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내 마음을 흔드는 바다 같은 사람 (48/80)


48 내 마음을 흔드는 바다 같은 사람
2023.01.13.



 


“아니, 왜 미뤄. 말 나온 김에 해야지.”

지나 어머니가 못마땅한 듯 눈을 흘겼다.


“아니, 그게…….”

지나가 머뭇거리자 어머니가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 올렸다.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야. 서 서방이 일 년 뒤로 잡재?”

“아니, 진우 미국 출장 가거든.”

어머니의 기세에 못 이긴 지나가 결국 실토했다.


“출장 얼마나 가는데?”

“안 길어. 일 년?”

“일 년?”

지나 어머니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일 년이면 강산이 변하지!”

“엄마 그건 십 년이지.”

“못 만나는 연인에게는 일 년이 십 년이야.”

“우린 괜찮아. 남들과 달라.”

지나가 변명하듯 말하자 지나 어머니가 과도를 내려놨다.


“너 이번에 남자친구 데리고 온다길래 도진인가 그놈인 줄 알았다.”

차분해진 어머니의 목소리에 지나는 덩달아 눈을 내리깔았다.


“5년씩이나 사귄 놈과도 헤어지는 판국에. 그것도 사내연애였잖아. 같은 회사에서 매일 얼굴 보면서도 결국은 헤어지는데 일 년씩이나 해외 출장을 갔다 오는 거, 엄마는 못 믿는다.”

“진우는 같이 가자고 했어. 그런데.”

“같이 가. 그러면.”

“어?”

제 편을 들을 줄 알았던 어머니가 말하자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같이 가라고?”

“결혼식 잡아놓고 미국 출장에 같이 따라가서 결혼 전에 너도 좀 여행도 하고 쉬다 와.”

“우리 엄마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사랑하는 놈이라 놓치기 싫네.”

생각지도 못한 어머니 말에 지나가 말을 잠깐 멈췄다.


“진우가 나 사랑하는 거 엄마가 어떻게 알아?”

“지나가는 유치원생도 알겠구먼. 눈에 사랑이 뚝뚝 흐르는 거.”

어머니의 말에 지나 얼굴이 괜히 화끈거렸다. 그러다가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지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전남친은 안 그래 보였어?”

케케묵은 상처를 끄집어내려니 목에 뭔가가 걸린 듯 꺼끌꺼끌했다.


“그놈은 몇 번 보지도 않았지만 영 글러 먹었어. 눈깔이가.”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지나가 풉, 웃었다.


“하여간 엄마 진짜 용하다니까.”

“그놈이랑 잘 헤어졌지 뭐. 결혼한다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아휴, 여기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과일 가져가서 먹어.”

거실 쪽으로 힐끗 턱짓하며 지나 어머니가 말했다. 거실에서 지나 아버지와 진우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주로 아버지의 ‘라떼는’ 이야기였지만 진우는 지루한 내색 없이 중간중간 감탄사를 내뱉으며 경청하고 있었다.


“엄마 옆에 있을래.”

“우리 사위 좀 구출하러 가.”

일을 도우려는 지나의 등을 일부러 떠밀었다. 집에 오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모든 긴장이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



“어이구, 이제 잘 시간이네.”

시계를 흘끗 본 지나 아버지의 말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말이라 부모님 집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는데 막상 진우의 잠자리를 생각하니 어색해졌다.


“어, 손님방에 이불 갖다 놨어. 침대가 없어서 조금 불편할 거야.”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마침 손바닥을 딱 마주치며 지나 어머니가 유쾌하게 말하자 진우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손님방이라고 해봤자 지나 부모님의 방과 지나의 방 외에 나머지 창고방 같은 곳이었다. 그런대로 부랴부랴 치워놨지만 볼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푹 쉬어요.”

방 앞에 있던 지나 어머니가 어색하게 말하고 도망가듯 사라졌다. 키가 큰 진우가 누우면 아슬아슬 머리가 맞닿을 것처럼 좁은 방이었지만 진우는 마음에 든 듯 자리에 털썩 앉았다.


“불편해도 하루니까 참아.”

지나가 미안한 듯 눈썹 끝을 내리며 말했다.


“누나랑 같이 못 자서 불편하지만 참을게요.”

능청맞게 속삭이는 진우를 향해 지나가 눈을 치떴다.


“너 정말 이럴 때 보면 능구렁이 같아.”

“하……. 사랑해요.”

진우가 지나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갑자기?”

그의 입술이 닿은 뺨을 붉히며 지나가 장난스레 말했다.


“언제나 늘.”

진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말하고 또 말해도 부족한데.”

더 있다가는 그의 분위기에 넘어갈 것 같아 지나는 얼른 일어났다.


“이만 자. 너 졸려서 눈 풀렸어.”

반짝반짝 빛나는 진우의 눈동자를 보며 지나는 억지로 말도 안 되는 퉁을 줬다.


“누나도 잘 자요.”

이윽고 방문을 닫고 나온 지나는 그의 입술이 닿은 뺨을 문지르며 제 방으로 들어왔다.

진우가 부모님의 집에 온 것도,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자는 것도 모두 기분이 이상했다. 소름이 돋을 만큼, 심장이 둥둥 뛰었다. 그래서인지 밤이 깊어지도록 지나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



“엄마, 이게 밥이야 산이야?”

아침밥상에 앉은 지나가 얼이 빠진 듯, 밥그릇을 보며 물었다. 그건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밥그릇의 두 배 정도로 높이 올라온 밥을 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정도 먹어야 힘이 나지.”

