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옆에 있어 줄게요
(38/80)
38 옆에 있어 줄게요
(38/80)
38 옆에 있어 줄게요
2022.12.09.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지나는 태연한 척 진우의 널따란 등을 가벼이 밀었다.
“정리할 일이 산더미야. 얼른 가.”
진우는 밀리는가 싶더니 휙 몸을 돌렸다.
“내일.”
순간 눈이 가까이 마주쳤다. 가끔 진우의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일?”
지나가 되묻자, 진우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내일 봐요. 회사에서.”
뭐라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지나의 정수리에 입을 가볍게 맞춘 진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일……? 회사에서……?”
뒤늦게 그가 전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본다는 거지. 지나는 뒤늦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얼이 빠진 얼굴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대충 넣어둔 짐들을 제대로 정리하는 건 의외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얕잡아 본 지나는 결국 캄캄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침대 위에 누울 수 있었다.
“와……. 이사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입원해야겠다.”
내일 드디어 휴가가 끝나고 회사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자연스레 사무실에 있을 진우를 떠올렸던 지나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제 진우는 사무실에 없다…….’
짧은 시간 함께 있었다고 습관처럼 떠올라버렸다. 진우가 없는 사무실을 떠올리자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속이 텅 비어버린 허전함도 함께였다.
“씻고 자야지.”
그래도 같은 회사에 있으니까. 오다가다 우연히 볼 수 있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듯, 지나가 중얼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휙 뒤돌았다. 창밖으로 캄캄한 어둠뿐 아무것도 없었다.
“아……. 너무 피곤한가.”
예민하게 느껴진 탓일까 싶어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한 지나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블라인드를 달지 못해 찝찝했다. 옥상이고 지나가 사는 옥탑방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내일 달아야겠다.”
샤워를 마친 지나는 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머리를 말리는데 창 너머로 누군가의 시선이 자꾸 느껴졌다.
의아하게 생각한 지나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을 간신히 누르며 창가로 다가갔다. 꼼꼼하게 바깥을 살펴봤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두 번이나 잘못 느낀 걸까. 정말 피곤한 탓일까. 뭉친 목 언저리를 뭉근하게 비비며 지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침대에 앉았지만 피어오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찌누를 품에 안고 휴대폰을 들었다.
[집에 잘 들어갔어?]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지만 문자상으로는 어떠한 티도 나지 않았다. 굳이 진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혼자 지낼 수 있냐며 걱정한 진우였다. 자신 있게 말한 지 몇 시간조차 지나지 않았다.
[네. 누나는 정리 다 끝났어요?]
답장은 빨랐다. 진우의 답장에 한결 긴장이 가라앉았다.
[응. 다 했는데…….]
아차, 잠시 고민하던 찰나, 실수로 전송이 되어버렸다. 당황한 것도 잠시 진우에게 전화가 왔다.
“어…….”
- 안 자요?
낮은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듣기 좋게 울렸다.
“넌……?”
- 전 누나 자면 자려고요.
진우의 목소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야…….”
신기하게도 안정감이 들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뿐인데.
“빨리 자. 오늘 무리했잖아. 피곤할 텐데…….”
- 좋았어요.
“알고 보면 힘쓰는 게 체질이었어?”
- 하하. 그랬나 봐요.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힘 더 쓸 수 있었는데.
어딘지 아쉬움이 물씬 담긴 목소리에 지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자야겠다.”
허겁지겁 서두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다시금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퍼졌다.
- 보고 싶었어요.
지나가 없는 회사를 다니는 동안, 진우는 힘들었다. 잠시 틈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저도 모르게 지나를 찾았다.
- 저에게는 아직도 사수가 필요해요.
뜨겁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지나의 심장이 울렸다.
“전무님의 사수라니……. 큰일 나.”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가 짐짓 심각하게 말했다.
- 얼른 자요. 내일 회사 지각하면…….”
진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 회사 로비에서 누군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진지한 농담에 지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뭐야. 긴장이 다 풀려서 이제 자도 될 것 같아.”
함께 웃던 진우의 숨소리가 뚝 멈췄다.
- 무슨 일 있었어요?
어딘지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나는 순간 놀랐지만 얼른 얼버무렸다.
“아, 아냐. 그냥 첫날이고 낯설어서 그냥 예민해서 그런 것 같아.”
- 후……. 잠깐 갈게요.
“응?”
설마 집에서 다시 온다는 거야? 당황한 지나가 허둥거렸다. 그러나 전화는 금방 끊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을 오르는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익숙한 그림자가 창밖을 스쳤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빈약하게 울렸다. 오 분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나는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진, 우야?”
다시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누나.”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 진우였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지나는 호흡을 갈무리하며 문을 열었다.
“너…… 어떻게 이렇게 금방 와?”
아무 말 하지 않은 진우를 보며 지나는 곧 깨달았다. 그의 옷이 아까 헤어졌을 때와 그대로였다. 그는 그때부터 죽 여기 있었던 것이었다.
