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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외전8) 당신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겁니다 (78/80)


78(외전8) 당신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겁니다
2023.04.28.



“회장님, 정신 차리세요.”

세희가 다급하게 일준의 얼굴을 향해 소리쳤다. 강 여사가 다녀간 후, 일준의 상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회장님…….”

깡마른 회장의 손을 꼭 잡은 세희가 눈물을 흘렸다.


“여보.”

일준이 잠시 정신이 들었는지 세희를 불렀다.


“네. 저 여기 있어요.”

세희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얼른 대답했다.


“내가, 내가 죄가 많아…….”

초점 없는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일준이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진우 그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세희는 붉어진 눈가를 비비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진우 부를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

지나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숨조차 못 쉬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지나의 모습을 보며 진우는 오히려 자신의 몸을 찢으라며 울었다.


“산모님, 정신 차리세요. 숨 쉬어야 해요.”

몇 번이고 지나가 의식을 놓을 뻔했다. 진우는 그때마다 지나의 손을 꼭 붙잡고 온 세상의 신에게 기도했다.


“누나……. 미안해요. 누나. 제발…….”

그러기를 몇 시간이 지났을까.


“다 열렸네요. 분만실로 이동할게요.”

어두운 방으로 이동됐다.


“산모님, 이제 마지막으로 저희와 숨쉬기할게요.”

전쟁터를 불사하는 긴장감이 넘치는 분위기에서 땀에 젖은 지나는 마지막 힘을 짜냈다.

몸을 부숴버릴 것처럼 뒤흔드는 어마하게 무시한 진통에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기를 위해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지나가 이를 악다물며 호흡을 따랐다.

지나의 곁에서 손을 붙잡은 진우는 안타까운 눈으로 지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아기를 낳는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임신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드디어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으아아아앙.”

“축하드립니다.”

의사와 간호사의 손에 들린 아기는 매우 작았다.


“아버님, 와서 한 번만 보세요.”

굵은 탯줄을 달고 있는 아기와 첫 대면이었다. 진우는 얼떨떨한 눈으로 아기를 바라봤다.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여기 보시면 다 정상입니다.”

완벽하게 아기를 체크하는 간호사의 전문적인 손길에도 진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초록색 천에 꽁꽁 쌓인 아기를 품에 안은 진우는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


 
아들.

그와 지나의 아기였다. 그는 아기를 데리고 지나에게 보였다.


“고생했어요.”

아기를 보자 지나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미소를 그렸다.


“안녕, 지우야.”

감동적인 첫 만남이었다. 아기는 이내 처치를 위해 간호사가 데리고 나갔다.


“수고했어요. 사랑해요.”

진우가 지나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지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진우의 손을 꼭 잡았다.


“사랑해.”

지나가 작게 속삭였다. 울컥거리는 뜨거움이 솟구쳤다. 진우는 지나의 젖은 뺨에 입을 맞췄다.


“푹 자요.”

새벽 동이 막 트는 시간이었다. 밤새 진통을 한 탓에 지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진우 역시 그녀 곁에서 밤을 꼬박 새웠지만 조금의 피로함을 느낄 수 없었다.

우우웅-

막 분만실을 나선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 회장님께서 찾아.

세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 면목 없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번만 와주면 안 될까?

진우는 굳은 얼굴로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아.

혹여, 진우가 오지 않겠다고 할까 봐 세희가 조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 알겠습니다.”

한 박자 늦게 진우가 대답했다. 진우는 화장실에 가서 차가운 물을 틀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손을 닦았다.

병원 창을 타고 저 멀리 뜨기 시작한 새벽 동이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어둠을 몰아내는 햇빛이 병원 복도를 채우기 시작했다.

***

일준의 병실은 어두웠다. 햇빛이 들지 않게 창을 가린 블라인드 때문이었다. 진우가 소리 없이 일준에게 다가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세희가 벌떡 일어나 진우를 반겼다.


“진우야.”

면목 없는 얼굴로 진우에게 희미한 미소를 짓는 세희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진우는 아무런 감정 없는 시선으로 일준을 바라봤다.

삑삑거리는 기계 소리만이 아직 일준에게 숨이 붙어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바쁜데 미안해. 회장님께서 마지막으로 널 찾으셔서…….”

세희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네.”

짤막하게 대답한 진우는 고요히 일준을 바라봤다. 그는 일준을 깨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나는 몸 좀 어때.”

적막 속에 세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새벽에 출산했습니다.”

“어머, 너무 잘됐다. 축하한다. 진우야.”

세희가 두 손을 모으며 웃었다.


“……진우 왔냐.”

작은 소란에 일준이 눈을 떴다. 그는 짧은 마디에도 숨을 헐떡였다. 진통제에 의해 목숨을 연장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네.”

진우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새아가는.”

가까스로 묻는 일준의 말에 세희가 얼른 답했다.


