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외전6) 행복해지면 용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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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외전6) 행복해지면 용서할게요
2023.04.21.
“지나 대리님.”
점심이 되기 전에 윤주가 지나에게 다가왔다.
“네.”
보고서를 확인하던 지나가 시선을 돌렸다.
“인수인계 저한테 해주세요.”
“네? 윤주 씨가요?”
“지혜 대리님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지나가 파티션 너머 지혜 자리를 흘낏 살폈다. 지혜는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는지 끙끙거리며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윤주 씨도 맡은 일이 많을 텐데…….”
“제가 대리님께 용서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요.”
윤주가 두 손을 맞잡고 어색하게 미소를 그렸다.
“용서받을 일…….”
지나가 윤주의 말을 따라 되뇌었다.
“제가 공과 사는 나누는 편이라.”
사적인 일 때문에 윤주에게 회사 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뇨.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니까,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맞아요.”
윤주가 어딘지 비장한 얼굴로 지나에게 말했다.
“용서받지 못한 일이라는 것도 알아요. 제 마음 편하고자 대리님께 용서받고 싶은 욕심이에요.”
“윤주 씨 욕심쟁이네.”
“……?”
뜻밖의 소리에 윤주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긴장한 표정이 완연한 윤주를 보며 지나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욕심쟁이가 뭐가 나빠. 욕심내요. 그래서 결국에는 윤주 씨가 행복해야지.”
“아…….”
나쁜 놈은 감옥에 갔다. 남은 피해자는 그 상처를 오롯이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지나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윤주 씨가 행복해지면 용서해줄게요.”
윤주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늘 불편한 지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듯 행동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회사 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그녀의 행동을 그저 무시할 수 없었다.
“대리님……. 제가, 행복해져도 될까요.”
윤주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지나에게 말했다.
그런 윤주의 모습이 지나의 옛 모습이 겹쳐 보였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지독하게 아파했을 무렵의 제 모습이었다.
진우가 아니었더라면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살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 어둠에 잡아먹힐 것이 분명했다.
“행복하지 않아도 될 사람은 없어. 윤주 씨.”
지나 역시 그랬다.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잘못이라 스스로를 원망했다.
하지만 진우는 그런 자신을 품에 안았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해줬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요.”
“……네.”
윤주의 맞잡은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인수인계는 지혜 씨와 상의해볼게요. 윤주 씨가 돕는다 하면 정말 좋아하겠지만, 윤주 씨 무리하게 일 시키고 싶지 않아요.”
“네. 알겠습니다.”
지나의 말에 윤주는 한결 밝아진 눈으로 꾸벅 인사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상처가 아주 사라졌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었다. 살갗에 남은 상처처럼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상처를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더 이상 그 상처에 슬퍼하고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다.
윤주 씨도 그러기를 바랐다. 더는 힘들어하지 않기를…….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누나, 점심 같이 먹을래요?]
진우의 문자였다. 부회장이 된 직후, 여유 없이 바쁜 진우는 숨 돌릴 여유만 생기면 지나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응, 좋아.]
미소 띤 얼굴로 답문을 보내기 무섭게 진우에게 문자가 왔다.
[점심시간 맞춰서 올라와요. 누나 좋아하는 걸로 시켜놓을게요.]
센스쟁이.
지나가 피식 웃었다. 사내연애라면 두 번 다시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대놓고 사내부부가 되었다. 꿈도 꾸지 못했던 현실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누나.”
부회장실 문을 열자 전무실과 비슷한 크기의 사무실에 오후의 햇볕이 넘실거리며 쏟아졌다.
“나랑 점심 먹을 시간이 돼?”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서류를 살피던 진우가 반갑게 지나를 맞았다. 벌떡 일어나 지나에게 성큼 다가온 진우가 제 품에 지나를 꼭 안았다.
“물론이죠.”
손님 접대용 소파 앞 테이블에는 이미 도착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떡볶이, 파스타, 피자, 초밥, 백반……?”
음식들을 읊던 지나의 눈이 커졌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같이 먹는 거야?”
지나의 질문에 진우가 피식 웃으며 지나를 소파에 앉혔다.
“누나가 먹고 싶은 것과 지우가 먹고 싶은 게 다를까봐요.”
입맛은 시시각각 제멋대로 바뀌었다. 그걸 알기에 진우가 종류별로 시킨 것이었다.
“못 말려. 이거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혹시 지혜랑 윤주 씨 불러도 될까?”
“누나 마음대로 하세요.”
진우와 둘만의 시간도 중요했지만 지나에게는 이 아까운 음식들을 다 버리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몇 분 후, 부회장실에 올라온 지혜와 윤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부회장실에서 오늘 파티하는 줄 몰랐네요.”
지혜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윤주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물었다.
“저희가 감히 먹어도 되는 걸까요?”
진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요. 안 그래도 얼마 전, 우리 지나 누나 진통 왔을 때 지혜 대리님과 윤주 씨가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나무젓가락을 딱 소리 나게 뜯은 지혜가 장난스레 말했다.
