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악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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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악의 끝
2023.03.07.
“뭐, 뭐요?”
당황한 도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딴 개소리나 하려고 좋은 시간을 방해한 겁니까?”
“개소린지 아닌지는 경찰서에 가서 확인합시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단숨에 흙빛으로 변한 도진이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경찰서까지 갑니까. 저는 결백합니다.”
순간 침대 끝에 벗어놓은 도진의 재킷이 지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직할 회사가 한서기술투자회사 맞습니까.”
“어떻게 아셨죠?”
“어떻게 알긴.”
큭, 가볍게 웃는 진우의 얼굴에 도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박 변호사님.”
진우의 부름과 함께 박 변호사가 등장했다. 도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다, 당신은?”
분명 헤드헌터라고 연락이 온 사람이었다. 박 변호사는 품에서 펜 모양의 녹음기를 틀었다.
‘그럼요. 제가 여기서만 7년을 일했는데요. K그룹에 관해서는 제가 꽉 잡고 있죠. 신제품 기획에 대한 부분이랑 K그룹이 독보적으로 나갈 수 있는 기업 운영에 대한 비밀까지도 다 제가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미 제가 빼돌린 게 좀 있어요.’
능숙한 도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점점 도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잠, 잠깐만. 증거 있어? 원래 말만 그렇게 하는 거야. 말만.”
당황한 도진이 그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경리부 이선영 씨한테 자료를 가져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선영? 걔가 왜?”
“글쎄요. 연인의 배신에 화가 난 모양이죠.”
진우가 비스듬히 미소를 그렸다. 입과 달리 눈은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지만.
선영과 따로 만난다는 정보를 준 건 허윤주였다.
결혼 전 비상계단에서 본의 아니게 삼자대면을 하게 된 윤주는 선영에 대해 진우에게 말했다. 경리부 선영은 전무와 회사 법률팀에서 나와 추궁하니 너무 쉽게 털어놓았다.
“회사 회계자료까지 바깥으로 유출시킨 죄까지 하면 어떻게 되나요. 변호사님.”
“회사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기술과 정보 등을 다른 기업에 유출 및 발설하게 되는 것은 민,형사상 처벌 대상이 됩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에 관한 법률 제 18조 2항에 따라 부정한 이익을 얻게 되거나 기업에 손해를 주기 위해 유용한 영업 비밀을 취득, 사용하였거나 제3자에게 유출을 한 사람은 10년 이하의 징역 혹은 3천만 원 벌금형이 내려집니다.”
“잠, 잠깐만. 이건 너무 억지 아닙니까. 이선영 걔가 모함하는 거예요. 지금.”
도진이 처절하게 외쳤다.
“이제 이선영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네.”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허윤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너. 네가 어떻게.”
깜짝 놀란 도진이 입을 벌렸다.
“지은 죄가 없으니까 풀려났지.”
윤주는 방금 영장실질심사에서 불구속처분을 받았다.
“억울해 죽을 뻔했네.”
독을 품은 윤주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박 변호사님과 함께 손해배상과 위자료 청구하고 오는 길이야. ”
“뭐? 이게 진짜!”
도진이 윤주에게 소리 질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희 몽땅 무고죄로 쳐넣을 거야.”
씩씩거리며 진우와 윤주를 차례대로 쳐다본 도진이 지나에게 말했다.
“이지나, 가자. 기분 잡쳐서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네.”
침대에 웅크리고 있는 지나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 중에 진우의 시선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야, 뭐 해. 가자니까.”
도진이 지나를 재촉했다.
“난…….”
지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안 가.”
“뭐?”
지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던 도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야, 이지나.”
“함부로 부르지 마.”
지나가 힘을 다해 쏘아붙였다. 당황한 도진은 한숨을 푹 내쉬고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재킷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당신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되레 큰소리를 친 도진이 객실을 나갔다.
한편 숨을 헐떡이던 지나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 진우가 재빨리 지나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나의 온몸은 열이 펄펄 끓었다. 그녀를 품에 안자 지나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진짜 진우 맞네.”
흐릿한 시선에 진우의 얼굴이 자꾸만 뿌옇게 번졌다.
“지나 누나.”
걱정스러운 진우의 눈길에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여태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점차 박자를 되찾았다.
“이거…….”
지나가 꼭 주먹을 펼치자 까만 USB가 나타났다.
“증거야.”
침대 위에 올렸던 도진의 재킷을 유심히 지켜보던 지나가 몰래 빼낸 것이었다.
“보고 싶었어.”
지나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진우는 다급하게 정신을 잃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가 호텔로 향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온몸의 피가 굳는 기분이었다. 설마, 설마. 자신이 여태 가졌던 불안함의 실체를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버리고 김도진을 만날 리 없었다. 진우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지나를 믿었다.
