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외전3)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한 너
(73/80)
73(외전3)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한 너
(73/80)
73(외전3)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한 너
2023.04.11.
옆 CS 부서의 김 대리였다. 세 사람은 웃음기 남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김 대리는 워낙 쾌활하고 명랑하기로 유명했다. 예전 신사업 준비로 TF팀이 꾸려졌을 때 몇 개월간 같이 일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여자분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진짜 봄이구나 싶어서요.”
김 대리가 옆에 서 있는 유 대리를 팔꿈치로 가볍게 건들며 호응을 유도했다.
“음. 그렇네.”
워낙 말수가 없는 유 대리는 김 대리와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그는 늘 조용하고 웃음이 없었다.
“우리가 부서를 잘못 선택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고객 만족을 하기 전에 업무 만족부터 해야 하는 데를 시작으로 김 대리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서로 눈을 마주친 세 사람이 조용히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최대한 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탈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다들 어디 가십니까. 시간들 괜찮으면 오랜만에 한 잔 어때요?”
말만 많은 줄 알았더니 눈치까지 없는 김 대리가 대뜸 물었다.
“저는 남자친구와 선약이 있어서요.”
기다렸다는 듯이 지혜가 얼른 대답했다.
“저는 보시다시피…….”
지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면 윤주 씨는 어때요?”
“아…….”
갑자기 쏟아진 시선과 질문에 윤주가 순간 당황했다.
“윤주 씨는, 아.”
지나가 얼른 윤주를 막아주기 위해 대신 말하려다 신음 소리를 냈다.
“자기, 왜 그래?”
지혜가 놀라 물었다.
“괜찮아. 태동이었나봐.”
한숨을 작게 내쉬던 지나가 순간 다시 신음소리를 내며 배를 짚었다.
“아.”
“혹시 진통 온 거야?”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지혜가 발을 동동 굴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나가 숨을 몰아쉬자 사태의 심각성을 안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병원, 병원에 전화해야 하나.”
“119 부,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무질서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에서 유 대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지나에게 다가갔다.
“대리님.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라마즈 호흡 배우셨죠? 엄마가 놀라면 배 속 아기도 놀라요.”
식은땀을 흘리던 지나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 대리를 따라 호흡했다. 갑자기 닥친 통증이 한결 가라앉는 것 같았다.
“119를 부르는 것보다 택시를 불러서 다니는 산부인과 응급실을 가는 게 훨씬 좋습니다.”
침착한 유 대리의 말에 윤주가 얼른 택시를 호출했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전화를 하셔서 상황을 알리세요.”
입술을 잘근잘근 물던 지혜가 얼른 휴대폰을 들어 부회장실에 전화했다.
“네. 부회장님께 지금 진통이 온 것 같다고 알리려고요.”
조금 뒤, 비상계단이 열리고 진우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급한 나머지 계단으로 내려온 진우는 평소보다 살짝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배가 아파서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아.”
유 대리를 따라 호흡을 안정적으로 내뱉던 지나가 진우에게 설명했다. 함께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한 진우가 지나를 부축했다.
“제 와이프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때맞춰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른 진우와 지나의 모습이 닫히는 엘리베이터 너머로 사라졌다.
“아, 이게 무슨 난리래.”
긴장이 풀린 지혜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 대리님, 아기 아빠였어요? 엄청 침착하게 잘 안내해주시던데요.”
“그래. 유 대리. 애 있는 줄 몰랐는데?”
친해 보이던 김 대리마저 몰랐던 사실이었는지 유 대리를 향해 물었다.
마치 파도가 휩쓸고 간 듯, 복도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살짝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한 유 대리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버튼만 꾹 누를 뿐이었다.
“그렇게 점잔 안 빼도 돼. 유 대리. 신비주의 전략이야?”
민망한 김 대리가 대신 허허, 웃으며 어색함을 덜어내려 노력했다.
“뭐, 어쩌다 조금 배우게 되었습니다.”
유 대리가 다소 불친절하게 대답했다.
“결혼 안 한 나도 좀 배워야 하나.”
김 대리가 유 대리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유 대리가 문이 안 닫히도록 팔로 잡고는 지혜와 윤주가 먼저 타도록 배려했다.
“그럼 오늘 우리끼리 한잔할까?”
“일찍 들어가 봐야 합니다.”
김 대리의 유혹을 유 대리가 깔끔하게 잘랐다.
“유 대리가 쌀쌀맞으니 더 기운이 빠지네.”
그러면서도 김 대리는 포기하지 않는 얼굴로 휴대폰을 꺼냈다.
“누군가 한 명은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사람이 있겠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누군가의 휴대폰이 울렸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서로를 살폈다. 결국 유 대리가 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표정 하나 안 바뀐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집에 바로 갑니다.”
통화가 바로 끊겼다.
“그래. 오늘은 날이 아니다.”
어딘지 기죽은 김 대리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로비에 쏟아졌다. 하루종일 일터에서 고생한 사람들은 빠르게 회사를 나갔다.
“어, 윤주 씨, 조심히 가.”
