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5세와 바다(1)
- 내가 하는 마뤼 이해가 되늬??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니??
"네."
- 방굼 내가 모라고 했는데?
"매일 일 끝나고 퇴근하면 유민이랑 놀아주느라 자기 시간을 못 갖는다면서요. 그래서 술 마실 시간이 없었는데 저랑 이렇게라도 마실 수 있어서 기분이 좀 나아진다. 라고 했잖아요."
- 그래, 그래! 잘 듣고 있눼.
".... 잘 듣고 있는 게 아니라 5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 그걸 까먹겠냐고."
- 무어?
"아닙니다."
최근 들어 가장 후회하는 일이 지금 막 생겼다.
내 앞에서 맥주를 4캔째 따고 있던, 저 인간의 손놀림을 막아야만 했다.
초반에는 의외로 맨 정신이었다.
다짜고짜 여행 내내 술 친구를 해달라길래 지레 겁을 먹었지만, 그건 그냥 장난 삼아 뱉은 말이었다.
안주로 사온 닭강정도 하나씩 주워먹고, 정답게 하하호호 이야기 나누며.
사제 간의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다 장사를 시작하게 됐는지.
윤슬이랑 같이 지내면서 힘든 점은 없는지.
경제적으로 별 문제는 없는지.
어른스러운 몸짓과 말투로 여러 가지를 물어봐주셔서 감동받기도 했다.
여전히 나를 제자로 여기고 챙겨주시는구나!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께 요즘 힘든 일이 없는지 여쭤봤다. 거기서부터가 문제였다.
갑자기 맥주를 연거푸 들이마시더니 눈이 풀리는 것이 아닌가.
- 이 선샌님은 매일 매이리 힘들다구!!
애들이 자고 있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급발진하는 자동차처럼 목청을 높였다.
윤슬이나 유민이보다도 어눌해진 발음.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
흐트러진 옷가지.
그제야 선생님이 앉아계시던 의자 밑에 찌그러진 맥주 캔이 2개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맥주 한 캔도 다 마시기도 힘들다던 양반이 저렇게 알코올을 때려부으니 취할 만도 하다.
"김미정씨, 이제 그만 주무시죠."
- 안 대여... 안 잘 껀데.
"어허이, 빨리. 내일도 나가서 놀아야 되는데 지금 이렇게 진탕 마시면 어쩌려고 그러시나?"
- 지금 아니면 언제 마쎠!! 나 지쨔 오랜만에 술 마시는 거라는 마리야!
"내일도 같이 마셔줄 테니까 오늘은 자자. 알겠지?"
- 지쨔? 약쏙이야?
"응, 그러니까 제발 주무세요, 이 인간아."
- 우후! 주혀니 체고~!
극적으로 유아퇴행한 삼십대 중반, 김미정씨는 그대로 아이들이 자고 있던 침대에 직행했다.
킹 사이즈 침대라 셋이 누워 있어도 넉넉했으나 술 냄새가 조금 날 것 같다.
애들을 어디다 옮겨줘야 되나 싶다.
그리고.
"정리하는 건, 자연스레 내 몫이라 이거죠."
그다지 어질러지진 않았으나 남아있는 닭강정을 잘 보관해두거나, 테이블에 흘린 찌끄레기들을 닦아내거나,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
3박4일 동안 이곳에 머무는데 방치해두었다가는 냄새가 장난 아닐 테니까.
부스럭부스럭-
슥삭슥삭-
정리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평소에 하던 일이 이런 일이고.
또, 마음 한 켠이 은근히 들떠있었기에 손이 알아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 스물다섯 송주현은 이래 봬도 당하고만 사는 남자는 아니다.
"흐흐."
자신도 모르게 음흉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스마트폰을 꺼내어 녹화된 동영상을 재생해본다.
- 지금 아니면 언제 마쎠!! 나 지쨔 오랜만에 술 마시는 거라는 마리야!
- 지쨔? 약쏙이야?
- 우후! 주혀니 체고~!
김미정씨의 부끄러운 어록이 낱낱이 녹음되어 있다.
