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가로운 오후였다. 변수는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카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을 것이다.
달칵.
현 황제인 루이스는 눈앞에 찻잔을 두는 히나를 자세히 관찰했다.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어딘가 찝찝했던 새 시녀의 행동이 무척이나 걸렸다.
몇 번이고 서신을 보내 일에 능숙하고 더 나은 시녀로 바꿔주겠다고 했지만 카신은 매번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그는 히나가 정말 어리숙한 시녀인 건지, 아니면 제 불안한 감이 맞는 건지 직접 확인하러 올 수밖에 없었다.
“폐하께서 누추한 이곳까지 행차하시다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카신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잔뜩 꼬여 있는 카신의 말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제 일과를 방해한 루이스를 은근히 힐난하고 있었다.
“위대하신 우리 대마법사님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루이스가 우아한 손짓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고풍스런 찻잔을 들었다. 코끝에 맴도는 향긋한 향을 맡을 뿐, 그는 찻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루이스는 의심이 가는 시녀의 차는 당연 마시지 않았다. 특히나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듣기 위해 저도 모르게 미간까지 찌푸리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시녀의 차는 절대 사절이었다.
직접 와서 보니 무척이나 수상했다. 귀찮은 걸 싫어하고 남의 시선조차도 닿는 걸 꺼려 하는 카신이 왜 계속 옆에 두나 싶을 정도로 새로운 시녀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대는 내게 숨기는 것이 있나 봐.”
“숨기는 것이라니요.”
쨍그랑.
능구렁이처럼 모른 척하는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바닥에 찻잔을 떨어뜨렸다. 황제가 고의적으로 떨어뜨린 찻잔이 깨지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히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대화를 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라네, 카신.”
루이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자리만 꿰차고 있는 무늬만 황제도 아니다.
이십여 년 동안 황태자의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위협을 받아왔고, 몇 번이고 잃을 뻔한 목숨을 지켜왔다. 타고난 감도 좋았지만, 누구보다도 촉이 발달되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였다.
당장 히나를 고문하여 그녀의 뒤에 있는 배후까지 전부 끌어낼 생각이었다. 여자라고 봐주는 어리석은 짓은 전혀 할 생각이 없다.
“폐하와 할 얘기가 있다. 자리를 피해주지 않으련?”
루이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카신은 부드러운 어조로 히나에게 명령했다.
“네.”
고개를 푹 숙이고 물러나는 히나의 뒷모습을 루이스가 뚫어지게 쳐다봤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는 히나는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녀라고 하기에도, 첩자라고 하기에도 심하게 어리숙했다.
“자네 시녀는 오늘 휴가가 아니었던가?”
“휴가를 반납하라 했습니다. 대신 다른 보수를 주기로 했지요.”
휴가를 반납한 이유도, 그 보수가 뭔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겉도는 대화가 짜증 났는지 루이스는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그대가 모를 리 없지.”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카신이 자연스레 히나가 두고 간 차를 마셨다. 일부러 보란 듯이 시녀가 타준 차를 마시는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상한 시녀가 타준 차가 전혀 의심스럽지 않다는 걸 굳이 보여주는 그의 행동이 슬슬 거슬렸다.
독이 통하지 않는 몸이라서 그런가?
원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이번엔 카신의 의중이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저 여자는 짐이 데려가겠네.”
“저와 척을 지시겠다는 거라면 그리하십시오, 폐하.”
단호한 어조에 루이스는 미간을 구겼다.
“지금 저 시녀 하나 때문에 나와 척을 지겠다고? 자네가?”
루이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카신은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황궁이 무너지더라도 따로 부탁하지 않으면 그대로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지켜볼 사람이 카신이었다. 사람이 앞에서 억울하게 죽어 나가도, 눈물을 흘리며 애걸복걸해도 그는 자신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시녀 한 명을 데려가는 일이었다. 사람과 엮이는 것을 싫어하여 시녀 한 명을 제외하고 별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보낸 그는 당연히 신경을 쓰지 않아야 했다. 귀찮은데 잘됐다며 어서 데려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작은 불씨는 꺼트려야겠네.”
지금은 작은 씨앗이라고 해도 나중에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다. 히나는 어수룩하기 그지없지만 그녀를 이곳까지 집어넣은 집단은 절대 작거나 별 볼 일 없지 않을 것이다. 그 싹을 당장 없애야 했다.
탁.
루이스가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하자 카신이 테이블 위에 찻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웬만한 일에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카신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보였다.
“작은 불씨가 꺼지거나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큰 불씨는 모두 꺼트리겠습니다.”
딱 봐도 시녀는 어릴 때부터 정식적으로 교육을 받거나 조직 내에서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쓰다 버릴 패.
많은 걸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혹 수상한 시녀가 맡은 임무를 수행한다고 해도 입막음을 위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폐하께서는 현명하신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카신은 지금 시녀의 미래에 가해질 모든 위협을 막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설사 그 위협이 첩자를 잡아 뿌리까지 뽑으려는 황제라고 해도.
“저 여자가 무엇이기에?”