단순하게 식당에서 만났으리라 생각한 예상을 뒤엎고 호텔 객실로 올라갔다는 보고를 들었을 때에는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부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해서부터 로비를 달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분명 지나의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호흡을 고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객실문을 열고 들어간 현실은 그야말로 날 것 그대로의 장면이었다. 도진의 거들먹거림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침대 위에 있던 지나는 자신을 보고 굳어버린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찰나에 진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나의 빈 손가락이었다. 청혼할 때 그녀에게 끼워준 반지가, 없었다.
심장이 쿵 발치까지 굴러떨어진 것으로 모자라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정말 나를 버린 걸까.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뜨거움 감정이 목구멍으로 솟구쳤지만 간신히 삼켰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로지 이 일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니까.
지나 너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이 일이 끝나면 나도 너를 냉정하게 바라보리라.
말하는 내내 다짐했다.
그럼에도 지나가 쓰러지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아, 나는 널 버릴 수 없구나.
네가 날 버려도 나는 널 버릴 수 없구나.
처절한 깨달음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지나가 내민 까만 USB를 보자 그녀가 왜 도진을 만나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차가운 물이 쏟아진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째서 그녀를 믿지 못했을까.
한순간이었지만 그녀를 의심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제발, 정신을 차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진우는 지나의 몸을 끌어안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만약 지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 또한 살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전부였으니까.
“심한 충격을 받아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VIP병동 주치의의 진단에 진우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네. 그리고 피 검사 결과를 보니 다른 이상은 딱히 없는데.”
긴장한 진우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임신 중이시네요.”
“네?”
충격적인 소식에 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산모분께 영양제도 함께 투여하겠습니다.”
주치의가 나간 뒤, 진우는 멍한 얼굴로 지나를 내려다봤다.
해쓱해진 얼굴로 잠이 든 듯,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지나의 모습에 눈물이 날 만큼 가슴이 먹먹했다.
해열제 영향으로 열이 식은 지나의 손은 차가웠다. 진우가 떨리는 손끝을 들어 지나의 손을 잡았다.
“지나야.”
나직하게 불러보는 지나의 이름이 달았다.
“이지나.”
한 번 더.
입 안에서 가만히 굴려지는 그녀의 이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가 설사, 자신을 버렸다 할지라도 감당할 생각이었다.
어떤 이유였든 진우는 지나를 놓을 생각이 없었다.
“난 널 놓지 못해.”
그녀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기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사랑이 겨우 이 정도라…….
“미안해…….”
널 의심한 날, 용서하지 마.
***
지나가 눈을 뜬 건 하루가 꼬박 지난 뒤였다.
“아이고, 지나야! 정신이 좀 들어?”
지나의 눈앞에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엄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잘 먹고 다니랬지. 영양실조가 다 무어야.”
엄마는 지나의 야윈 얼굴을 쓰다듬었다.
“다이어트를 좀 무리해서 했나봐.”
지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말라서 무슨 다이어트야!”
“여긴 어떻게 왔어?”
“병원에서 연락 와서 달려왔지.”
“아…….”
혹시라도 진우가 연락했나 싶어 물었던 지나가 실망스러운 소리를 냈다.
“서 서방은 출장 잘 갔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어, 어어.”
“서 서방 가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래.”
“별일 아닌데 뭐.”
기억이 희미했다. 호텔 객실에 들어온 사람이 진우였을까.
심장을 조여들게 하는 그리운 체향은 분명 진우의 것이었다.
그리고 목소리.
한없이 낮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던 것 같다.
분명 그랬는데.
왜 지금 내 곁에 없을까. 넌.
어디에 있는 거야. 서진우.
지나는 그리운 눈길을 창밖으로 돌렸다.
“좀 더 쉬어. 엄마, 아빠 여기 있으니까.”
부모님의 따뜻한 목소리에 지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다시 눈을 뜬 지나의 눈에 어둠에 잠긴 병실이 보였다. 잠에서 깬 지나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부모님이 없는 걸 보니 보호자 방에서 주무시는 모양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지나는 몸이 한결 가뿐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선 지나는 순간 비틀거렸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붙잡았다. 코끝에 훅 끼치는 익숙한 냄새에 지나의 눈이 커졌다.
“서진우?”
낮은 숨소리조차 익숙했다. 그의 단단한 품도.
어두운 그림자에 달빛이 비치자 그리운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몸 괜찮아요?”
진우의 목소리에 지나는 반가움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언제 왔어? 미국에 안 갔어? 호텔에 온 거 정말 너야?”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한데 뒤섞여 쏟아졌다.
“네.”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지나를 바라봤다.
“저예요.”
이틀 만에 마주한 진우의 분위기는 어딘지 어두워 보였다. 지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