취객처럼 몸이 흔들거리는 것까지 정확하게 찍혀 있어, 만약 이걸 당사자가 본다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채, 이불킥. 아니 이불킥 정도가 아니라 이불수플렉스까지 들어가겠지."
리조트 직원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이 객실의 이불 한 장이 너덜너덜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과실을 따지자면 나보단 저 선생님에게 있겠지.
부웅-
핸드폰이 울린다.
[달님: ㅋㅋ 사탄도 무릎을 탁! 치고 가겠군요.]
오누이는 가끔 내 일상을 관찰하다가 이렇게 고개를 들이밀 때가 있다.
그런데 달님이가 사탄 얘기를 꺼내니까 기묘한 생각이 든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도 존재한다면 사탄도 진짜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만약 그렇다면 조금 신기할 것 같다.
"양치나 하러 갈까?"
내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술 냄새가 그대로 풍기면 애들도 싫어할 테니까 나라도 씻고 잠들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포옥-
하고 허벅지 뒤쪽에 뭔가가 부드럽게 감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아가씨가 일어나셨어요?"
- 우웅... 아저찌 인나써.
아가씨를 아저씨라고 들은 걸 보니, 잠에 취한 게 분명하다.
"오빠가 너무 시끄럽게 해서 잠에서 깨버렸어?"
"아니에여."
아니라면서 윤슬이는 자기 배꼽을 조심스레 툭툭 내리친다.
"배가 고파서 일어났구나?"
끄덕끄덕.
알아줘서 기쁘다는 듯이 허벅지에 다시 얼굴을 부비부비거린다.
윤슬이는 잠에서 깨고 나면 5분 정도 애교쟁이가 되어버릴 때가 있다.
특히 푹 자고 일어난 상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럼 저거 닭강정..."
남아있는 닭강정을 윤슬이한테 먹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밤도 깊었고, 생각보다 매운 맛이 강했다.
이렇게 늦은 밤에 매운 음식을 먹었다가는 속을 다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다.
"윤슬이 저기 테이블에 잠깐 앉아있을까? 오빠가 금방 하나 요리해줄게. 대신 많이는 말고 쪼금만 먹고 다시 자자. 밤 늦었으니까."
"알게써."
어느새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윤슬이는 뽈뽈뽈- 작은 걸음으로 테이블 의자까지 다가가 털썩하고 주저앉는다.
다리가 짧은 의자여서 5세도 무리 없이 앉을 수 있다.
그대로 냉장고를 열어보니.
수박과 사이다, 우유 그리고 남은 맥주 1캔.
정도밖엔 없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화채... 나 만들어야지."
수박은 아까 바다에서 먹다가 남은 것이고, 사이다는 닭강정에 딸려온 작은 캔.
그리고 우유는 내일 아침에 선생님이 마시겠다며 사두신 거다. 애들이 우선이니까 우선 우유를 사용하고 내일 아침에 한 팩 더 사오기로 한다.
가져온 플라스틱 용기를 잘 씻어, 그곳에 수박을 담고 숟가락으로 적당하게 자른다.
그리고 우유와 사이다를 투하.
설탕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데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우유랑 사이다의 비율을 1.2:1 정도로 맞추고 화채를 만들어보았지만.
"비주얼이 그닥인데."
섞여 있는 게 수박이랑 우유, 사이다뿐이니 볼품 없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객실이 늘어선 복도에 세워진 자판기 하나가 떠오른다. 복도 중앙에 간식이 잔뜩 채워진 자판기가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우리 객실 바로 앞에 있다.
"윤슬아, 오빠 잠깐만 요 앞까지 나갔다 올게."
"움? 윤스리두 가치 가."
윤슬이가 쫄래쫄래 따라나온다.
객실에 있다가 문을 열어달라 부탁하려 했는데 말이다. 그냥 방 문을 열어둔 채로 자판기까지 나간다.
그리고 하나 구매한 것은 과일향이 다량 첨가된 젤리!
"윤스리 간식?"
"아니, 이걸로 화채에 넣을 거야."
곧장 방으로 돌아와 과일 젤리를 뜯는다.
화채에 몽땅 넣어버렸다.
젤리의 디자인이 과일 모양이다보니 화채에 넣었을 때 비주얼이 어울린다.
