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7화 - 각자의 입장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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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이 조선 통신사의 당도를 알게된 그 시각.
또다른 곳에서도 역사의 물줄기가 원 역사와 달라지려 하고 있었다.
"..대마도주 그놈의 짓이야."
왜구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삼인방이 회합을 가지는 저택에서 신사부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소의 묵직한 목소리와는 달리 지금은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는 것이, 긴장하거나 흥분한 듯 했다. 어떤 경우든 침착하다못해 냉혈한이라고 불리는 그도 역시 사람인지라 이 사안에 대해서는 동요했던 것.
긴지로와 마고지로는 속내야 어떻든 말을 아끼며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긴, 어차피 모리와 대마도주는 조정의 토벌령을 수행해야 하니 연합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생각보다 벌써 행동에 나선 것이로군."
한두척도 아니고 정탐선 세 척이 갑자기 사라졌다. 정탐선은 몇 시진(2시간) 간격으로 교대를 하는데, 다음 교대조에 의해 발견되었으니 몇 시진이란 짧은 시간 동안 당했던 것이다. 분명 상당한 규모의 군세가 개입된 것이라고 왜구들은 확신했다.
왜 굳이 이쪽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세 척의 배를 한 척도 남김없이 침몰시킬 정도면 적어도 열 척의 함대를 이끌고 왔다고 봐야 했다.
야간이라 시야도 제한되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은밀하고 신속하게 했으니 그것도 매우 정예한 수군으로 구성된 함대를 말이다. 그런 정예 수군을 운용할 수 있는 존재는 이곳에 자신들을 제외하곤 딱 한명 뿐이었다.
"빌어먹을 대마도주."
신사부로와 왜구들의 착각 속에서, 어느샌가 주명이 한 일은 얼떨결에 정예 수병을 태운 대마도주 휘하의 10척의 함대가 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읽혀 버렸군...'
아직 마고지로와 긴지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했지만 자신은 알 수 있었다. 토벌이 오기 전 대마도를 접수한다는 계획이 이미 탄로났다는 것을.
정말 모리와 함께 자신을 토벌할 생각이었다면 그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고 의도를 감추기 위해 오히려 거짓 친선을 도모하려 했을 것이다. 자신이라도 그리했을 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미리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은 분명 뭔가를 알았다는 것. 토벌 이전에 군사행동을 할 필요가 생겼다는 것.
외세의 개입이 없는 이상 그 필요라는 건 왜구의 '반역'밖에 없으리라.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가. 대체 어떻게!'
자신의 의도를 간파하고 미리 수를 둔 대마도주에게 완전히 밀린 것 같다는 생각에 신사부로는 굴욕감을 느꼈다. 다이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빼면 자신보다 나을게 없다고 생각하며, 내심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자에게 한방 먹은 셈이니 기분이 좋을 리가.
"소 요시토시, 그 주군을 두 명 둔 개자식 같으니!"
노회한 신사부로답지 않게 분노에 사로잡혀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대마도주가 조선에도 입조한 사실을 꼬집으며 원색적으로 비난할 정도로.
손에 곧 잡힐 것 같았던 쓰사마 다이묘의 꿈이 멀어져 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평정심이 깨진 것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뭔가 다른 의도가..."
마고지로가 조심스럽게 사태의 인과를 파악하자고 건의했지만 신사부로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흔들리던 신사부로의 눈동자는 다시 예전의 그 뱀같은 스산함을 되찾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기세를 되찾자 예전에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금 이 회합의 다른 자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굳이 이유를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
"..."
"우리가 알게 될 텐데도 치고 빠졌다? 이건 경고이자 위협이다. 놈은, 대마도주는 이미 우리가 공격할 줄 알고 있다는거다."
충격적인 사실에 마고지로와 긴지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럼 큰일난 거 아닙니까?"
특히 쥐상의 마고지로는 말까지 더듬으며 크게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쥐새끼 깥은 놈 같으니. 그저 운이 좋아 첫 약탈에서 대박을 터트린 덕분에 세력을 일군 주제에 삼대천왕은 무슨.'
