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저희 결혼 허락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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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저희 결혼 허락해주십시오
2023.01.10.
“응?”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설마.
“같은 샴푸 쓰나?”
킁킁거리며 코를 벌름거리는 지혜를 보며 지나가 얼른 상체를 뒤로 물렀다.
“그럴 리가.”
요즘 들어 진우가 거의 지나의 집에 살다시피 했기에 지나의 샴푸를 같이 썼다. 그 사실을 떠올린 지나는 어색하게 입가를 올렸다.
“향이 비슷한 샴푸가 많잖아.”
“그런가. 이 향 좋네. 어디 거야?”
의심은 자연스레 샴푸로 넘어갔다.
“나도 쓸래.”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지나가 말했다.
“알았어. 까짓것 언니가 하나 사줄게.”
“정말?”
지혜가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나 화장실 좀.”
사무실에 들어서기 전 지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자연스레 피하려던 지나의 팔을 누군가 확 잡아끌었다.
“누나.”
진우였다. 깜짝 놀란 지나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여기 왜 있는 거야?”
반가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안이 벙벙한 지나를 진우가 품에 꼭 안았다.
“어떻게 된 거야?”
그의 품에서 달콤한 향이 훅 풍겼다. 자신의 것과 같은 그 향기였다.
“보고 싶어서요.”
지나의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가 여지없이 뜨거웠다. 이내 고개를 들어 지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지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거침없이 고개를 내려 지나의 입술을 머금었다. 지나는 들고 있던 커피 컵만 꼭 붙든 채, 그의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이따 집에서 봐요.”
짧지만 강렬한 입맞춤을 끝내고 진우는 지나를 놓아줬다. 비상계단 위층으로 진우가 사라지자 그제야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미쳤나봐…….”
아직도 화끈거리는 입술을 매만지며 지나가 중얼거렸다.
서진우가, 너무 좋다.
***
지나 부모님이 이사 간 집은 강원도 한적한 산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산에 둘러싼 소담한 동네는 아늑하고 정겨웠다.
“엄마! 아빠!”
장장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지나가 차에서 내리며 반갑게 외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지나의 목소리에 문이 활짝 열리고 부모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아이구, 우리 딸!”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온 지나 어머니가 지나를 와락 껴안았다.
“그새 더 예뻐진 거 같은데?”
지나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이곳저곳 살피며 연신 미소를 지었다.
“엄마도 더 예뻐진 것 같아.”
“어유, 얘는.”
지나의 말에 지나 어머니가 기분이 좋은 듯 눈을 흘겼다. 말뿐 아니라 지나 어머니는 훨씬 밝아진 얼굴이었다.
강원도 생활이 활력을 주는 것 같아 내심 걱정하던 지나의 마음이 안심되었다. 곧 지나의 곁으로 다가온 진우도 반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진우를 바라본 지나 어머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머! 그때 그 이삿짐 직원!”
직원으로 착각했던 그때가 강렬하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동생이라니까.”
당황한 지나가 얼른 말을 덧붙이자 지나 어머니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맞아. 맞아. 동생. 너 남자친구랑 같이 온다며.”
말하던 지나 어머니의 눈동자는 이번에 곱절로 더 커졌다.
“어,어머, 어머, 어머나!”
어머니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지나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나, 지금 회사에 입사했을 때보다 훨씬 더 기쁜 모습이었다.
“세상에. 너무 잘됐다. 어서 들어와요.”
지나 어머니의 격렬한 반응에 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난 그럴 줄 알았어. 세상에.”
“여보 마누라, 주책 좀 그만 떨고 빨리 들어와요.”
결국 보다 못한 지나의 아버지가 한소리를 했다.
“엄마가 솜씨 발휘 좀 해야겠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없는 어머니는 중학생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집이 의외로 현대적이야.”
집안을 둘러본 지나가 평가하듯 말하자 시원한 오미자차와 수박을 잘라 내어오던 지나 어머니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얘는, 초가집에 사는 줄 알았니? 없는 거 빼고 다 있어.”
원래 살던 집의 물건이 그대로 있어서인지 예전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거실에 자리 잡은 지나는 수박을 한 입 와삭 물었다. 달콤하면서 시원한 수박 맛이 갈증을 단번에 없앴다.
“바다는 여기서 좀 더 가야 해. 한 시간 정도?”
지나의 부모님은 사는 동네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갔다. 그것도 잠시, 밖에 누군가 도착한 소리에 지나 어머니가 의아해했다.
“어머, 또 누가 올 사람이 있어?”
지나 역시 알 수 없었기에 눈을 크게 떴다.
“택배인가?”
지나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대문 앞에 커다란 은빛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깔끔한 세미 슈트를 입은 기사가 내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지나 아버지의 뒤로 따라 나온 어머니와 지나는 모두 의아한 얼굴이었다.
“서진우 전무님께서 주문하신 물건 배달왔습니다.”
