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남는 힘은 다른 데 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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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남는 힘은 다른 데 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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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남는 힘은 다른 데 쓸까요?
20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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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진우가 미국을 간다고? 어젯밤, 아니 오늘 아침만 해도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혼란스러운 지나의 마음을 모르는 지혜의 문자는 연신 대화창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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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한국에 남아 있을 인재가 아니셨어. 우리 사무실에 인턴으로 있을 때가 호시절이었다. 정말…….]
아쉬움이 가득한 그녀의 문자가 지나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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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점심 뭐 먹을까?]
지혜는 결국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숨죽이듯 모니터를 바라보던 지나가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같이 있을 수 있게 부서이동을 한다는 말을 해놓고는…….
미국으로 떠난다는 건 다 뭘까.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했다. 일단 진우에게 물어봐야겠지. 지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손끝은 제대로 터치하지 못했다. 입술을 꼭 깨문 지나는 심호흡을 하며 떨림을 멈추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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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와 있어?”
진득한 음성이 지나의 곁에서 들렸다. 화들짝 놀란 지나의 앞에 도진이 서 있었다.
이제 보니 그의 길쭉한 눈매와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꼭 뱀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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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화, 화장실 좀 가려고요.”
하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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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은 그쪽이 아닌데.”
어딘지 조소하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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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볼일 보십시오.”
지금 당장 진우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는 매몰차게 도진에게 말하고는 도진의 앞을 벗어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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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일, 이지나에게 있어서.”
이지나. 직함 없는 이름 석 자에 심장이 둥 울렸다. 설렘이나 떨림이 아닌 불길함이 전신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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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시죠?”
최대한 담담하게 되묻는 지나를 향해 도진이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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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야. 너에게 속은 것 같아서.”
도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지나가 흠칫 놀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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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사귈 때는 이렇게 안 예뻤는데…….”
후회가 진득하게 묻어난 목소리였다. 그의 눈빛조차 애절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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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내에서 옛날이야기는 삼가시죠.”
지나가 다부지게 맞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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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튕기지도 않았고 말야.”
마치 옛 기억을 회상하듯, 도진의 눈가는 어딘지 촉촉했다. 지나에게는 끔찍한 잔상으로만 떠오르는 기억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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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나가 그대로 도진을 피해 걸어가려는데 도진의 팔이 지나를 확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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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안 끝났어.”
당황한 지나가 도진을 노려보는 찰나,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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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시죠.”
서진우였다. 아침에 만났던 모습 그대로 잘생기고 근사한 자태로 지나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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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진 과장님. 제 여자가 팔이 워낙 연약해서.”
다가온 진우가 손을 뻗어 지나를 잡고 있는 도진의 팔을 뗐다. 힘이 얼마나 센지 도진은 순간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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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신 분인 만큼 제 여자와 독대하는 건 삼가셨으면 좋겠군요.”
진우는 차분하지만 싸늘한 어조였다. 그의 눈빛 또한 보기 드물게 살벌했다.
결국 도진은 한 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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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이제 한낱 인턴 애송이가 아니었다.
도진이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할 하늘 같은 전무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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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세요.”
그의 송곳 같은 한마디에 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얼음 같은 분위기는 봄날처럼 온화해졌다. 지나의 손을 잡은 진우의 손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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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지나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빛과 달리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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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미국 가……?”
바로 물어보려던 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툭 튀어나온 말에 지나는 자신이 묻고도 움찔 떨었다.
그런 지나를 보던 진우의 시선이 살짝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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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얘기 못 해서 미안해요. 확실해지면 말하려고 했어요.”
서운함이 앞섰다. 그의 목소리에 안도감보다 먼저 든 감정은 분명 서운함이었다.
뒤이은 감정은 상실감. 마음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시렸다.
그가 떠난다는 생각에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느껴졌다. 진우에게 감정을 드러내기 싫은 지나는 서둘러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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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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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결 건조해진 지나의 질문에 진우는 대답 대신 잠시 지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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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해지진 않았어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진우의 살짝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지나는 천천히 그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치졸하게도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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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떠나기 전날 알려줄 생각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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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없잖아요.”
진우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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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하러 갈게.”
더 묻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눈물을 들킬 거 같아 얼른 몸을 돌렸다.
차라리 잘됐어. 마음을 더 주기 전에 정리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진우 또한 자신을 잡지 않았다. 어쩌면 그 역시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최악이었다. 도진을 만났을 때보다 더.
