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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외전1) 어느새 봄 (71/80)


71(외전1) 어느새 봄
2023.04.04.



 
벚꽃이 만발했다. 추위에 꽁꽁 몸을 움츠렸던 나뭇가지들은 어느 새 화사한 꽃잎을 벙실벙실 터뜨렸다.


“벌써 봄이네.”

꽃샘추위가 물러간 지 엊그제 같았는데 순식간에 꽃들이 만개했다. 지나가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흐뭇하게 풍경을 감상했다.

마른 몸에 터질 듯 잔뜩 부푼 배는 해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누나, 감기 걸려요.”

로비에 서 있던 지나를 향해 진우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진우의 뒤로 비서들이 서 있었다.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날씨가 좋아서.”

“정말 같이 가도 되겠어요?”

“응. 나 중요한 일은 거의 다 끝냈어요. 부회장님. 농땡이 치는 거 아니에요.”

지나의 말에 진우가 못 말린다는 듯이 미소를 그렸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럼, 가죠.”

다정하게 지나의 손을 감싼 진우는 보다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누가 봐도 지나를 배려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나와 진우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서 회장은 결국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하게 된 서 회장의 자리를 대신해 진우는 부회장이 되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진우를 부른 건 서 회장이었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지나는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선 것이었다.

차에 올라탄 진우와 지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부푼 배로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지나의 모습만 봐도 미안하고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병원까지 빠짐없이 진우와 동행하려 하는 모습에 진우는 그녀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아버님께서 우리 지우 보실 수는 있을까.”

지나의 질문에 진우가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줬다.


“그럼요.”

누구를 위로하는지 알 수 없는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를 바라보던 지나가 반대편 손으로 진우의 손을 덮었다. 한마디 말보다 따뜻한 지나의 행동에 진우가 지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최대한 티 내지 않았지만 진우는 서 회장을 보러 갈 때마다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진우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지나라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진작 연을 끊었던 서 회장의 부탁을 들어준 걸 알았다.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의 회사를 맡아 운영하고 있으니까. 오로지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온 진우를 위해 지나는 서 회장을 만나러 갈 때는 꼭 그의 곁에 함께했다.


“도착했습니다.”

K그룹 산하 K 병원은 한강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병원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한강뷰 맛집으로도 인기가 좋았다.

VIP 병동은 일반 병동과 달리 차분하고 고요했다. 짙은 고동색 원목 인테리어는 여느 호텔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서 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었다. 생명을 연장시키려 주렁주렁 매단 알 수 없는 링거줄이 되레 그를 속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장님. 저희 왔습니다.”

진우가 한결 굳은 얼굴로 서일준에게 다가갔다. 일준의 곁에서 간호하던 아내가 벌떡 일어나 진우와 지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병원에 입원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집에서 봤을 때보다 한결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일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왔느냐.”

숨조차 쉬기 힘들어 보이는 일준은 저번 주보다 훨씬 더 지쳐 보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우는 언제나처럼 일준의 앞에서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부자간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유추조차 할 수 없는 건조한 분위기였다.


“새아가도 왔느냐.”

일준이 힘겹게 고개를 돌려 지나를 바라봤다.


“네. 아버님. 몸은 좀 어떠세요.”

지나의 밝은 인사에 일준의 빛바랜 눈동자에 일순 생기가 돌았다.


“새아가가 오니 좀 낫구나.”

“일하던 중에 들렀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말씀하시지요.”

일준의 말을 자르듯, 진우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제 아비 앞에 서면 진우는 늘 그랬다. 매사에 다정다감하고 온화하던 그의 태도는 어딘가 경직되고 불안정하게 변했다.


“야멸찬 놈. 며늘아기와 시아비 사이를 가로막는 아주 못돼먹은 놈.”

일준이 표정을 구기며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회장 승계를 서두르려 한다.”

예상했던 일인 건지 진우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일준의 말을 듣던 진우는 어떤 감정도 없는 얼굴로 물었다.


“정확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박 변호사한테 말해놨으니 둘이 알아서 해결해라.”

말을 마친 일준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더는 진우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우가 절도 있게 인사하고 지나의 손을 잡고 돌아서려는 순간, 일준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새아가 출산일이 언제라고……?”

“4월 중순이에요. 아버님.”

지나의 대답에 일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짧은 대화만으로 지친 일준이 눈을 감았다. 진우와 지나는 곁에 서 있던 서 회장의 부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회장님, 진우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세요.”

일준의 진심을 아는 서 회장 부인이 넌지시 말했다.


“…….”

일준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회장님의 유일한 아들이잖아요. 그렇게 대하셔도 돼요.”