아, 선물……. 그제야 지나가 뒤늦게 입을 벌렸다. 진우와 백화점에 가서 부모님 선물을 차마 못 고르고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저게 다 뭐지? 지나가 얼른 진우를 쳐다보자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어디에 두면 될까요?”
직원의 질문에 얼이 빠져 있던 지나 부모님은 뒤늦게 대답했다.
“집 앞에 두세요.”
크기가 큰 건지 알 수가 없기에 일반 택배처럼 두고 가라는 말이었다.
“부피가 커서 저희가 직접 설치를 해드려야 합니다.”
“네?”
어느새 목장갑을 낀 직원의 말에 지나 부모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일단 꺼내겠습니다.”
이윽고 트럭 뒤쪽의 문이 열렸다. 크고 긴 박스를 직원들이 조심스레 꺼내 옮기기 시작했다. 마당 앞쪽에 두기 무섭게 다른 박스를 꺼내왔다. 그러기를 몇 번…….
지나 부모님의 집 마당은 박스들로 쌓여갔다.
“이, 이게 다 뭐라니……?”
지나 어머니가 놀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지나에게 물었다. 지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우를 바라보며 얼른 물었다.
“저게 다 뭐야……?”
“누나가 못 골라서 제가 그냥 대충 샀어요.”
백화점에서 직접 고르지 못했던 지나에게 진우가 한 말이 뒤늦게 기억났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한다더니 세상에 이게 다 뭐람.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박스들을 내려둔 직원들은 그제야 자리를 떴다. 그중 설치가 필요한 것들은 집 안에 설치까지 완벽하게 한 후였다.
“안마의자 너무 좋다.”
지나 어머니가 커다란 안마의자에 폭 쌓여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런 선물 필요 없는데.”
말과는 달리 행복함을 뿜어내는 어머니를 보며 지나는 할 말을 잃은 듯 어색하게 웃었다. 지나 아버지 역시 새 골프채를 휘두르며 퍼팅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야. 역시 이 브랜드가 좋구먼.”
마당에 온 박스를 뜯어보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이게 다 뭐야.”
지나는 진우를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그런 지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던 진우가 대답했다.
“몰라서 다 산 거야?”
대답 대신 빙긋 웃는 진우의 모습에 지나가 이마를 탁 짚었다.
“결혼 허락 받으러 왔으니 잘 보여야 해서요.”
“뭐?”
진우의 다음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지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뒤, 진우는 지나 부모님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아버님, 저희 정식으로 교제합니다. 이번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마음에 안 차시더라도 예쁘게 봐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중요한 회의들을 진행할 때와 달리 진우는 어딘지 긴장한 얼굴이었다.
“저희 결혼 허락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흐뭇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서 서방.”
엄마?
지나가 휙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지나 어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내가 예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렸던 완벽한 사위야. 역시 우리 딸이 남자 보는 안목이 훌륭해. 그거 하나 엄마 닮지 말라고 했더니 다행이야.”
“아니, 이 사람이…….”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어머니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지나가 사랑하는 남자면 우리는 무조건 오케이.”
“허허. 그래. 우리 딸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
부모님의 말에 지나는 어쩐지 마음이 터질 듯 몽글거렸다. 그러면서도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감사합니다. 우리 지나, 제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아끼겠습니다.”
고개를 든 진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아니, 뭐가 이렇게 금방 허락해줘요? 사는 곳, 부모님, 직업 이런 거 원래 막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지나가 장난스레 발끈하자 지나 어머니가 마당을 향해 눈짓했다.
“우린 이미 다 파악했다. 지나야.”
마당에 쌓인 어마어마한 선물 클래스 자체가 인증이었던 셈이었다.
“저거 카드로 막 당겨 쓴 걸 수도 있잖아. 엄마.”
아니, 그렇게 사람이 의심이 없나.
“카드도 한계가 있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하긴, 10톤 트럭에 가득 찬 박스는 보통 월급쟁이의 카드로는 꿈도 꾸지 못할 거였다.
“아무튼 결혼 날짜 잡으면 알려주게.”
무척 호의적인 부모님의 모습에 지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진우가 깔끔하면서도 단정하게 미소지었다.
저녁상은 오늘이 마지막 만찬인 것처럼 푸짐했다. 지나 어머니는 온갖 솜씨를 발휘했다. 지나는 처음으로 상다리가 부러질까 걱정됐다.
“우리 서 서방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조금씩 차려봤네.”
그 장모에 그 사위였다. 지나가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이 정도 규모면 동네 잔치를 해야 해…….’
“잘 먹겠습니다. 장모님.”
주거니 받거니, 진우가 넉살 좋게 말하자 지나 어머니가 꺄르르 웃었다.
“이렇게 잘난 사위를 두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지나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마음까지 배불러지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진우가 두 팔을 걷어 설거지를 했다. 귀한 사위 손에 물 묻힐 수 없다던 어머니는 어느새, 주방에서 사위와 함께 알콩달콩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간식거리를 준비하던 어머니의 질문에 지나가 피식 웃었다.
“음……. 몰라. 일 년 뒤?”
“뭐?”
사과를 자르던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