한 입 시험 삼아 맛 보니까.
"음... 애들 입맛이군."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요리 같진 않고, 간식 같았다. 그래도 밤 늦게 하는 군것질이니까 이 정도면 합격점이다.
"그러문 윤스리 입마시겠군..."
윤스리가 내 말을 그대로 받아서 따라했다가.
"아, 앗! 아니야, 윤스리 애기 아니거둔!"
덜컥 화를 낸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다.
윤슬이랑 같이 먹기 위해서 테이블에 내려놓던 찰나.
또 다른 꼬맹이가 뽈뽈- 하고 걸어나온다.
그리고 왠 걸?
윤슬이가 그랬던 것처럼 내 다리에 폭- 하고 안긴다.
- 엄마 나 일어나써...
"엄마 아니고 형아야."
- 으응?
유민이는 나와 눈을 3초 정도 마주치더니 빛의 속도로 백스텝을 밟는다.
- 헤, 헷갈려쪄!
어디서 많이 들었던 대사다.
윤슬이한테 옮은 걸까.
"유미니라두 옵바는 허락 못하눈데..."
윤슬이가 화채를 먹으려고 들었던 숟가락을 내려두고는 내 바지자락을 잡는다.
유민이한테 곁눈질한다.
- 으앗, 그게 아닌데.
유민이가 주눅이 든 표정으로 몸을 움츠린다.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럴 땐 먹을 걸로 상황을 정리하는 게 베스트다.
"유민이도 화채 같이 먹자. 배고프지?"
- 응... 배고파여.
"그럼 유미니두 여기 앉어. 가치 먹자."
윤슬이가 자기 옆자리를 팡팡 두드린다.
그 모습을 보고 유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착석한다.
우리 식당 요리에 비하면 엉성하게 만들어진 화채.
셋이서 오순도순 먹으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단 맛이 강해서 간식 느낌이 강했지만 밤중에 군것질하는 느낌으로 먹어치우니 잠이 쏟아졌다.
화채를 비우고, 양치를 한 뒤 이제 잠자리에 들려는데.
유민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불러세운다.
- 형아...
"왜 그래?"
- 같이 자면 안 대죠?
"안 될 건 없는데. 왜 갑자기?"
유민이는 손을 살랑살랑 젓는다.
귀를 빌려달라는 뜻이었다.
유민이한테 가까이 다가갔더니 작게 속삭인다.
- 엄마한테서 술냄시 나여.
"아아... 술 냄새."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 깨지 않고 쭉 잤다면 몰랐겠지만 지금 다시 선생님과 한 침대에서 자려고 하면 꽤 고역일 것이다.
양치를 하지 않고, 바로 드러누웠기에 주로 입가에서 풍기겠지.
"옵바, 그러문 우리 셋이서 가치 자자."
"그렇게 하자. 그럼 우리 셋이서 오늘은 2층에서 잘까?"
- 응!!
그렇게 리조트에서 묵은 첫날 밤은 셋이서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워낙 꼬맹이들이라 불편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침대가 킹 사이즈고, 유민이는 잠버릇도 없어 오히려 평소에 자는 것보다 쾌적할 정도였다.
**
다음날.
아침은 예견된 장면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가차 없이 선생님께 어젯밤 땃땃하게 생성하신 흑역사의 한 장면을 관람시켜드렸고.
김미정 선생님은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유연한 허리를 자랑하셨다.
이불을 끌어안고 거의 레슬링을 하시던데 우린 그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차를 끌고 나가려면 선생님의 취기가 가셔야 했고, 조식은 리조트 지하에 구비된 시설에서 먹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맛이어서 모두 만족했다.
- 후, 이제 운전할 만하겠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김미정 선생님의 정신력이 회복되어서 목적지로 향했다.
내가 운전을 해도 불법은 아니었지만 장롱면허였던 기간이 길어 불안했기에 그닥 좋지 못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우리가 점심 식사를 해결할 목적지는, 엊그제 택시 기사에게 추천받았던 맛집이다.
"물꼬기 머그러 간다!"
윤슬이는 차 안에서부터 기대감을 낙낙히 가슴 속에 품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