서 회장 부인은 어딘지 미안한 마음이었다. 20년 전, 그의 사랑 하나면 세상 전부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서 회장은 아내와 자식을 잃었다. 자신 역시 그랬다.

세상의 많은 지탄과 손가락질을 감수하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꾸미려 했지만 끝내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업보라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 편한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푹 쉬세요.”

끝까지 대답 없는 회장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부인이 담요를 잘 덮어줬다.

***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병원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진우가 물었다.


“회사 바로 안 들어가?”

“이왕 시간 내서 나왔으니까…….”

지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최근이었다. 지나가 눈을 굴리더니 혀를 살짝 내밀었다.


“딸기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긴 해.”

“이태원으로 가죠.”

진우가 거침없이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봄의 햇살이 진우에게 내리쬐었다. 조각 같은 얼굴의 옆모습은 언제 봐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 회장 승계 말이야…….”

진우가 정말 회장님이 되는 걸까.

지나가 조심스레 진우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우가 지나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누나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진우의 따뜻한 밤갈색 눈동자가 지나를 곧게 향했다.


“응? 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내 의견이 중요한 거야?”

“언제나 그랬죠. 나에게.”

진우가 피식 웃으며 지나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누나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작은 행동에도 지나의 심장이 방금 잡은 활어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누나,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열나요?”

지나가 임신을 한 뒤로, 진우는 더욱 지나의 몸 상태에 예민하게 굴었다. 그가 손을 뻗어 지나의 이마를 매만졌다.


“아니, 나 괜찮아.”

“누나 얼굴이 딸기처럼 발개졌어요.”

너 때문이야. 서진우.

지나가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반대편 차창 쪽으로 돌렸다. 차창 너머 도롯가에 핀 하얀 벚꽃들이 눈꽃처럼 예뻤다.

이태원에 위치한 빵집은 딸기생크림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3개 층 전부 빵집으로 되어있는 커다란 건물 안은 1층은 카운터와 여러 종류의 빵과 케이크가 진열되어 있었고 2, 3층은 카페처럼 되어 있었다.


“골라봐요.”

진우는 트레이와 들고 뭐든 말만 하라는 듯이 집게를 딱딱 부딪혀 보였다.


“좋아.”

평소 먹고 싶었던 케이크들을 가리키면 진우는 능숙하게 트레이에 올렸다. 그러기를 조금 뒤, 정작 결제하고 나자 지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이거 다 먹어도 되겠지?”

“우리 지우 오늘 포식하겠네요.”

마지막 검사에 임신성 당뇨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래. 그럼, 맛있게 먹어야겠다.”

얼른 죄책감을 집어넣은 지나가 포크를 들고 방긋 웃었다. 그런 지나의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는 진우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날들이 하루하루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아침에 눈을 뜨면 제 곁에 잠들어 있는 지나를 보며 아직 꿈에서 깨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넌 안 먹어?”

볼 한가득 케이크를 물어 다람쥐처럼 볼이 튀어나온 지나가 물었다.


“난,”

“누나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요.”

진우의 대답을 지나가 가로챘다.

동시에 지나의 눈썹이 장난스레 올라갔다.


“그런 것치고는 나만 살쪄서 못 믿겠어.”

지나가 장난스레 눈을 흘기며 딸기가 올려진 케이크 한 조각을 크게 펐다.


“아.”

진우의 입으로 케이크를 들이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진우가 입을 벌렸다.


“맛있지?”

“네.”

진우가 미소지었다.


“앞으로는 눈으로만 먹지 말고 같이 먹자.”

“알겠어요.”

지나와 진우가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더없이 행복했다. 가슴이 터질 만큼.


“혹시 바로 회사로 들어갈 거야?”

“네.”

“케이크 더 사도 돼?”

“그럼요.”

진우가 흔쾌히 대답했다. 먹은 것만큼 산 지나는 포장된 케이크상자를 들었다.


“진우야, 우리 병원에 다시 들르자.”

“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진우가 되물었다.


“아까 빈손으로 가서 조금 그랬는데……. 그리고 그 회장님 사모님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아버님께서는 못 드셔도.”

지나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지나가 진우를 곧게 바라봤다.


“우리 결혼식 때 참석하지 않으신 것도 마음에 걸렸어.”

“그건 회장님께서 아프셔서.”

“아마 아프지 않으셨어도 참석하지 않으셨을 거야. 너와 어머님께 미안한 마음이시니까.”

“그 정도로 좋은 분이 아니에요.”

어딘지 진우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들렸다.


“그래도 그분의 부탁을 네가 무시하지 않았잖아.”

“그건.”

조금 다급하게 말하려던 진우의 목소리가 멈췄다. 지나를 바라보던 진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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