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외전4) 죽는 한이 있어도
(7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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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외전4) 죽는 한이 있어도
2023.04.14.
잠시 말을 잊은 진우가 지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지나의 투명한 눈동자는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느리게 깜빡거렸다.
“너에게 늘 내가 처음이란 거 알고 있어. 나 때문에 다른 걸 놓치지 마.”
그녀의 말에 진우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일 가도 되는 일이에요.”
“병원에서 전화 온 거잖아.”
진우의 품에 안겨 있던 지나의 귀에도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들린 모양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진우가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그럼, 누나 집으로 데려다주고 갔다 올게요.”
진우의 말에 지나가 끄떡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걸음을 옮기려던 진우가 지나를 한 번 더 바라봤다.
“병원은 저 혼자 갔다 올 거예요.”
“진우야.”
진우의 이름을 부르는 지나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나도 네가 늘 최우선이야. 나에게 그 어떤 일보다 네가 먼저야.”
“…….”
“내가 가면 안 되는 자리면 복도에서 기다릴게. 다만, 내가 네 일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난 너무 슬플 것 같아.”
진우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지나를 슬프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진우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내 곁에 있어요.”
이내 결정을 내린 진우의 눈빛이 낮게 빛났다.
저녁 늦은 병원은 아까보다 훨씬 더 적막감이 감돌았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한층 더 야윈 얼굴로 세희가 진우와 지나를 반겼다.
“바쁜데 오라고 해서 미안해. 회장님이 워낙 성을 내셔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나와 달리 진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너.”
진우가 오자마자 일준이 퀭한 눈으로 노려봤다.
“여태껏 사적인 감정으로 회사 일을 처리했느냐.”
예상치 못한 소리에 지나의 눈이 커졌다. 옆에서 지켜본 진우는 그 누구보다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네가 내 밑에 들어오겠다고 한 것도 여자 때문이었지.”
일준이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차라리 그때 다른 이에게 회사를 맡길 걸 그랬어. 그랬다면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일준의 거친 말에도 진우는 묵묵히 서 있었다. 어떤 말도 감내할 각오를 한 사람처럼.
“결국 한다는 게 아비에게 복수인 게냐? 그러려고 내 밑으로 기어들어 온 게야?”
일준이 말끝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앙상하게 마른 어깨가 떨렸다.
“복수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비로소 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일준과 마치 다른 세상 속에 있는 것처럼 무서우리만큼 차분했다.
“기껏 하는 소리가 전문 경영인을 데리고 와? 아비 회사를 망하게 해도 유분수지.”
일준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내가 어떻게 세운 회산데. 네깟 놈이! 네 어미에 대한 복수랍시고 내 뒤통수를 쳐?”
“복수는,”
진우는 꽉 잠긴 목으로 입을 똈다.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겁니다. 저는 회장님께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일준의 것과 확연히 다른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뭐?”
일준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부자간의 정 따위 없다는 걸 네 입으로 털어놓는 것이냐.”
꽉 쥔 일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장님께서 어머니와 저를 버렸을 때부터.”
그는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지나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슬프게 들렸다.
“버린 적 없다. 네 엄마가 널 데리고 떠난 거지. 가정을 버린 건 네 엄마야.”
일준이 거칠게 응수했다.
“다른 여자를 안는 남편의 모습을 본 어머니의 울부짖음을 보지 않았더라면……. 믿었을 수도 있었겠죠. 같은 남자로서.”
진우의 말에 일준의 눈썹이 흠칫 떨렸다. 그의 곁에 선 세희의 어깨 역시 움츠러들었다.
“그때 어머니와 저는 버림 당했습니다.”
감정 하나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가 비통하게 울렸다. 병실 안은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래서.”
일준이 어딘지 씁쓸한 눈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지금 아비를 버리는 거면 완벽한 복수라고 칭찬해주고 싶구나.”
“…….”
“부모 자식간에 어떻게 정이 없을 수 있겠느냐. 너와 내가 오랜 세월 떨어져 있어도 중요할 때 찾는 사람은 부모 자식 아니더냐.”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일준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넌 내게 복수하는 것이다. 즉, 감정이 있다는 것이지. 네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새아가의 배 속에 있는 아기 역시 태어나자마자 너에게 감정을 느낄 것이다. 네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이기도 전에 말이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진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저는 제 아내와 아기는 버리지 않습니다.”
똑같은 아비가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란 무게를 제대로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좋은 아버지가 될 거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제 아비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와 아들을 먼저 버리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하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진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지나와 아기까지 언급하는 일준의 말을 들을 인내심이 더는 없었다.
“서진우.”
일준의 천둥 같은 목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개의치 않고 돌아선 진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용서하라는 말은 안 한다. 하지만 네 할머니가 세운 이 회사를 그냥 이대로 내버릴 거냐.”