왜구들 사이에선 신사부로, 긴지로, 마고지로를 삼대천왕이라고 높이며 경외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왜구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호칭이었지만 마고지로 따위의 쥐새끼에게 천왕이란 호칭이 가당치도 않았다.
마고지로를 마뜩찮게 쳐다보며 혀를 찬 신사부로는 말을 이었다.
"아니, 오히려 기회다."
계획이 사전이 발각되어 선공을 당한 이 상황이 기회라니? 긴지로와 마고지로는 도저히 신사부로의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둘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당황함이 나타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의 그런 표정을 보며 신사부로는 졸렬한 우월감을 느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만 여유를 찾았다는 사실이 신사부로는 만족스러웠으니까.
역시 자신은 저놈들 같은 해적과는 다른 그릇이며, 결국 다이묘가 될 자라는 믿음이 굳어졌다.
"놈이 원하는 건 우리가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고 도주하거나, 겁에 질려 쥐새끼처럼 가만히 숨어 있는 거다. 그러니 원하는대로 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안됩니다!"
긴지로는 짜증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 코에서는 뜨거운 콧김이 수증기처럼 내뿜어지는 것이 마치 성난 황소를 보는 것만 같았다.
동등한 대해적임에도 평소 신사부로가 자신들의 위에서 사실상 군림하고 있는 이 구도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긴지로였다.
대마도주를 친다는 신사부로의 계획도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왜구들의 피를 흘려서 결국 신사부로 그놈만 좋은일 시켜주는 거 아닌가?
전리품에 혹해 따른다 하긴 했지만 뒤돌아 생각해 보니, 또 모의한 계획이 발각된 마당에 이건 아니었다.
"다 발각된 마당에, 이젠 정말 도망가야 합니다!"
여기서 싸우다가 다 뒈지면? 아니 교활한 신사부로가 과연 뒈지기나 할까? 충분히 자신들을 방패막이 삼아 싸우게 만든 뒤 도주하고도 남을 뱀 같은 놈이었다.
당장 도망치자고 말한 것은 그런 불신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사실상 왜구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신사부로야 가진 게 가장 많았고, 늙었서 남은 시간도 없었으니 어떻게든 저항하고 싶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도망치면 세력이야 크게 쪼그라들겠지만 원래 해적의 삶이란게 그런게 아니겠나. 없이 살아본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정도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충분히 감내할만하다 생각했다.
물론 그런 긴지로의 생각 따윈 진작에 꿰뚫어 보고 있던 신사부로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그를 향해 비릿하게 웃음을 지으며 신사부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혼자 도망쳐라."
"그 말을 기다렸소! 난 이제 그만..."
"단! 네놈과 떨거지들만 데리고. 근데 말이야, 그런 생각은 안 해봤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신사부로의 뱀 같은 눈길에 겉보기와는 달리 담이 작았던 긴지로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은 마치 성난 황소가 뱀 앞의 개구리로 변한 것처럼 극적이었다.
"우리가 이기면, 그러면 앞으로 네 자리는 영원히 없을 거란걸?"
"...!"
"우린 뱃놈의 긍지 하나로 살아온 사내들이다. 우릴 먼저 건드린 적에게 겁쟁이처럼 뒤를 보이고, 형제들을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튄 놈을 형제들이 인정할 리가 없지."
신사부로는 긴지로에게 정말 왜구들이 대마도와의 싸움에서 100% 질 것을 확신하느냐?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면 넌 좆됄 것이란걸 말해주며 겁박하는 것이다.
그가 담이 약하다는 것과 내심 신사부로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능력 자체는 경외한다는 걸 알기에 던진 말이었다. 도망간다는 선택지가 최선의 선택지가 되려면 왜구들이 패배해야 하는데, 그 확률이 100% 확률이 아닌 이상 저 멍청이는 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싸우겠소."
"그래 잘 생각했다."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마치 어른이 아이를 격려하듯 긴지로의 어깨를 두드려준 신사부로는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대마도주 휘하의 병력이 지상군만 오천이 넘는다. 수군도 족히 이천은 넘어가겠지."
"정면대결은 애초에 이길 수 없다. 우린 뱃놈들이라 지상에서의 싸움이 익숙하지 않고 숫자도 밀리니까."