황제를 마주한 히나가 잔뜩 겁을 먹고 긴장했으면서도 어떤 대화를 나눌지 염탐하려던 걸 떠올리며 카신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는 제 시녀입니다.”
루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체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오늘따라 더 유별나게 구는 카신에게 답을 듣기 힘들 거란 판단이 들었다.
“허허, 황제인 나보다도 일개 시녀의 목숨 따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셈인가?”
“일개 시녀의 목숨 따위라…….”
카신의 눈이 위험하게 변했다. 루이스는 카신의 위험스런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 전 필요하다면 황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다기보다 정말로 그럴까 봐 조마조마했다. 겉으로 그 불안감을 표현하진 않았지만, 카신이 원한다면 황제를 바꾸는 건 일도 아니란 걸 루이스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나라 하나를 새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마법사였다. 아무런 욕심도, 의욕도 없어 황궁에서 편히 생활하는 값으로 대대로 황제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약속해 주게. 저 시녀로 인해 내가 위험할 상황은 없을 거라고.”
루이스는 두려움 가득한 속내를 숨기며 태연히 말했다.
대제국이라 칭송받는 나라의 황제로서 편하고 무난한 일생을 보내려면 카신과 무조건 손을 잡아야 했다.
반역자가 넘친다고 하더라도 카신이 있으면 황권을 지키고 나라를 부흥하게 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갑자기 망해 버린다고 해도 카신만 있다면 나라 따위, 얼마든지 다시 재구축할 수 있었다.
나라를 유지하는 것에 비하면 ‘카신의 세계’는 무척 소박했다. 미리 그에게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은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었다.
“잘 보이셔야 할 겁니다. 제 시녀는 낯을 많이 가리니까요.”
이번엔 루이스도 자존심이 상했다. 첩자일 확률이 다분한 시녀를 그냥 두는 것도 찝찝한데, 그렇게 만든 카신에게 안전에 대한 답도 듣지 못했다.
거기다 한낱 시녀에게 잘 보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상대가 카신만 아니었다면 편히 죽이지 않았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고 서운하기만 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황제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나들며 온갖 눈치는 다 배웠다. 어쩌면 터무니없게도 시녀의 마음에 들지 않아 황위가 위태로울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잘못 보여봤자 이로울 건 없었다. 이왕이면 카신과 죽을 때까지 손을 잡으며 선대 황제들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싶었다.
“이만 가보겠네.”
황제가 줄을 탄다는 건 웃기는 일이었지만, 루이스는 제국의 번창과 안전을 위해 카신이 필요했다. 그가 다른 나라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도 황실에 대한 오랜 정으로 카신은 수많은 위기와 위험에서 대대로 황제와 제국을 지켜주었다. 절대 해를 가하진 않을 것이다.
문을 열고 나오자 작은 체구에 앳되어 보이는 시녀가 보였다. 커다란 눈동자엔 궁금증이 가득했다.
‘도대체 이 시녀가 무엇이기에?’
루이스는 걸음까지 멈추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히나를 쭉 훑었다.
‘혹시…… 애완동물?’
인간을 애완동물로 취급하는 건 웃기는 일이지만 카신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애초에 루이스는 카신이 인간을 벌레 취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 하나가 덜떨어지고 부족해서 더 손이 가는 애완동물.
루이스는 자신이 내린 답에 혼자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긍했다. 인간이긴 하지만 카신이라면 강아지 같은 눈망울과 통통한 볼을 가진 시녀를 나름대로 귀여운 애완동물로 볼 수도 있을 거라고.
“폐하께 청이 있습니다만.”
느긋한 걸음으로 배웅을 나오던 카신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앞서가던 루이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청이 있다고 말을 꺼냈으면서도 고민하는 건지 카신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뱉으며 행동하는 대마법사답지 않았다.
“말해보게.”
“이제 마법으로 별궁을 관리하는 일이 지겹군요. 사람을 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솜씨가 좋은 요리사도.”
“자네가? 자네 별궁에?”
“그럼 폐하가 계신 본궁의 시종을 더 늘려달라는 부탁이겠습니까?”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에 삐쭉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카신은 자신의 입으로 이런 청을 하는 것 자체가 불만스러웠다.
단둘이 있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히나는 쓸데없이 성실했다. 손님도 오지 않는, 마법으로 항상 깨끗한 커다란 별궁을 혼자 이곳저곳 청소하느라 필요 이상으로 바빴다.
“특히 요리사의 솜씨는 아주 좋았으면 합니다.”
둘만 있는 공간이 아니게 되어 아쉽겠지만 히나와 편한 생활을 지속하려면 시종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별궁 안의 요리사가 있다면 막 만든 따뜻한 음식을 히나에게 먹일 수도 있다. 마법을 쓰면 전부 해결이 되겠지만, 히나의 앞에서는 적어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
“의외로군. 시끄러운 건 싫다고 하지 않았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조금 시끄러운 건 기꺼이 참을 수 있습니다.”
단둘이 있는 시간은 만들면 된다. 그걸 고민하는 시간도 꽤나 즐거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