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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외전2)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존재 (72/80)


72(외전2)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존재
2023.04.07.



 


“왜 그런지 알고 있어.”

지나가 진우를 향해 말했다.


“나 만나려 보기 싫은 아버지의 부탁을 들었던 거, 다 알아.”

진우는 입술을 다문 채, 지나를 바라봤다.


“누나가 책임감을 가질 필요 없어요. 자식으로서 감당해야 한다면 제가 해요.”

“난 널 책임지는 거야. 바보야.”

뜻밖의 말에 진우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널 책임진다고. 그러니까 네 몫도 너 혼자만의 몫이 아니야.”

지나가 케이크 상자를 살짝 들어 보였다.


“케이크 하나도 나눠 먹어야 하는 사이라고.”

그녀의 미소에 진우는 더 이상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그럼, 제가 전달하고 올게요.”

차에 탄 진우가 어딘지 비장하게 말했다.


“네 굳은 얼굴로 딸기케이크를 드리면 안에 독이 들었을지 모른다고 안 드실 거 같아.”

지나의 말에 진우는 딱히 할 말을 잃은 듯,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천천히 넘겼다.


“알겠어요. 그럼, 같이 가요.”

지나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영원히.

***



“어머, 뭐 두고 간 거 있어요?”

회장님 사모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나가 포장된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케이크가 너무 맛있더라고요. 사모님, 병간호하시느라 지치신 것 같아서.”

지나의 말에 사모님이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한결 수척해진 얼굴에 물이 번지듯 퍼지는 미소에 지나가 함께 웃어 보였다.


“봄에는 딸기 케이크죠.”

“고마워요.”

사모님이 촉촉해진 눈으로 케이크상자를 받았다.


“누가 챙겨주는 거 오랜만이네요. 특히…….”

끝까지 말하지 않았지만 자식을 지칭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지나가 밝게 인사했다. 지나의 옆에 서 있던 진우는 그저 인사하고 돌아나온 게 전부였다.


“엄청 좋아하시네. 다행이다.”

지나가 뿌듯한 얼굴로 말하자 진우가 못 말린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래도 다음에는.”

“맞다. 다음에는 뭐 갖다 드릴까?”

벌써 다음을 계획하는 지나가 야무지게 손가락을 접어가며 맛있는 디저트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지나를 보며 진우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요. 누나.”

자신은 지나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메뉴 정해지면 저한테 말해요. 제가 사 올게요.”

진우가 지나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말릴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그녀를 돕는 게 최선이었다.


“누나는 이대로 퇴근할래요?”

“아니, 마무리할 거 있어서 회사로 갈래.”

“기사님. 회사로 돌아가죠.”

진우와 지나를 태운 차는 강변을 따라 도로 위를 달렸다.

***



“세희야.”

케이크 상자에 동봉되었던 흰 일회용 포크를 막 쥔 일준의 부인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회장님, 깼어요?”

세희는 급히 일어나 일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애들이 다시 왔다 갔어?”

잠든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네. 지나가 딸기 케이크 갖고 왔어요.”

“거 맛있겠구먼.”

생전 딸기 케이크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남자였다. 세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마? 당신 딸기 케이크 좋아하는 줄 몰랐네요.”

“흠, 흠.”

일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괜히 헛기침 소리를 냈다.


“한 입 드셔보실래요?”

“됐다.”

일준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거 물이나 좀 다오.”

“네.”

세희는 옆에 있는 물병을 땄다.


“흡…….”

물을 마시려던 일준은 통증이 느껴지는지 잠시 숨을 들이쉰 채 멈췄다. 그런 일준을 바라보는 세희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괜찮아요? 선생님 좀 부를까요.”

일준은 말할 기운조차 없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느리게 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병마는 어느새 일준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시시각각 눈앞에서 사그러지는 생명력을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후…….”

물결처럼 통증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자 일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거 지독하군.”

“진통제를 더 넣어달라고 할까요?”

“애들 오기 전에 많이 넣어달라고 해서 이제 안 줄 거야.”

“…….”

진우에게 냉담하긴 마찬가지였던 일준이었지만 아들이 온다고 아픈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며 진통제를 한계치까지 더 넣어달라고 했던 그였다.


“새아가한테까지 추한 꼴을 보이긴 싫어서 그래.”

새아가. 존재만으로 기분이 좋은지 일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사랑이라더니 딱 맞는 말이네요.”

세희가 일준을 보며 말했다.


“못난 시아버지 사랑받아서 뭐하나.”

그러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지나는 좋겠어요. 못난 시아버지 사랑에 잘난 남편 사랑에.”

세희의 말장난에 일준이 못마땅한 얼굴로 세희를 흘깃 바라봤다.


“못난 시아버지라면서요.”

“어허, 이 사람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의 반응에 세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잘난 아들이 누구 닮아서 잘났겠어요. 다 아버지 닮아서지.”

세희의 말에 일준은 조금 풀린 얼굴로 미소를 그렸다.


“그래. 아들은 아비 닮는 거지.”

그러면서도 어딘지 씁쓸한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진우를 생각하면 입안이 씁쓸했다. 아비로서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다.