“이 정도로는 조금 약한데…….”
“물론, 오늘 식사는 맛보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진우가 얼른 지혜에게 대답했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지혜가 젓가락을 쥐고 끝을 마주쳤다.
“최고의 남편, 최고의 아빠, 최고의 부회장님.”
그녀의 너스레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나의 옆에 앉은 진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봄 햇살이 찬연하게 비치는 부회장실은 맛있는 냄새와 함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식사를 마치고 지혜와 윤주가 먼저 사무실로 내려갔다.
“진짜 조리원은 안 가도 괜찮아요?”
지나를 품에 안은 진우가 지나에게 물었다.
“응. 난 집이 편해.”
열심히 정보를 찾아본 진우는 어딘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리원이 천국이라던데…….”
“나에게는 네가 있는 집이 천국이야.”
지나의 말에 진우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푸훗, 몰랐어?”
지나가 일부러 장난치듯 말하자 진우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천국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
“너와 조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지나의 말에 진우가 숨을 느리게 몰아쉬었다.
“누나가 자꾸 그런 말 하면…… 참기 힘들어요.”
지나가 싱긋 웃으며 진우의 어깨를 매만졌다.
“부회장님, 퇴근할 때까지는 참으셔야 합니다.”
“하……. 지금 당장 퇴근하고 싶네요.”
“부회장님, 직원들의 모범이 되셔야죠.”
지나가 장난스레 말하자 진우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회장 승계는 완전히 결정한 거야?”
지나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졸업한 아담 해리스에게 연락 넣었어요.”
“정말 괜찮겠어?”
지나의 눈빛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한 거라면…….”
“아니에요. 어차피 K그룹은 처음부터 제가 맡을 회사가 아니었어요. 회장님과 상관없이 제가 꿈꾸던 일은 따로 있었거든요.”
진우가 다소 상기된 눈으로 말했다.
“그랬구나. 그럼, 다행이야.”
지나는 여태 마음 한쪽으로 진우의 결정에 대한 미안함을 담고 있었다.
“사실 제가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차린 사업이 있어요.”
지나를 품에 안은 진우가 미처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
“스타트업인데 시작한 건데 생각보다 투자를 잘 받아서 처음에 자리를 잘 잡았어요.”
지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예전에 도진이 꺼냈던 말이 떠올랐다.
‘미국에 있는 신생 사업체가 하나 있는데 회사 투자금이 거기로 들어가고 있어.’
K그룹이 투자한 신생 사업체.
“회장님께서 네가 차린 회사에 투자하신 거야?”
“제가 회장님의 회사를 돕는 조건이었어요.”
진우가 차분한 시선으로 지나를 바라봤다.
“그랬구나.”
어쨌든 진우는 자신을 위해 막 차린 회사를 내려놓고 이 회사로 온 것이었다.
“서진우 정말 나 하나 때문에 네가 가진 걸 다 두고 온 거였구나.”
그를 처음 맞닥뜨렸던 시간이 떠올랐다.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절망과 어둠의 늪에 빠졌던 지나의 앞에 홀연히 나타난 남자.
유난히 빛나던 그 남자가 자신의 태양이었다. 새삼스러운 사실에 지나가 피식 웃었다.
“난 널 위해 뭘 해줘야 할까.”
“내 곁에만 있어줘요.”
진우가 지나를 더욱 꼭 안았다.
“그거면 돼?”
미소를 머금은 지나가 진우의 등을 어루만졌다.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그의 등은 믿음직스러웠다.
“네. 그거면 충분해요.”
진우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알았어. 머리가 하얗게 세도 있을 테니까 못생겼다고 놀리면 안 돼.”
지나가 엄포놓듯 말하자 진우가 가볍게 웃었다.
“머리가 세도 예쁘겠다. 우리 누나.”
그의 단단한 콧대가 지나의 머리카락 사이로 비벼졌다.
“저녁에 데이트할래요?”
“응.”
출산을 앞두고 둘만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태어날 아기에 대한 기대와 설렘과 별개로 진우는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 노력했다.
“너…… 혹시 나 몰래 맘카페 같은 데 가입한 거 아니지?”
“네?”
지나가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진우가 깜짝 놀랐다.
“아니,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지나보다 한 걸음 더 앞서 알아보고 준비하는 진우의 모습은 초보 남편, 초보 아빠치고 너무나 완벽했기에.
“아니에요. 하하.”
진우가 눈을 굴리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아기 낳으면 둘만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요.”
“음, 그건 그렇지.”
지나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가 어딘지 안도하는 얼굴로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육아용품 사러 갈까?”
곰곰이 생각하던 지나가 말하자 진우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웬만한 건 다 있어요.”
“언제?”
회사일에 바빠 정작 지나는 잘 챙기지 못했다. 진우 역시 바빴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
“틈틈이 제가 미리 샀어요.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