병실문을 잡은 진우의 손잡이가 멈칫했다. 진우의 할머니, 강 여사의 회사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린 진우였다.
그때, 병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준을 노려보는 강 여사의 꼭 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이 말을 안 했더구나.”
갑작스러운 강 여사의 등장에 소스라치게 놀란 일준이 입을 벌렸다.
“어, 어머니.”
강 여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일준에게 다가갔다.
“너에게 회사를 물려준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어미의 가슴이 찢고 찢겨져 너덜거리는 꼴을 두 눈으로 듣고 두 귀로 들었으면서도 넌 네 아내와 아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다.”
강 여사의 꽉 다문 잇새 사이로 한 서린 목소리가 흘렀다.
“처음부터 정략결혼 따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일준이 제 어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싫었다면 끝까지 거절하지 그랬니. 왜 애꿎은 진우 어미나 진우 마음에 대못을 박아. 왜!”
“사랑이 올 줄 몰랐으니까요.”
일준이 지지 않고 말했다.
“제 인생에는 사랑이란 게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소보다 더 열심히 일해 돈을 악착같이 모은 어머니가 세운 회사였다. 어머니가 모아온 돈으로 술을 마시며 여자들을 바꿔가며 만나던 아버지를 대신해 일준은 어머니를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어머니처럼 일하다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서일준의 팍팍한 인생에도 사랑이 있더라고요. 어머니.”
일준의 목소리가 한결 떨렸다. 그런 일준의 말에 충격받은 듯, 강 여사의 눈썹이 한껏 올라갔다. 그러다 이내 그녀의 주름진 입술이 벌어졌다.
“가족을 죽이는 사랑도 있다니?”
“…….”
“그런 것도 사랑이다니?”
강 여사의 말에 일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 어미를 꼭 닮은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난 내 손자 데리러 왔다. 박 변호사에게 연락받고 네가 내 손자에게 난리 칠 게 뻔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더는 내 손자에게 강요하지 말거라. 이만큼 일했으면 됐다.”
아들 때문에 잃었던 손자를 다시 찾았다.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부자간의 정처럼 모자간의 정도 끊기 어려운 것이더라. 얼마나 질기고 질긴지 말도 못 해. 그러니 네 말이 어느 정도 맞다고 본다. 끊을 수 없는 인연, 내가 잘라줘야지.”
“어머니야말로.”
일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게 이렇게 복수하시는군요.”
“복수?”
강 여사가 주름진 눈매를 치켜올렸다.
“인과응보라는 단어부터 배우고 오너라.”
“어머니! 제가 얼마나 사과드려야 해요?”
일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히 사과드렸잖아요. 어머니.”
“나에게 사과할 일이 뭐 있누. 뺨 맞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저 보시러 여기까지 오신 거 아니에요?”
일준의 물음에 강 여사가 무시하듯 고개를 휙 돌렸다.
“진우야, 이만 나가자꾸나. 이제 찾아오지 말거라.”
“어머니!”
일준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줄들이 함께 흔들렸다. 강 여사는 가차 없이 병실을 나갔다.
어머니를 부르던 일준은 격렬하게 기침을 뱉었다. 죽어가는 아들을 향해 야멸차게 돌아선 강 여사는 바스러질 것 같은 작은 체구로 끝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우와 지나는 강 여사를 따라 로비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내내 아무런 말이 없던 강 여사가 로비 앞에서 입을 열었다.
“전문 경영인이라는 게 이 늙은 할미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여기 오기 전 찾아봤다. 요즘 많이들 하는 거더구나.”
“네. 할머니. 오히려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 회사 발전에 더 좋을 수 있어요.”
“그래. 할미는 손자를 믿는다.”
늘 마음이 애달픈 손자였다. 그리고 고마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산달이 얼마 안 남았는데 몸조심하고. 고맙다.”
강 여사가 지나의 손을 꼭 잡았다. 여든 넘은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앞으로 아비랍시고 찾아가지 말고.”
진우와 지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강 여사가 부드럽게 손을 토닥거렸다.
“너희 생활만 해도 바쁜 거 알아. 아비 노릇 제대로 한 적 없는데 병들었다고 뒤늦게 아비 노릇이 다 뭐야.”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진우가 얼른 말하자 강 여사가 펄쩍 뛰었다.
“할머니 아직 안 죽었다. 죽을 때까지 두 발 잘 쓸 거야. 죽으면 썩는데 뭣 하러 아껴.”
강 여사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진우가 이내 깍듯하게 인사했다. 지나 역시 예의 바르게 강 여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살펴 들어가세요.”
“오냐. 너희도 얼른 들어가서 쉬거라.”
강 여사는 빨리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어두운 길 저편으로 총총 걸어갔다.
“미안해요.”
진우가 난데없이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