“집에 안 갔구나……?”
“첫날밤이니 혼자라 무섭다고 할까봐…….”
말꼬리를 흐리는 진우에게 지나가 덥석 안겼다.
“씩씩한 척했는데…….”
그런 지나를 꼭 안으며 진우가 미소지었다.
“용감했어요.”
정말로.
“아냐, 나는 겁쟁이야.”
“하……. 겁쟁이는 저예요.”
보고 싶었는데 더 일찍 못 왔어요. 누나한테 거절당할까 봐.
진우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지나를 더 꼭 껴안았다.
“옆에 있어 줄게요.”
그의 달콤한 말에 지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홀로 밤을 지새우기에는 밤이 너무 어두웠으니까.
***
정신없는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회사로 출근했다. 결국 밤새 함께였던 진우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동이 틀 무렵에 집을 나갔다. 그렇게 회사로 바로 갈 줄 알았건만, 말끔하게 출근 준비를 한 진우는 지나를 데리러 왔다.
그래서였을까. 진우의 자리가 텅 비어 있음에도 지나는 허전함을 느낄 수 없었다.
“자기!”
번개처럼 뛰어와 지나를 반기는 사람은 지혜였다.
“휴가 잘 보냈구나.”
단번에 결론짓는 지혜를 향해 지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떻게 알았어?”
“얼굴이 반짝거려.”
과장 조금 보태 지혜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말하자 지나가 풋, 웃었다.
“그게 뭐야.”
어머, 감사합니다.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지나와 지혜의 시선에 도진이 직원들에게 뭔가를 나눠주고 있었다.
“신혼여행 갔다 왔잖아.”
아,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나는 아무런 감흥 없는 눈으로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도진과 눈이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도진이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어. 이지나 대리.”
도진의 반갑게 웃는 얼굴이 퍽 불길했다. 지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사 상사와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에서는 딱 맞는 인사법이었다.
“잘 지냈어? 이 대리도 휴가였다면서.”
자기도 모르게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뻔한 지나는 연애할 때 휴가를 함께 낸 걸 곧 떠올렸다.
“휴가를 같이 갔다면 더 좋았을 텐데.”
뻔뻔하게 말하는 모양새를 보며 지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초콜릿 사왔어. 이 대리도 달콤한 거 좋아하잖아.”
도진이 내미는 초콜릿 몇 알을 보자 얼마 전, 진우가 챙겨준 초콜릿이 떠올랐다.
“제가 좋아하는 초콜릿은 다른 거라서요.”
예의 바르게 거절한 지나는 도진이 제발 사라지길 바랐다.
“어머, 그거 저 주시면 안 돼요?”
지나 대신 지혜가 잽싸게 말하자 도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지혜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이거 비싼 거야.”
겨우 초콜릿으로 생색은…….
“저 이만 일 하겠습니다.”
간접적으로 가달라 말한 지나는 책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제발 자신 따위에게 이딴 수작 부리지 말아주길.
“허윤주 사원은 안 보이네요.”
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도진이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무리해서인지 몸이 안 좋아서…….”
“어머, 신혼여행 때 무리했구나.”
어딘지 엉큼한 표정으로 지혜가 말하자 도진이 당황해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우린 절대 그런 거 안,”
지나를 의식한 도진은 하던 말을 얼른 멈췄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혼여행 때 손 한번 안 잡았다는 게 말이 될까 싶었던 탓이었다.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오늘만 쉬기로 했어. 흠흠.”
부연설명까지 마친 도진은 헛기침을 하고는 사라졌다.
“와……. 초콜릿 되게 맛없다.”
언제 깠는지 입안에 초콜릿을 넣고 우물거리던 지혜가 중얼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비로소 혼자가 된 지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았다. 방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도진의 눈은 미련이 철철 넘쳤다.
‘왜 아직까지…….’
결혼식까지 올린 마당에 지나에게 미련을 갖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관자놀이를 짚던 지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쌓인 일이 많았다. 도진에게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었다.
그리고…….
‘곧 부서이동이 있을 거예요.’
아침에 헤어지기 전, 진우가 했던 말이었다. 회사에 올 때까지 지나의 손을 놓지 않았던 진우는 따뜻한 눈빛으로 지나에게 말했다.
‘함께 있고 싶어서 권력 좀 썼어요.’
장난 반 진담 반이 들어간 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의 말이라면 이제 도진과 보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아무리 잊은 과거라 하더라도 도진을 마주해야 하는 지나의 불편함을 진우가 앞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으면 됐다.
“헐, 대박.”
파티션 너머 지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대화창이 떴다.
[ 대박. 자기. 대박 사건! ]
역시 소문에 빠른 지혜다웠다. 부서 이동에 관한 건 지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지만 지혜를 맞춰주기 위해서 물음표를 열심히 쳤다.
[ ??? ]
[ 서진우 전무님 미국 지사로 파견 나가신대!!!!! ]
어……?
순간 지나의 손가락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