"허나, 상황이 변했지. 지금 조선에서 통신사가 왔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무척이나 신경쓰고 있는 그 통신사를 호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따라서 병력은 영주성 주변에 죄다 몰려 있다. 히데요시는 적이 많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니까."
"심지어 호위를 두텁게 하기 위해 수군 병졸들도 상당수가 빠져 나갔다고 하니, 그럼 항구에는 배만 그득하겠지? 그러면 우린 빈집을 털면 된다!"
"...!"
신사부로가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고지로와 마찬가지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지닌 밤의 습격은 오히려 허장성세, 공성계에 가깝다. 최대한 위협을 주어 우리가 가만 있기를 바라는 거지. 항구가 비어 있다는 것을 감추고 싶었던 거다."
"과, 과연!"
둘의 놀란 표정을 보며 더 흡족한 마음이 든 신사부로는 탁자를 내려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우린 비어있는 항구를 공격한다!"
자신을 이젠 거의 우러러 보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긴지로와 마고지로를 보며, 신사부로는 만면에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더니 마치 삼국지의 손권이라도 빙의된 마냥 탁자를 칼로 내리쳤다.
"대마도주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그 항구를 불태워 버릴 것이다!!"
본래 역사에서는 몇 달 뒤 벌어졌을,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던 그 습격이 일찍 벌어지게 되었다.
주명의 행동이 벌집을 건든 것이다. 원래 역사보다 빨리 벌들이 튀어 나오도록.
원래 신사부로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며 병력을 갖은대로 모아 거창하게 공격했지만 너무 시간을 끈 것이 탈이었다.
그들의 의도를 원 역사의 대마도주가 결국 알게 되었던 것. 왜구들이 준비가 끝마칠 동안 대마도주는 그들을 때려잡을 함정을 완성해 버렸다.
은밀히 대기하고 있던 모리 수군과 대마도 병력의 협공으로 왜구 병력은 박살. 세 명의 수급은 조선 통신사를 보내준 것에 대한 답례로 일본 조정에 의해 소금에 절여져 조선으로 배달.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유명한 대해적이자 정해왜변의 주역으로 조선에 심대한 피해를 끼쳤던 네임드 왜구 삼인방의 결말 치곤 허무한 최후였다.
하지만 아직 대마도주가 왜구 삼인방의 음모를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된 이 공격의 결말은 원래 역사와는 분명이 다를 것이었다.
***
푸른 빛의 아기자기하지만 고급스러운 다기(茶器)가 옻칠한 상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윽한 녹차의 향기가 느껴지는 정갈한 분위기의 방 안에서, 일본 특유의 다다미 위에 앉아 두 사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내는 조선의 관복을 입고 있어 일본풍의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적이었는데, 두 사람이 조선 통신사의 일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보게 김 부사(副使), 경은 왜인들을 어찌 보는가?"
"정사어른, 제가 보기에 정말 작위적이고 야만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 간장종지 같은 조그만 잔에는 온갖 노력을 들이며 다도(茶道)라고 숭상하면서도, 사람 목숨은 파리목숨보다 못한 것이 정작 중요한 인본의 가치는 뒷전입니다."
시중을 들던 하인이 실수로 물을 쏟았다 하여 자결시키는 광경을 본 것이 어제였다. 그런 잔인한 왜인들을 행태를 떠올리며 정사 황윤길은 부사 김성일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욱 우리 임무가 중요한 것이네. 저 야만스러운 오랑캐들의 칼이 조선을 향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황윤길이 보건데 왜인들의 기질은 본래 신의가 없고 옹졸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 평은 참말이었다. 허나 우려되는 것은 그 무력의 강맹함이니, 지난 을묘년(을묘왜변)에 단 수천의 왜인들에게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지 않았던가.
정해년의 일(정해왜변)도 얼마나 왜인들이 흉포하고 싸움에서 뛰어난 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단 18척을 끌고온 왜구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던가.
한낱 촌구석의 수령인 대마도주의 병졸들만 봐도 그가 한양에서 봐 왔던 오합지졸 병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만약 이런 자들과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면 그 참혹한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일 것이다.
조선에서 오랑캐와 말조차 섞기 싫음에도 굳이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파악해 보기 위해서였다.