자리에 앉은 지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만 봤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된 기분이었다.
***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윤주는 갑자기 하혈을 했다.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 이유였다. 신혼집 대신에 시댁 한편에 살림을 차린 윤주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아프다는 데도 도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더 이상 윤주에게 흥미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사랑하지 않았다. 윤주가 자신을 홀린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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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피해자지.’
업무에 통 집중하지 못한 도진은 파티션 너머 추정되는 지나의 자리를 힐끔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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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얼마든지.
도진은 신혼여행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버렸으니 자신이 다시 주우면 된다고. 처음부터 제 여자였으니까. 다만 서진우의 존재가 걸렸지만 미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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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우가 널 갖고 논 거야. 이지나.’
도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지나의 사색이 된 표정을 보니 안 봐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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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고 한 거겠지.’
같은 남자가 봐도 우월한 피지컬과 신분이었다. 보통 금수저가 아니었다. 이지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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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제 짝은 정해져 있다니까.’
도진의 짝은 원래부터 이지나였다. 허윤주가 유혹한 바람에 어긋나버렸지만. 다시 맞추면 됐다.
이지나는 늘 제 말을 들었으니까. 보기 드문 어리숙하고 순종적인 여자였으니까. 다시 한번 도진이 피식 웃으며 서류로 눈을 내렸다.
***
한편 진우는 전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한껏 낮게 가라앉은 눈빛은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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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가거라.’
아버지 서 회장의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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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로서 본사에 남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진우가 거절했지만 서 회장은 완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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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장을 확대하는 데 잡음이 많다. 네가 가서 정리해라.’
끝까지 거부할 수 없었다.
지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어떻게 말해도 그녀에게 충격이 될 말이었다.
그리고 결국 지나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 번지는 상실감을 읽었다. 진우는 차마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신중하게 말하려던 게 오히려 그녀를 상처 준 꼴이 되었다.
펼쳐놓은 서류들에 집중이 도무지 되지 않았다. 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지나의 눈동자가 가슴에 박힌 듯, 뜨끔뜨끔하게 아팠다.
이대로 그녀가 떠나갈까, 두려웠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진우가 벌떡 일어났다.
***
퇴근할 때까지 진우에게 연락이 없었다. 지나 역시 진우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마음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갑자기 떠난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이 세상에 완전히 혼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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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요?”
언제부터 왔는지 옥탑방 계단을 다 오른 지나의 앞에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가 저무는 노을을 등지고 평상에 앉아있는 진우의 모습은 막 하늘에서 강림한 신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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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언제 왔어?”
놀란 건 순간이었다. 반가움에 지나의 눈동자가 살포시 휘었다. 아니, 웃으면 안 되는데. 스스로 놀랐지만 터져 나오는 감정을 막을 수 없었다.
느릿하게 일어난 진우가 지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큰 키에 지나의 고개가 자연히 들려졌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달콤한 체취가 푹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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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니까 블라인드를 안 달았더라고요.”
진우가 앉아 있던 자리로 큼지막한 봉지들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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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젯밤, 무의식적으로 창문을 힐끔거리는 지나를 언제 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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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충 눈대중으로 맞춰서 샀는데 잘 맞을지 모르겠어요.”
진우가 상의를 천천히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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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벗는 거야?”
지나가 화들짝 놀라며 묻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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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힘 좀 쓰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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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달 줄 알아?”
지나의 말에 진우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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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해 보죠.”
지나가 문을 열었다. 하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진우가 블라인드를 꺼냈다. 설명서를 찬찬하게 살피던 진우는 곧 능숙하게 설치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돼서 창문 위로 베이지색의 블라인드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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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어젯밤 소름 끼치는 시선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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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그 말에 진우가 장난스럽게 지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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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멋져요?”
어딘가 찔린 듯한 얼굴로 지나가 살짝 머뭇거렸다. 장난에는 장난으로 받아줘야 인지상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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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긴. 너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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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힘은 다른데 쓸까요……?”
꾹 참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깔린 열기를 지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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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데 어디……?”
진우가 천천히 다가와 지나의 앞에 가까이 섰다. 그의 그림자가 지나를 덮치듯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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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줄게요. 지금.”
진우의 눈이 빛났다. 그의 진한 체취가 확 끼치자 다시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내려오는데, 누군가 현관을 세게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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