천연덕스러운 어머니의 말에 지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이런 거 예전에 교과서에서 본 거 같은데……. 그 옛날에 농부들이 먹는 고봉밥 사진.”

“얘는 강원도 밥은 소화 금방 돼.”

민망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주걱을 흔들었다.


“진우가 힘을 쓸 데가 어딨다고.”

태연스레 말하던 지나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얘는 힘 쓸데가 왜 없어. 우리 서 서방 얼마나 힘 쓸데가 많니. 회사에서도 큰일 하는데 이 정도는 부족하지.”

어쩐지 낯부끄러워진 탓에 지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크흠, 거 밥 먹읍시다.”

보다 못한 지나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 아버지 앞에 있는 유독 적어 보이는 밥 양을 보고 멈칫하자, 지나 어머니가 얼른 변명하듯 말했다.


“당신은 힘 쓸데도 없잖수.”

“어허. 참나.”

어딘지 민망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와중에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비장한 얼굴로 진우가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어머님.”

“어어어, 그거 다 먹지 마. 탈 나.”

지나가 깜짝 놀라며 진우를 저지하려 들었다.


“얘는 정말! 잘 먹는 사람 왜 못 먹게 해.”

지나 못지않게 지나 어머니가 눈을 부라리며 지나를 막았다.


“아우, 안 돼. 이거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야.”

지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잘 먹겠다잖아. 우리 사위가.”

“반만 먹어. 아냐, 반도 많다. 반의반만.”

두 모녀의 티격태격하는 작은 소란에 아침부터 집 안이 시끌벅적거렸다. 그 사이 양이 적다며 한탄한 지나 아버지가 진우의 밥을 덜어가자 뾰족한 화살 끝이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당신은 왜 남의 밥을 뺏어가욧! 안 그래도 우리 사위 말라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아니, 너무 많아서 남길까봐.”

“아빠, 잘했어. 아주 잘했어. 이거 사람이 못 먹어.”

세 가족의 모습에 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의 모습에 마음이 한없이 간질거렸다.


“어머님, 다음에 와서는 두 그릇 먹겠습니다.”

서울로 출발하러 대문 앞에 선 진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지나 어머니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진우를 바라봤다.


“그래. 다음에 또 놀러와요.”

어머니의 푸짐한 사랑을 보여주듯 차 트렁크에는 바리바리 싸준 반찬으로 가득 찼다.


“엄마, 이걸 언제 다 먹으라고.”

“어휴, 밖에서 사 먹지 말고 집에서 먹어. 집밥이 최고야.”

“알았어요. 서울 가서 연락할게.”

“그래.”

아쉬움을 안고 차에 올라탄 진우와 지나는 창을 내려 마지막까지 배웅하는 부모님께 인사했다. 이내 차가 출발하자 진우는 핸들을 잡지 않는 손으로 지나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좋은 분들이네요.”

“응. 그건 그렇고 선물 너무 과했어.”

“제 마음에 비하면 부족한데…….”

“고봉밥 먹을 만 하네.”

장난스레 입을 떡 벌리는 지나를 보며 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음 주말은 너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지나의 말에 진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음……. 네.”

어딘지 굳어진 표정에 지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곤란한 거야?”

“아뇨.”

지나의 물음에 진우는 얼른 미소를 지었다.


“그냥, 우리 집 분위기가 누나네와 조금 달라서요.”

“에이, 뭐. 집집마다 다르지.”

“누나가 놀라서 도망갈까봐, 그게 조금 걱정돼서.”

그저 장난이라기엔 살짝 어두워진 목소리에 지나가 억지로 웃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갈게.”

“고마워요.”

지나의 손을 그러쥔 진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그녀가 정말 도망가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지는지.


“잠깐 바다 보고 갈까요?”

일부러 오전 일찍 나온 길이었다. 진우의 제안에 지나가 밝게 대답했다.


“좋아.”

얼마 지나지 않아 굽이굽이 이어진 도로 저편으로 푸른 바다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바다는 물감을 푼 것처럼 파랬다. 수면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끊임없이 반짝거렸다.


“너무 예쁘다!”

탁 트인 바다를 보니 눈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이름 모를 해변에 차를 댄 진우와 지나는 손을 잡은 채, 뜨거운 백사장을 걸었다. 휴가철 막바지임에도 가족 단위의 피서객들이 많았다.

둘은 인파가 몰린 곳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걸었다. 햇볕에 달궈진 모래를 밟을 때마다 발바닥이 따끔거렸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이내 발치를 시원하게 적셨다.


“좋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끝을 헤아리며 지나가 웃었다. 그녀 곁에 선 진우도 그녀를 따라 웃었다.


“우리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웃음 끝에 지나가 묻자, 진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네.”

“우리가 잠시 떨어지는 것도……?”

지나가 한 번 더 물었다. 불안한 그녀의 음성에 진우는 대답 대신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같이 미국 갈래요?”

“…….”

엄마의 말 때문일까. 지나는 쉽사리 거절도, 수락도 하지 못했다.


“누나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진우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닷가 특유의 냄새를 담은 바람이 은은하게 불었다. 그 사이에서도 진우의 달콤한 체취가 풍겼다.

그래서였을까. 어쩐지 용기가 솟았다.


“나……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나도 너만큼 성장하고 싶어.”

여태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왔다.

김도진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그를 대신해 수 없는 날들을 야근과 회사 일을 하며 살았다. 정작 지나가 하고 싶던 것들이 뭔지 찾아볼 겨를이 없었다.


“네게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돼서 네 옆에 설 거야.”

지나가 다부진 눈빛으로 말하자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보던 진우가 입을 열었다.


“내가 몇 번을 말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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