“오늘 새벽에 출산했대요.”

“오.”

일준의 입가가 길게 늘어졌다.


“그래, 사내냐, 계집이냐.”

일준의 물음에 진우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아들입니다.”

방금까지 제 품에 안겼던 아들의 체온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기뻐하시겠구나.”

유독 손이 귀한 집이라 늘 걱정하던 강 여사의 모습을 떠올린 일준이 쿨럭거리며 기침을 뱉었다.


“빨리 가봐라.”

방금 온 진우를 쫓아내는 일준을 향해 세희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몸 푼 아내 혼자 두는 거 아니다.”

“……네.”

진우는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돌렸다.


“미안하다.”

그때 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의 걸음이 멈췄다.


“아비로서 사과하고 싶었다. 넌 나와 달리 좋은 아비가 될 게다. 날 하나도 안 닮았거든.”

걸쭉한 기침 사이 사이로 일준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결국 그 말을 하고 싶어 진우를 부른 것이었다.


“얼른 가거라. 쓸데없이 부르지 않으마.”

진우가 몸을 돌릴까 일준이 얼른 말을 이었다.


“당분간 찾아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췄던 진우는 주먹을 꽉 쥔 채, 성큼성큼 병실을 걸어 나갔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일준은 어딘지 미소 띤 얼굴이었다.


“꼬맹이가 아버지가 되었구나.”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쳤다. 동시에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죽음이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아들에게 사과하지 못하고 눈을 감을까 두려웠던 일준이었다.


“이제 저승길에 마음 편히 오를 수 있겠구나.”

일준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진우는 운전석에 올랐다. 고작 그 말을 하기 위해 자신을 부른 일준에게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마음 하나 편하자고 한 것 같아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툭.

운전석에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진우는 잠시 멍한 눈으로 운전석을 바라봤다. 순간 비가 오나 싶을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투둑.

운전대에 연달아 떨어진 물방울은 진우의 턱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매만진 진우는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진우가 당황한 얼굴로 눈물을 닦았다. 일준을 위해 눈물을 흘릴 생각이 없었다. 마음도 없었다.


‘왜…….’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동을 걸려던 진우는 갑작스레 올라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운전대를 꽉 잡은 진우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마지막까지, 그리고 아버지가 죽어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사과에 진우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똑바로 바라보기도 전에 눈물이 터졌다.


‘당신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겁니다.’

붉어진 눈으로 진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늘에서 지켜보십시오.’

울음을 간신히 삼킨 진우가 시동을 켰다.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어깨가 가벼웠다.

***

평소처럼 출근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뛰어나온 윤주는 엘리베이터에 서 있는 유 대리를 발견했다.

윤주가 나오는 인기척에 유 대리가 힐끗 돌아봤다.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차분한 표정은 그가 어떤 생각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출근하시나봐요. 하하.”

윤주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한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네.”

유 대리는 간결하게 답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도 어색함을 계속됐다. 윤주는 한시라도 빨리 엘리베이터를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로비를 누르지 않고 지하주차장을 누른 유 대리가 윤주에게 물었다.


“괜찮으시면 카풀하실래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윤주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저요?”

주변을 휙휙 돌아보던 윤주가 다시금 묻자 유 대리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네. 허윤주 씨요.”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윤주는 눈을 깜빡거렸다. 당황함에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왜요?”

그녀의 질문에 유 대리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턱을 매만졌다.


“같은 출발지, 같은 목적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눈을 데굴거리며 굴리던 윤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름값 제가 반 보탤게요.”

“네.”

유 대리 특유의 간결한 대답이 들렸다. 동시에 일 층에 선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저도 모르게 걸어 나갈 뻔한 윤주의 팔을 유 대리가 잡았다.


“아.”

당황한 건 윤주만이 아니었다. 유 대리 또한 당황했는지 어색하게 팔을 거뒀다.


“제 차는 지하주차장에 있습니다.”

다시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윤주는 순간 자신이 잘못 선택했나 후회했다. 몸이 편하자고 이 숨 막히는 어색함을 버텨야 하나.


“저…….”

그냥 알아서 회사에 출근하겠다고 말하려던 윤주는 유 대리가 먼저 앞서 걸어 나가자 타이밍을 놓치고 그 뒤를 따랐다.

삐빅.

차의 조명이 깜빡거리며 제 위치를 보였다.


“타시죠.”

유 대리가 무심하게 말했다. 윤주는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조수석을 열었다.

차 안은 주인의 성격을 보이듯 깔끔했다. 안전밸트를 차던 윤주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몰라서 어제 깨끗이 청소한 겁니다.”

“네?”

“저 원래 그렇게 깔끔한 놈이 아니라서요.”

유 대리의 말에 윤주가 고개를 끄덕거리다 손에 든 휴대폰을 옆으로 떨어뜨렸다. 당황한 윤주가 얼른 손을 뻗었다.


“어? 그런데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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