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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외전7) 이지나의 남자, 서진우 (77/80)


77(외전7) 이지나의 남자, 서진우
2023.04.25.



 
퇴근하는 윤주는 정류장에 서 있는 낯익은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유 대리였다.

무시하자니 같은 버스를 타고 내리는 걸 알기에 민망했다. 그렇다고 아는 척하기에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에 빠진 윤주 앞에 어느새 버스가 도착했다.

차례대로 올라탄 윤주는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섰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유난히 익숙한 향이 맡아졌다.


‘헐…….’

왜 이렇게 그 남자를 의식하는 걸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윤주는 일부러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꾸 떠오르는 생각을 흩트리기 위해서였다.

끼이이익.

갑자기 선 버스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윤주의 몸이 밀렸다. 깜짝 놀란 윤주의 균형이 무너져 넘어지기 직전, 누군가 윤주의 팔을 잡았다.


“감, 감사합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인사를 전한 윤주의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진하게 다가왔다. 고개를 든 윤주는 그제야 자신을 잡아준 이가 유 대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 대리님.”

“조심하세요.”

유 대리는 언제 잡아줬냐는 듯이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민망함에 고개만 끄덕인 윤주는 손잡이를 더욱 꼭 잡았다.

버스에서 내린 윤주는 민망함에 먼저 걸어갈지 느리게 갈지 고민했다.


“집이 어디예요?”

유 대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윤주가 손가락으로 집 방향을 가리켰다.


“00아파트예요?”

단번에 맞춘 유 대리의 목소리에 윤주가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혼자 괜히 끙끙거린 셈이었다.


“갑시다.”

먼저 발걸음을 옮긴 유 대리의 무심한 배려 덕분에 윤주는 한결 편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같은 방향인 집 때문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어색해할 필요 없었다.


“아, 우산은 그때 잘 썼습니다. 돌려드릴게요.”

“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유 대리가 먼저 층수를 눌렀다. 머뭇거리며 누르지 않은 윤주를 향해 시선을 두자 윤주가 이미 눌러진 층수를 가리켰다.


“저도 여기 살아서요.”

이번에는 유 대리도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아, 네.”

그 뒤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살 수가 있을까. 기막힌 우연이었다.

띵, 소리와 동시에 얼음 땡에서 풀려난 것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각자 집 앞에 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잠금이 해지되는 소리가 들리고 동시에 문이 닫혔다.

어색함의 연속이었다. 문을 쾅 닫고 현관에 선 윤주가 이마를 짚었다.


‘어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직 돌려주지 못한 검은색 우산에 자연히 시선이 갔다.


‘몰래 집 앞에 두고 올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윤주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냐, 아냐. 뭘 이렇게까지 신경 써.’

그저 같은 회사, 같은 아파트 사는 남자라 그런 거라 치부하며 윤주는 신발을 툭툭 벗었다.

***

퇴근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지나와 진우 너머로 노을이 내린 한강이 반짝거렸다.


“어머니께서 다음 주에 한국 오신대요.”

결혼식을 보고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진우의 엄마가 출산에 맞춰 한국에 온다는 소식이었다.


“이번에는 삼 개월 정도 계실 거라고 하시네요. 손자도 보고 한국에 친구들도 만나고.”

“그렇구나.”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가 부모님들 모두 새로운 식구를 맞이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출산 소식이 들리는 즉시, 당장 서울로 달려올 것을 알았다.


“진우야, 아버지께는 정말 안 가……?”

지나의 질문에 진우가 입술을 다물었다.


“이제 갈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진우는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 아버지잖아.”

지나가 보기에 일준은 진우를 아들로서 사랑했다.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진우를 부른 것은 그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리라.


“한국 오기 전까지 아버지 없이 살았어요.”

아버지의 존재는 진우에게 오히려 낯설었다. 그가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아버지 없는 삶을 이어갔을 것이었다.


“아버지께 감사한 것은 하나뿐이에요. 누나를 만나게 해준 것.”

진우가 옅은 미소를 그렸다.


“아버지의 잘못이 크다는 것 알아. 하지만 아버지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면 네 마음이 괜찮을까 나는 걱정돼. 아버지께서 아프시잖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누나…….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진우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지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불안한 마음이 전해지듯 지나의 손을 잡은 진우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뚝 솟았다.


“누나한테까지 마음 쓰게 해서 미안해요.”

진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살짝 놀란 듯 지나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 말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듯 지나는 이내 입술을 꾹 물었다.


“어머니께 약속했어요. 아버지와 같은 남자가 되지 않기로. 아버지가 남긴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진우 어머니에게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진우가 있었기에 남편의 배신을 견딜 수 있었다.


“어머니의 분노도, 어머니의 상처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선택했고 아버지는 지금 곁에 계신 그분을 선택했죠. 그때부터 이미 이렇게 될 줄 예상했을 거예요.”