얼마전 대마도주가 한양에 입조하여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
물론 평화에 젖어 있는 조선은 그 경고를 그냥 묵살해 버렸지만.
하지만 조선도 정보력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뭔가 불온하고 불길한 기류 자체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정에서도 전쟁 가능성과 준비에 대해 격론이 오고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가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진실공방보다는 당리당략에 따라 논쟁이 지지부진하게 오고갔기에 섣불리 결론이 나지 않았고, 여론은 길어지는 논쟁을 보며 혹시모를 전쟁 가능성에 두려움을 품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그 당파싸움의 결과 서인과 동인에서 각각 한명씩 정사와 부사를 통신사로 보낸 것이 아니던가.
전쟁 가능성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통신사의 임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왜인들의 터전이 협소하여 물산이 풍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죽이나 없이 살았으면 그릇마저 이렇게 작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인구가 적을 수 밖에요."
"...사대부가 고작 식사에 관심을 두는 건 부끄러운 일이나, 상차림만 봐도 이들에겐 모든 게 부족하다는 건 사실인것 같으이."
밥에 진심인 대식의 민족이 조선인들이다. 그런 조선인 통신사에게 일본식의 쥐꼬리만한 음식을 내주었으니, 아무리 멋드러지게 치장을 해 놨다고 해서 좋게 평가할 리 없었다.
명과 조선을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적어도 먹는 것 만큼은 조선식의 대식 문화를 당연시하던 두 관료가 생각하기에, 일본은 식사량만 봐도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나라였다.
거기에 일본 측에서 고의로 정보를 조작한 것도 그런 판단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내심 조선을 정벌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히데요시에게 정복전쟁 대상인 조선이 자신을 두려워 경계하고 미리 방비하게 하는 것은 전쟁을 어렵게 만들어 버려 바람직하지 않았으니까.
"역시 왜인들은 아국을 침공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 정보공작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김성일은 일본의 침공이 불가능하다 단언했다. 물론 그의 당파인 동인의 당론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백성을 곤궁하게 만드는 전쟁 준비는 불가하다!"
전쟁에 준비하려면 백성들, 특히나 인력과 재물을 대야 할 사대부들의 반발이 극심한데, 그런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기 위한 의도였고 그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기축옥사(정여립의 난)로 서인에게 완패에 가까운 정치적 타격을 입은 동인들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건 전쟁준비를 원하지 않는 지방 사림들의 지지를 받았던 덕분이니까.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와서 당론을 바꾸기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당론의 연장에서 나온 것이 방금 김성일의 발언이었다.
물론 서인의 입장은 역시 달랐고, 서인인 황윤길은 김성일의 발언에 동조할 수 없었다.
"...허나 내 생각엔 저들의 본토라 할 수 있는 본주(혼슈)에 가 보지도 않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고 보네."
서인이라고 딱히 선견지명이나 혜안이 있어서 전쟁을 준비하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조정의 여당이 되어 집권중인 서인 입장에선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조정의 권한이 커진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전쟁 준비를 한다는 명분으로 인력과 재물을 수도에 집결시키면 그 자원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겠는가? 당연히 여당인 서인의 차지였다.
벼슬을 하지 못해 한양 저잣거리를 전전하고 있는 당여들에게 조금의 녹봉이라도 나오는 임시직이라도 쥐어줄 수 있고, 조정에서 인력을 더 충원하면 서인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골라 뽑을 수 있는 것이니 세를 확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동인과 서인은,
한쪽은 평화를 바라는 지방 지주들의 여론을 얻기 위해 평화를 진실로 포장해야 했고,
다른 한쪽은 집권당으로서 더욱 세를 불리는 데 이익이 되도록 남풍(南風)을 최대한 위협적으로 과장해야 했다.
"..."
"..."
두 통신사 사이에 흐르는 적막은 두 당론 사이의 괴리를 보여주느 것 같았으며,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두 세력이 모여있는 조선 조정의 작태를 보여주는 축소판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한쪽이 생각하는 평화는 진실이 아니며, 다른 한쪽이 최대한 과장되게 그려내려 하는 남풍은,
진짜 조선에 닥쳐올 폭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