이혼 전에는 매번 싸웠다. 정략결혼은 조건에 맞춘 거지 사람을 맞춘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지 않는 아내로 인해 결국 바람을 피웠고 상처받은 아내는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곱게 이혼 도장까지 찍어준 건 고마웠지만 아들을 데리고 간 것은 괘씸했다. 서씨 집안의 장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들이야 또 낳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세희는 임신을 하지 못했다. 옛날이라 인공수정이라던가 시험관아기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여보, 입양이라도 할까요.’

결국 세희의 말에 일준은 아기 가지기를 포기했다. 더는 신경 쓰지 말자고 선을 그었지만 아무래도 일준과 세희는 자신들의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감내할게.’

언제고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일준은 생각보다 빨리 병마가 깃들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회사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조금의 틈만 생기면 물어뜯는 재벌의 세계에서 가루처럼 탈탈 부스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준은 어쩔 수 없이 진우에게 연락했다. 믿을 만한 사람은 장성한 자신의 아들 뿐이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아들은 자신의 부탁을 수락했다. 일준은 그런 진우를 보며 역시 회사에 욕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만난 진우는 일준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회사에 조금도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진우가 갖고 있는 욕심은 회사 안의 누군가였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집착에 일준은 무척 당황했지만 욕심과 별개로 경영에 두각을 보였다.

아비로서 해준 건 없었다.

그래서 경영권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아비로서 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우우웅.

휴대폰 소리가 일준의 상념을 깼다.


“네.”

- 회장님, 박 변호사입니다.

“그래.”

진우가 회사로 돌아가 박 변호사와 미팅을 한 모양이었다. 승계를 차근차근 시작하면 빠르면 한 달 이내에 정리가 될 터였다.


“한 달 이내면 충분하겠지?”

- 부회장님께서 승계 거절을 표하셨습니다.

“뭐?”

- 회장직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일준은 그 어느 때보다 놀랐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곁에 있던 세희까지 그의 표정을 보고 문제가 생긴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거칠어진 숨 사이로 가래가 끓었다.


- 부회장님께서 전문경영인을 모시자고 말씀하셔서…….

일준을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여보. 괜찮아요?”

“모자란 녀석.”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준이 욕을 내뱉었다.


“나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였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서진우 불러와. 당장.”

목에 핏대를 세운 일준의 소리를 질렀다.


“당신 이러다 큰일 나겠어요. 흥분 좀 가라앉혀봐요.”

“서진우 불러! 이 새끼를 당장에.”

윽. 극심한 통증을 앓는 듯 신음소리를 내지른 일준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어머, 여보. 여보! 여기요! 선생님!”

놀란 세희가 다급하게 벨을 눌렀다. 복도에서 달려오는 의료진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

퇴근 시간이었다. 지나는 만들던 인수인계 자료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컴퓨터를 껐다.


“지나 씨, 퇴근?”

“응.”

최근 들어 연애를 시작한 지혜가 팩트를 들어 얼굴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안 봐도 예뻐.”

지나의 말에 지혜가 수줍은 듯 미소지었다.


“우리 자기도 그렇게 말하긴 해.”

못 살겠다는 듯이 지나가 가볍게 웃었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을까.”

“요즘 거의 매일 만나네?”

지나의 말대로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이 없는 날은 남자친구를 만나는 지혜였다.


“내가 언제 바빠질 줄 알고. 좋을 때 자주 만나야 해.”

“음. 일리 있네. 인수인계 자료 열심히 만들고 있거든.”

“으아. 안 돼. 안 돼.”

지혜가 귀를 막으면서 도망가듯 앞장서 걸었다.


“자기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해.”

지나가 환하게 웃으며 지혜를 뒤쫓았다. 아무래도 배가 나와 걸음걸이가 둔해져 빨리 걷기 힘들었다.


“윤주 씨 있잖아. 윤주 씨.”

“저요?”

가방을 멘 윤주가 상큼한 옷차림으로 다가왔다.


“이 대리님 부탁이면 해야죠.”

어딘지 모르게 비장한 눈을 반짝이는 윤주였다.


“하하, 윤주 씨, 아직 결정된 건 없어요. 너무 힘주지 말아요. 눈 아파.”

회사 일을 부쩍 열심히 하는 윤주는 처음보다 많이 늘었다. 보는 이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는 윤주의 모습에 사무실 사람들은 그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저도 열심히 해서 승진해야죠. 대리님들처럼.”

윤주의 꿈에 지나와 지혜가 미소지었다.


“우리도 입사 초기에 저랬었나.”

지나가 넌지시 묻자 지혜가 몇 년 전을 떠올렸다.


“회사에 이 몸 바쳐 일하다 승진만 하면 인생 성공한 것 같았던 그 시절……?”

눈을 마주친 둘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일반 노예에서 승진한 노예로.”

“어우, 자기는 이제 노예 아니지. 마님이지. 마님.”

지혜가 장난스레 말했다. 지나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윤주가 얼른 받았다.


“지나 대리님을 저희가 극진히 모시면 되는 겁니까.”

“어우, 장난들 그만해.”

“지나 대리님 아니고 마님.”

까르르, 웃는 소리가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 퍼졌다. 슬슬 퇴근하러 하나둘 나오는 직원들의 등장에 세 사람은 얼른 웃음소리를 줄였지만 흥겨운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회사에도 봄이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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