진우가 낮아진 목소리로 가만히 읊조렸다. 그의 그늘진 모습에 지나가 다른 쪽 손으로 진우의 손을 꼭 덮었다.


“너와 어머님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아버지께서도 많이 후회하고 미안해하실 거라 생각해. 그분의 과오는 당연히 큰 잘못이지만 너와 아버지의 관계까지 끊어버리는 건 나중에 언젠가 네가 후회할 것 같아서…….”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지나가 작게 덧붙였다. 그런 지나를 똑바로 바라보던 진우가 깊이 숨을 들이 내쉬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한다는 말 혹시 들어봤어요?”

진우의 질문에 지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말…….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말이에요.”

거짓이 아니었다. 진우의 눈은 난생처음 보는 두려움이 고여 있었다.


“무의식적으로라도 아버지를 닮으면 어쩌지, 싶어서…….”

맞잡은 손을 통해 그의 떨림이 전해졌다. 지나는 온몸에 전기를 맞은 듯, 진우를 바라봤다.


“내가 언젠가 누나와 지우를 배신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정말이지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화가 치솟아요. 왜 그따위 짓을 했는지 수백 번, 수천 번 묻고 싶어요.”

그의 두려움을 알지 못했던 지나는 진우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래서 전 날 닮은 아들이 두렵기도 해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버지로서 자격이 충분할까.”

진우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자신을 품은 남자는 정작 과거의 껍질을 벗지 못한 채였다.


“진우야.”

지나가 침착하게 진우를 불렀다. 늘 따뜻한 온기를 품은 진우의 눈동자가 더듬거리며 지나를 바라봤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지나는 눈가가 화끈거렸다.


“내가 있잖아. 너는 훌륭한 남편이자 좋은 아버지야. 내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어.”

“…….”

“내가 선택한 남자야. 넌…….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보다 듬직한 어깨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어. 절대 사랑하는 이들을 져버릴 남자가 아니야.”

당장,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되는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트라우마를 깨끗하게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잘 봐. 넌 이지나의 남자 서진우야. 서일준이 아니야.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들도 많아. 조선 왕조부터 따져볼까?”

지나가 애써 미소를 그리며 말하자, 진우가 시선을 내리며 가볍게 미소지었다.


“맞아요. 난 서진우예요. 아버지와 달라요.”

“그럼, 아버지가 버린 어머니를 넌 끝까지 책임졌잖아. 그것부터 넌 다른 사람이야.”

지나의 말에 진우의 초점이 명료해졌다. 불안감에 흔들리던 그의 시선이 곧아졌다.


“어딘가 아버지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 있었어요. 누나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했는데…….”

“말해줘서 고마워.”

지나가 손을 올려 진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조각 같은 그의 이목구비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잘 훈련시킨 강아지처럼 진우가 지나의 손바닥에 얼굴을 바짝 대고 비볐다.


“나야말로 고마워요. 누나가 있어서…… 누나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뜨거운 숨결과 함께 진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처음보다 촉촉해진 그의 눈빛에 지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앞으로도 힘든 일 있으면 다 말해줘. 이제 너 혼자 힘들어하지 마.”

진우는 대답 대신 지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바닥에 뜨거운 입술을 꾹 눌렀다.


“네.”

 

 
다 타버린 노을 위로 까만 어둠이 번졌다. 어둠이 찾아온 한강변을 따라 별들이 내려앉은 듯, 가로등들이 켜졌다.

여유로운 눈으로 야경을 감상하던 지나가 손을 내려 배를 만졌다. 지우의 태동이 평소보다 활발해졌다.


“아빠 힘내라고 응원하는 거야?”

지나가 미소를 머금고 작게 말했다. 그 순간,


“아얏.”

지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당황한 진우의 눈이 커졌다.


“누나?”

작은 파도처럼 진통이 밀려왔다.


“스읍, 하…….”

유 대리가 알려준 라마즈 호흡을 따라 내쉬던 지나가 배를 어루만졌다. 저번처럼 진통이 아니라 연습 삼아 오는 통증일 수 있었다.


“괜찮을 거야. 스읍, 하…….”

말과 달리 하얗게 질린 지나의 얼굴에 진우가 입술을 꾹 물었다.


“앗…….”

조금 더 센 강도의 통증이 연달아 밀려왔다. 진우의 손을 잡았던 지나의 손바닥이 젖었다.


“안 되겠어요. 병원 가요.”

진우가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나를 부축한 진우가 걸음을 조심히 옮겼다. 숨을 몰아쉬던 지나는 이제 더 이상 말조차 없었다.


“미안해요. 누나.”

이유 없이 사과를 던지는 진우의 눈가가 붉어졌다.


“흐읍……. 괜찮아. 진우야. 드디어 우리 지우 만나는 시간이 왔나봐.”

예정일보다 2주나 남은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진통에 진우는 지나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별처럼 반짝거리던 밤의 도로가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전대를 꽉 잡은 진우가 엑셀을 깊이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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