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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외전9) 이지나를 잃을까 봐 (79/80)


79(외전9) 이지나를 잃을까 봐
2023.05.02.



 
윤주의 손에 들린 건 작은 양말이었다. 아주 작은 양말은 아기용으로 보였다. 유 대리가 당황하며 윤주의 손에 들린 양말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유 대리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윤주는 못 본 척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유 대리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사까지 오는 시간 동안 차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주차장에 도착하자 윤주가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네. 이따 뵈어요.”

유 대리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윤주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먼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유 대리는 별말 하지 않았다.


“후…….”

사무실에 들어온 윤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 대리의 상처를 본의 아니게 본 느낌이었다. 그는 분명 미혼으로 보였다.

집 앞에는 아기 있는 집처럼 유모차라든가, 관련된 물품이 보이지 않았다. 윤주는 생각을 끊어내듯 머리를 저었다.


“어유, 남의 일이야. 생각하지 말자.”

“윤주 씨!”

지혜가 윤주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소식 들었어?”

“네?”

“지나 대리 아기 낳았대. 오늘 새벽에.”

“어머나.”

“예정일보다 2주나 빨리 낳았네. 어제 우리가 부회장실에서 먹었던 음식이 최후의 만찬처럼 되었네.”

“아기 너무 예쁠 것 같아요. 엄마 아빠 둘 다 미모가 뛰어나잖아요.”

윤주가 손을 모으며 미소지었다.


“그러게, 미모로 세계 제패 가능할 것 같다.”

지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나저나 인수인계 말이야.”

“아. 그거 제가…….”

“윤주 씨가 조금 도와준다고 했다면서, 고마워.”

지혜가 눈을 찡긋거렸다.


“네.”

윤주가 눈을 마주치며 미소지었다.


“한결 부담이 덜하네. 그래도 지나 대리가 웬만한 일은 다 끝내놓고 가서 확인하니까 그렇게 일이 많지 않더라고. 역시 PM이야.”

“지나 대리님 진짜 일 잘하시는 것 같아요.”

윤주가 존경을 담아 말했다.


“회사에 목숨 바치냐고 내가 처음부터 말렸는데 본능인가봐.”

지혜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데 오늘 일찍 왔네. 윤주 씨 평소 출근 시간보다.”

지혜의 말에 윤주가 어딘지 뜨끔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아……. 오늘따라 조금 빨리 나왔어요.”

“그래. 알았어. 이따 봐.”

카풀한 게 죄도 아닌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윤주였다. 어떤 사이도 아닌데 왜 비밀처럼 말을 안 한 건지……. 자리에 앉은 윤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나 하자. 집중.”

윤주가 컴퓨터를 켜며 호흡을 차분하게 골랐다.

***

잠에서 깬 지나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진우를 발견했다.


“잘 잤어요?”

진우가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응. 푹 잤어.”

하룻밤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배 속에 품었던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 지우는 잘 있어?”

“네. 자고 있는 거 보고 왔어요.”

진우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너 회사는……?”

“오늘은 안 가도 돼요.”

진우는 하루 종일 지나 곁에 있을 생각이었다.


“장모님 곧 오실 거예요. 아침에 연락드렸어요.”

“고마워.”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진우가 차분히 행동한 것이 못내 고마웠다.


“당연한걸요. 누나가 혼자 고생하게 해서 너무나 미안해요.”

진우의 따뜻한 손이 지나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네가 있어서 젖 먹던 힘까지 낼 수 있었어.”

지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진우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우리 아기 너무 예뻐요. 누나랑 똑 닮았어요.”

진우가 흡족한 얼굴로 지나에게 말했다.


“화찢남 아빠를 닮아야 하는데…….”

어딘지 아쉬운 얼굴로 지나가 중얼거렸다. 진우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의 뒤에서 비치던 후광은 지나에게만 보인 것이 아니었다. 지혜를 얼어버리게 한 진우의 비쥬얼은 적응된 지금도 가끔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으니까.


“화찢남……?”

진우가 살짝 눈썹을 치키며 물었다.


“아, 그런 게 있어.”

지나가 장난스레 웃었다.


“지나야!”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지나의 엄마와 아빠가 나타났다.


“아이고, 내 새끼.”

“엄마.”

아침부터 강원도에서 달려온 엄마가 팔을 뻗어 지나를 품에 안았다.


“고생했어. 내 새끼. 아이구.”

엄마는 지나의 얼굴을 살폈다.


“많이 힘들었지? 대견하다. 내 딸.”

“엄마도 나 낳을 때 이렇게 아팠어?”

“그럼, 아팠지. 그래도 이렇게 예쁜 딸 낳아서 다 까먹었어.”

“나도 그래. 진짜 숨도 못 쉴 만큼 아팠는데 지금은 살 것 같아.”

엄마에게 투정 부리는 지나의 모습은 소녀같이 보였다. 진우는 그런 지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여전히 소녀 같은 여린 여자가 새벽 내내 어마어마한 통증을 견디던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숭고한 모습이었다.


“장모님, 아기 보러 다녀오시겠어요?”