지혜 역시 윤주에게 급하게 인사하고 빠르게 걸어갔다. 아마 회사 근처에서 남자친구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윤주는 가방끈을 조금 더 세게 쥐고는 지혜가 사라진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
윤주보다 몇 걸음 앞에 선 남자는 유 대리였다. 집이 같은 방향인지 같은 버스 정류장에 우뚝 선 유 대리를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윤주는 정류장 끝쪽에 섰다.
말수 하나 없는 그에게서 인간적인 부분은 느끼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갔다. 윤주는 그저 아까 지나를 도운 그의 행동이 인상적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다.
***
“다행히 진통은 아니에요. 오늘 조금 무리하셨나봐요. 산모님.”
주치의의 소견에 잔뜩 얼어붙은 진우의 표정이 천천히 풀렸다.
“아, 딱히 무리 안 했는데…….”
“예정일이 4주 남았죠. 자연분만이라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아요. 마음의 준비 하셔야 해요.”
“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제 곧 지우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렘이 솟았다.
“앞으로도 자궁이 조금씩 수축할 수 있어요. 출산 연습을 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하면 됩니다. 양수가 터지거나 진통이 시작되면 바로 오세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주치의가 사라지고 지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괜히 소란 일으켰네. 어쩜 좋아.”
“앞으로 병원은 나 혼자만 갈게요.
진우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나에게 말했다.
“병원?”
한 박자 느리게 이해한 지나가 입술을 뗐다.
“혹시 아버님 병원이라면 걱정 마. 나 하나도 무리 안 했어. 이제 출산이 가까워서 그런가봐.”
지나에게 통증이 왔다는 소리에 회의를 하다가 뛰쳐나온 진우였다. 아직도 심장이 둥둥 울렸다. 혹시라도 그녀를 고통 속에 혼자 둔 건 아닌지, 비상계단을 한 번에 여러 칸 뛰어내린 그였다.
“누나 몸에 더 신경 써야죠.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요.”
진우가 꽉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응, 나 충분히 신경 쓰고 있어. 그러니까 작은 통증에도 바로 병원에 왔잖아.”
그녀 역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진우가 있기에 지나는 겁을 내지 않았다.
“회사 조금만 쉴래요?”
“정말 괜찮아. 아기 낳으면 당분간 회사 못 나올 텐데……. 우울증 걸리면 어떻게 해.”
집에 혼자 있는 것은 사절이었다.
“난 아무래도 타고난 직장인인가봐. 회사에서 일하는 게 더 좋아.”
출산휴가를 쓰기 전에 자신이 맡은 일은 완벽하게 끝내고 싶었다.
“지우야, 너무 빨리 나오지 마. 엄마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았어.”
지나가 배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아기에게 말했다. 그런 지나를 보며 진우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이제 괜찮아요?”
“응. 나 멀쩡해.”
찌릿하던 배의 통증은 가라앉았다. 언제 또 시작될지 모르지만.
“집에 가고 싶어. 진우야.”
“네.”
진우가 팔을 뻗어 지나를 일으켰다. 만삭의 임산부답지 않게 여전히 진우의 품에 쏙 들어오는 그녀는 가녀렸다.
“이제 집에 가요.”
아기처럼 제 품에 안기는 지나를 꼭 안으며 진우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부른 배 때문에 더욱 꽉 지나를 안지 못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집에 가서 출산 가방 슬슬 싸야겠다.”
진우의 품에 얼굴을 비비던 지나가 웅얼거렸다.
“네. 제가 할게요.”
그동안 차근차근 아기용품들을 하나둘 씩 준비했다. 정작 아기를 맞이해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또 무언가 부족한 게 있나 걱정이 슬슬 일었다.
우우웅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진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네.”
전화를 받은 그의 목소리가 다소 심각해졌다.
“지금은 좀 어렵습니다.”
진우의 거절에 지나가 고개를 들어 진우를 바라봤다. 소리를 내는 대신 입 모양으로 진우에게 벙긋거렸다.
‘난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자신 때문에 급한 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네.”
진우가 깔끔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찾아뵙도록 하죠.”
통화가 끊기자 지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집에 갈 수 있어. 급한 일이면 얼른 가서 일 봐.”
“급한 일 아니에요.”
진우는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지나에게 말했다.
“정말?”
“네.”
언제쯤이면 지나가 알 수 있을까.
서진우에게 급한 일, 중요한 일은 언제나 이지나라는 걸.
세상의 어떤 것도 지나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걸 언제쯤이면 당연히 깨달을까.
지나의 가녀린 어깨를 감싼 진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자연스레 저녁 메뉴로 대화가 옮겨졌다.
“네가 해주는 파스타가 먹고 싶어.”
“알겠어요.”
“조금 맵게.”
“맵게?”
매운 걸 잘 못 먹는 지나라는 걸 알기에 진우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아기 낳으면 당분간 매운 거 못 먹는대.”
“음. 알겠어요.”
지나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는 남자답게 그는 흔쾌히 대답했다.
“맛있게 매운 스파게티 만들어볼게요.”
“스파게티는 오래 걸리지 않으니까 전화 온 거부터 해결하고 들어가자.”
지나의 새까만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