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오해할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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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오해할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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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오해할 상황
2023.03.03.
경찰서 앞에 차를 세운 진우는 박 변호사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원으로 향하는 허윤주와 형사의 모습이 보였다. 이틀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어서인지 회사에서 봤을 때보다 한결 초라해 보였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 또한 이질적이었다.
영장실질심사에서 그녀의 구속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허윤주 혼자 서거나, 국선 변호사였다면 빼도 박도 못 하고 구속될 터였다.
하지만 진우가 부른 박 변호사는 K그룹의 유능한 수석 변호사였다. 한 시간 남짓 기다리는 동안 진우는 고요했다. 미국 쪽 회사에는 이미 연락을 마친 뒤였다. 진우가 만날 바이어들과의 미팅은 미뤄졌다.
우우웅-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예상한 얼굴로 진우가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전화기를 받자마자 고함이 터져 나왔다.
- 너 이 새끼, 제정신이야? 네가 아주 나를 엿먹이려고 작정했구나!
출장을 미뤘다는 소식에 화가 난 서 회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 사정? 지금 회사보다 더 중요한 사정이 있어?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국에!
화를 내던 서 회장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 당장 집으로 와.
전화가 끊겼다. 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렸다.
차창 너머 재판을 마치고 돌아오는 윤주의 얼굴은 한결 밝아 보였다. 따로 차를 타고 돌아온 박 변호사가 진우의 차로 다가오자 진우가 차에서 내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기대하시는 대로 나올 것 같습니다.”
“허윤주 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저희의 조건을 수락하셨습니다. 김도진 씨에 대한 원한이 굉장히 깊어 보였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경찰서에 들어온 진우는 형사들에게 누군가를 고소했다. 옆에 있는 박 변호사가 덧붙여 설명하며 고소장을 작성했다.
잠시 후, 일을 마친 진우는 허윤주 앞에 섰다. 진우가 직접 올 줄은 몰랐던 윤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서, 서 전무님?”
마지막 동아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동아줄이 황금줄이었다. 다행이었다.
윤주는 진우를 발견하고 창살을 부여잡았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거듭 인사했지만 진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저희 조건 들으셨죠.”
나지막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굳힌 윤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들었습니다.”
“윤주 씨의 정식재판까지 저희 법무팀이 지원해드릴 겁니다.”
“굳이 조건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라도 김도진에게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었어요.”
겁을 먹었던 윤주의 눈빛이 분노로 매서워졌다.
“네.”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몸을 돌린 진우의 등 뒤로 윤주의 감사하다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인간적인 동정심이나 측은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녀 역시 지나와 상관없다면 진우가 구해줄 이유는 없었으니까.
“한남동으로 갑니다.”
진우의 지시에 차가 움직였다.
[오늘 지나가 회사에 오지 않았어요.]
지혜에게 온 문자였다. 진우의 마음이 조금 더 급해졌다.
“동선 확인 부탁드립니다.”
혹시나 싶어 지나에게 붙여놓은 사람이 있었다.
- 아직 댁에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지나에게 돌아갈 생각에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남동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진우의 뺨에 불이 일었다.
서 회장이 진우의 따귀를 때린 것이었다.
“못난 놈.”
붉어진 얼굴로 진우가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넌 지금 5조짜리 사업을 날려 먹었어.”
부들부들 떠는 서 회장의 분노가 이해됐다.
미국 진출에 거는 기대가 컸다.
“나한테 복수하려고 순순히 들어온 것이냐.”
복수.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 밑으로 진우가 들어온 이유.
“넌 어릴 때부터 회사에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는 걸 내가 안다. 내가 한평생 일군 걸 네가 망치려고 내 밑으로 들어왔구나.”
서 회장이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무리한 나머지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옆에 조마조마한 얼굴로 서 있던 서 회장의 부인이 얼른 회장을 부축했다.
“회장님, 고정하세요.”
회장의 비서였던 여자. 자신의 어머니를 버리게 한 여자.
진우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회사에는 조금도 손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비틀거리던 서 회장이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자식이 오로지 너 하나뿐이란 게 이다지도 분할 때가 있다니.”
비서와 바람난 아버지는 둘 사이에서 결국 자식을 보지 못했다.
진우를 여러 번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회사를 물려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어주십시오.”
서 회장이 끓어오르는 가래를 퉤 뱉었다.
“널 어떻게 믿고.”
회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진우와 맞닿았다. 눈을 부릅뜬 회장의 눈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
진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출장을 가지 않았다는 자체만으로 서 회장은 그에게 했던 기대를 접은 것처럼 보였다.
“이유를 말해보거라.”