“어, 그래그래. 손주 보러 가야지.”

지나 엄마와 아빠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안 하고 곧바로 병실을 나갔다.


“나도 보고 싶은데.”

지나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진우가 눈을 빛냈다.


“아기도 엄마 보고 싶겠네요.”

진우가 지나를 품에 안았다.


“나 걸을 수 있어.”

“무리하면 안 돼요.”

“무거울 텐데.”

“너무 가벼워요. 산모가 이렇게 가벼우면 안 될 거 같은데.”

능글거리는 유머까지 하는 진우에게 지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웃었다.


“못 살아.”

“꽉 잡아요.”

제 목에 지나의 손을 감싼 진우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

퇴근한 윤주가 지혜와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CS팀 사람들이 나오자 당황한 윤주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대리님, 저 휴대폰 두고 나온 것 같아서요. 사무실에 다시 가지러 갈게요. 대리님 먼저 내려가세요.”

“어머, 윤주 씨가 그런 실수도 다 하고. 알았어. 내일 봐요.”

지혜와 인사를 마친 윤주가 도망치듯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온 윤주는 괜히 서류를 뒤적거렸다.


“어머, 휴대폰 여기에 있네.”

가방에 잘 들어있는 휴대폰을 확인한 윤주가 민망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어색한 카풀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갔겠지……?”

윤주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나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앞은 비어 있었…….


“휴대폰 찾았어요?”

엘리베이터 맞은편 벽 쪽에 그림자가 휙 튀어나왔다. 유 대리였다.


“네. 안 가셨어요?”

놀란 윤주가 물어보자 유 대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네.”

윤주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망했다.’

차에 올라타 집에 도착하기까지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윤주 씨.”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튀어 나가려는 윤주를 유 대리가 불렀다.


“네?”

당황한 윤주가 차 문에 매달린 채, 깜짝 놀라 돌아보자 유 대리가 안전밸트를 딸깍 풀며 말했다.


“카풀하는 거 부담스러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부담 주려고 제안한 거 아니니까.”

“아, 네. 부담스럽기는요. 제가 신세 지는 거 같아서…….”

윤주가 손을 저으며 굳어진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아기 양말은, 제 딸 거였어요. 지금은 없습니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거든요.”

덤덤하게 말하는 유 대리의 이야기에 윤주는 저도 모르게 입매를 굳혔다.


“같은 회사에 옆집이라 이상한 소문 날까 봐 말씀드려요. 윤주 씨가 이상한 소문낼 거라 생각한 건 아닙니다. 다만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요.”

그의 고저 없는 목소리는 어딘가 윤주의 마음을 눌렀다. 애써 누르고 있던 뜨거운 감정이 건드려진 것처럼, 윤주의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툭 흘렀다.


“윤주 씨?”

이번에는 유 대리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딸이 있으셨군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윤주가 중얼거렸다.


“저는 아들인지 딸인지도 몰라요. 너무 주 수가 일러서…….”

잊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잊고 살았다.


“…….”

유 대리가 참담한 얼굴로 묵묵히 윤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는 답을 모르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죄송해요. 저 대리님 오해 안 해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윤주가 서둘러 눈물을 닦고 빙긋 웃었다. 차 문을 여는 윤주에게 유 대리가 대뜸 말했다.


“우산.”

몸을 돌린 윤주가 멈추자 유 대리가 이어 말했다.


“돌려받고 싶은데…….”

“아.”

나지막하게 소리를 낸 윤주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대답했다.


“지금 올라가서 바로 드릴게요.”

엘리베이터에서 다시금 침묵이 이어졌다. 집 앞에 내리자 윤주가 서둘러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유 대리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에 한 발 떨어진 채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윤주가 문 앞에 세워둔 우산을 집어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주가 유 대리에게 물었다.


“저…… 잠깐 들어오셔서 차 한잔하실래요?”

“……그러죠.”

윤주를 바라보던 유 대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윽고 걸음을 옮긴 유 대리가 현관에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

아기는 작았다.


“너무 작아.”

창 너머 아기를 바라보던 지나가 중얼거렸다. 진우가 그런 지나를 보며 빙긋 미소지었다.


“예쁘죠. 누나 닮았어요.”

“너 닮은 거 같은데…….”

홀린 듯 멍하니 아기를 바라보던 지나의 말에 진우가 행복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요.”

지나를 품에 안은 진우가 지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아유, 어쩜 저렇게 예쁠까.”

먼저 와서 손주를 보던 지나의 부모님이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창 너머 작은 아기의 존재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아기가 옹알거리던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아이구, 아이구. 내 새끼.”

지나 엄마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너무 신기해.”

유리창에 손을 댄 지나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진짜 아기를 보니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이 안 나. 진우야.”

지나의 말에 진우가 피식 웃었다.


“난 아직 기억나는데……. 두 번은 못 볼 장면이었어요.”

“왜……? 내가 너무 못나서?”

지나가 눈을 흘기며 묻자,


“아니, 이지나를 잃을까 봐.”

귓가를 파고드는 진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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