진을 노려보다 휙 몸을 돌려 바를 나갔다. 술이 확 깬 도진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

집을 구한 지나는 휴가 기간에 맞춰 이사를 하기로 했다. 진우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이 벌써 아득해졌다. 전무가 된 진우의 존재가 저만치 멀어진 느낌이었다. 지나는 마음을 계속해서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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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 달라졌어.’

이제 사수와 인턴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하늘에 가까운 곳에 앉은 사람이었다. 그 점이 이상하게 지나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드디어 이삿날이 되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지나는 밤새 싼 이삿짐을 천천히 둘러봤다.

어릴 때부터 살아온 집이었는데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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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야, 이삿짐 아저씨 왔나보다.”

현관문 벨이 울리고 곧이어 지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는 눈가를 살짝 훔치며 방에서 나왔다. 문을 열자 야구모자에 편안한 청바지, 티셔츠를 입은 서진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지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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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여기 네가 왜…….”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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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힘 좀 보태러 왔어요.”

진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자 지나의 뒤로 엄마의 깜짝 놀란 탄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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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이삿짐 아저씨들 요즘엔 얼굴로 뽑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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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마, 아냐. 여기는 내…….”

지나가 황급히 말을 버무리려는데 마땅하게 소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지나를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오늘따라 유독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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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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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엄마의 표정에서 김이 팍 새는 소리가 났다. 얼굴로도 소리가 들리는구나, 지나는 머쓱한 얼굴로 엄마의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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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진우입니다.”

그 사이로 진우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언제 들어도 심장이 쿵쿵 뛰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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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나 아는 동생이구나. 반가워. 앞으로도 지나랑 친하게 지내요.”

어딘지 사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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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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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목소리도 너무 좋다. 어머님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설렐 수가.”

지나는 더 이상 엄마의 호들갑을 보기 힘들어 얼른 두 손을 마주쳤다. 그러면서 진우를 은근히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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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오면 짐 빼야 해. 빨리 움직여야겠다.”

지나의 눈빛에도 진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빙긋 미소를 지은 채 지나를 바라봤다. 말은 안 했지만 그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넘어가면 안 돼. 저 눈빛에.

지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진우에게 어떻게 오늘 이사하는 걸 알았냐 물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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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침 안 먹었지?”

그 찰나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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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순간 당황한 빛이 진우에게 스쳤다. 지나는 얼른 눈썹에 힘을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안돼. 무조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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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입니다.”

그런 지나의 신호를 알았음에도 진우는 태연히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너.

그의 속셈을 파악하려는 듯, 지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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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유, 안돼. 힘쓰려면 밥 먹어야지.”

주방에서 툭 튀어나온 엄마가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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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금방 차려줄게.”

진우가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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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세상에. 어느새 신발을 벗고 들어온 진우가 주방으로 향했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엄마의 곁에 선 진우의 훤칠한 키에 주방이 더 비좁게 보였다.

그 안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엄마의 웃음소리가 경쾌했다. 당황한 지나는 입을 쩍 벌리고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꾸만 지나의 입가에 비실비실 미소가 흘렀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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