마땅한 이유가 있다면 서 회장은 한 번 더 진우를 믿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나를 위해 출장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나까지 비난을 받을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너 이 새끼……. 끝까지…….”
서 회장의 으르는 목소리는 처음보다 기운이 없었다.
“회장님……. 물 좀 드세요.”
눈치껏 물잔을 타온 서 회장의 부인이 회장을 부축했다. 누렇게 들뜬 안색이 좋지 않았다.
“회장님 회사에 손해 가는 일 없을 겁니다.”
잘못했다고 빌거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쿨럭쿨럭.”
마른기침을 뱉은 서 회장은 그런 진우를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봤다.
회장님이라니. 아비에게 끝까지 선을 긋는 저 태도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부터 회사를 위해 불렀지만 진우는 회사를 욕심내고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어쩌면 더욱 조마조마한 마음이 서 회장에게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 이번 일로 인해 조금이라도 문제가 간다면 너에게 마땅히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한껏 갈라진 목소리 끝은 힘이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당연한 처분이라는 듯, 진우가 대답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건방진 놈.”
진우를 노려보던 서 회장이 한 번 더 밭은기침을 뱉었다.
“그만 가보거라.”
말과 동시에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차가운 표정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래서 더 섬뜩해 보였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온기가 서렸던 것은 오직 지나가 있을 때뿐이었다. 그녀가 없을 때, 진우는 차가웠다. 저택을 나온 진우가 차에 오르자 여러 개의 메시지들이 남겨진 채였다.
“서울호텔로 가죠.”
기사에게 지시한 진우의 표정은 어딘지 조급해 보였다.
***
“서진우……?”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지나가 헛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제 눈에 보이는 것이 환상처럼 보였다.
객실 안으로 성큼 들어온 진우는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서 전무님. 여긴 무슨 일이시죠?”
풀어헤친 셔츠 바람으로 도진이 사무적으로 물었다. 차갑게 굳은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나 따뜻한 온기만이 가득한 눈빛조차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진우의 시선이 객실 안으로 향했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지나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 오해하실 상황이긴 한데…….”
상황을 놓치지 않고 도진이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보시다시피 이게 진실입니다.”
그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그려졌다. 혼란에 빠진 지나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진우가 맞아……?
진짜 내가 아는 남자, 진우가 맞아?
눈을 깜빡이면 사라질까, 지나는 시린 눈을 깜빡이지조차 못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진우에게 가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오해할 상황이었다. 거의 벗다시피 한 도진의 상체와 잔뜩 흐트러진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지나의 모습까지. 전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이 호텔방에 있는 상황을 본다면 당연히 누구라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지나가 전무님과 헤어졌다고 저에게 왔어요.”
도진의 말에 진우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미동 없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지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이지나, 네 입으로 직접 말해.”
사실인지 물어보는 듯한 진우의 시선이 지나에게 곧게 향했다.
우습게도 맞닿은 시선마저 따뜻했다. 진우가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데도 그의 시선은 아릴 듯 따뜻했다.
지나의 눈에 넘칠 듯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대로 뺨을 타고 굴러떨어져 이불보를 적셨다. 그녀의 눈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면서 진우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진우를 막은 건 도진이었다.
“아무리 전무님이셔도 이러시면 안 되죠.”
가로막힌 진우의 눈빛이 다시금 사납게 흔들렸다.
“저희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이건 직원 프라이버시 방해 아닌가.”
지나는 도진의 비아냥거림이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우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말았으니.
진우는 자신에게 실망했을 터였다. 겁에 질린 지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술만 잘근잘근 물 뿐이었다.
“헤어진 마당에 구질구질하게 굴지 마시고 이만 나가주시죠.”
기세를 몰아 도진이 진우를 쫓을 듯 으르렁거렸다.
도진 너머에 있는 지나를 응시하던 진우가 도진을 내려다봤다.
“아, 김도진 과장,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내가 볼일이 있는 건 당신이라서.”
여유로웠던 도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중요한 출장까지 안 가시고 절 보러 오신 겁니까?”
진우가 냉랭한 표정으로 굳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뜻밖의 말에 도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우의 속내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도진이 대뜸 말했다.
“여기서 말씀하시죠.”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만하듯 말하는 도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우가 입매를 비틀었다.
“괜찮겠습니까?”
도진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뭐, 듣는 사람이 제 여자친구인데 문제없죠.”
명백한 도발이었다. 지나를 가리켜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말한 도진이 비죽 웃었다. 티는 안내도 진우의 속이 말이 아닐 테니까. 이보다 더 통쾌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김도진 과장, 당신을 회사 영업과 정보를 유출한 죄로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