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8화 (8/128)

#8.

고요하기만 했던 성이 북적거렸다. 황제가 다녀가고 다음 날, 수십 명의 시녀와 시종들이 들이닥쳤다. 요리사와 정원사까지 왔다. 분주해진 별궁을 보며 히나의 얼굴은 시무룩해졌다.

“하아.”

카신의 방을 염탐하고, 대마법서를 훔치려면 혼자인 것이 편했다. 아무도 없는 별궁에 홀로 있는 것이 외롭긴 해도 처음부터 혼자였다. 이 정도는 익숙하니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진 이상 움직이는 것에도 제약이 붙었다. 이제부터는 더 조심히, 신중히 행동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기회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지…….”

시녀들 사이에도 서열이 있었다. 차를 타고 내드리는 건 서열이 높고 일을 잘하는 시녀가 하는 일이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신분도 천한 그녀는 이제 카신의 곁에 가지도 못하고 별궁 구석구석 청소만 하게 되리라. 어쩌면 능숙한 다른 시녀들한테 밀려 아예 쫓겨날 수도 있다.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까…….”

이번 임무는 히나에게 아주 중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을 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성이 보이던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자 울적해졌다.

똑똑.

“누, 누구세요?”

“카신 님께서 찾으세요. 차를 가져다 달라고…….”

“네? 아, 네!”

벌떡 일어난 히나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제, 제가 차를 타나요?”

“대마법사님께서 저희에게는 절대 차를 올리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차를 맛있게 타지도, 시중을 잘 들지도 못했다. 일 잘하고 능숙한 시녀가 워낙 많이 왔기 때문에 히나는 당연히 그 일은 다른 시녀가 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더욱이 오래 일한 시녀들을 제치고 나갈 수는 없어 당연히 차를 타러 나가지 않았다.

“서두르셔야 해요. 시간이 다 됐습니다.”

“네, 네!”

벌떡 일어나 차를 준비한 히나는 조심스레 카신의 방에 들어갔다. 항상 약물을 들고 있거나 책을 읽던 그가 오늘은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날씨가 좋구나.”

히나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있나 싶었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 그러네요.”

“쉬는 날엔 뭘 하려고 했었지?”

가장 먼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먹을 물과 식량을 몰래 사 오려고 했다. 두 번째로는 나가는 김에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다고 보고를 할까 생각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엔 필요한 시녀 일을 하며 받은 돈으로 평소에 갖고 싶었던 걸 사려고 했다.

“마을에 나가서 필요한 걸 사려고 했어요.”

첫 번째, 두 번째 계획을 말할 순 없으니 히나는 마지막 계획만 말했다. 스파이로 있으며 거짓말을 하는 것도 미안한 판에 더는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럼 나갈 준비를 하자꾸나.”

“네?”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 나갈 계획이란다. 넌 내 옆을 따라다니면서 사고 싶은 걸 사면 되겠지.”

“외출을 하시는 건가요?”

“내가 나가는 것이 그리도 이상한가?”

한 번도 대마법사가 외출을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받은 정보에도, 이곳에서 시녀 교육을 받을 때도 듣지 못했다.

‘하긴, 그도 사람인데 나갈 수도 있지.’

사람이 밖을 나가는 건 당연한 거였다. 대마법사의 얼굴이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그런 정보가 없었던 걸 수도 있는데,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결정지어 버렸다. 괜스레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은 것이 미안해졌다.

“아, 아니요! 어서 준비할게요!”

조그만 방으로 돌아온 히나는 낡은 망토 하나를 걸치고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멨다. 아직 봉급을 받지 않아 돈은 많이 없었지만, 들어오기 전까지 모아놓은 용돈도 있었다. 곧 봉급을 받을 테니, 아끼지 말고 적당히 사고 싶은 걸 사도 될 것 같았다.

“카, 카신 님?”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신이 보였다.

또다. 또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카신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히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카신은 말간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꼭 껴안아보고 싶다. 낯설기만 한 이 감정이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을 잃고 히나를 확 덮쳐 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중증이군.’

갈수록 히나에게 시선이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꽤 생소했다. 즐겁기도 했다.

준비된 마차를 타고 황궁을 벗어나자 카신은 히나만 옆에 두고 모두 마을 앞에서 기다리게 했다. 눈에 띄는 걸 싫어하기도 했거니와 히나와 단둘이 걷고 싶어서였다.

시녀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히나가 반걸음 뒤따라오는 것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래도 같이 길을 걷는 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 필요한 걸 사러 가도 좋아.”

“하지만 저는 카신 님 옆에 붙어 있어야 해요.”

“그럴 필요 없다. 너라면 어디에 있던 한눈에 찾아볼 수 있단다.”

히나의 얼굴이 괜스레 붉어졌다. 별다른 뜻이 없는 말일 텐데, 이상하게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네 휴가를 빼앗은 대신 자유 시간을 주마. 갔다 오렴.”

“정말요?”

“그럼.”

잠시 망설이던 히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잠깐 돌아보자 카신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깊숙이 들어온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가긴 가야 하는데…….”

자주 오지는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들어가 카신의 환심을 샀다고 보고를 해야 했다.

고용인들이 갑자기 많이 생겼지만, 그 안에서 직접 카신에게 차를 내어줄 수 있다. 휴가를 반납하는 대신 궁금한 걸 하나씩 알려준다. 이런 상황들을 말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답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계속 휴가를 반납하면 언제 또 나올지 몰라. 그러니까 위험하더라도 갈 수 있을 때 가자.”

카신과 같이 외출한 거라 꺼려졌지만, 병사들은 모두 마을 입구 앞에 두고 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카신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오랜 시간 보고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히나는 미로 같은 시장 뒷골목을 뛰다시피 걸었다.

똑. 똑똑똑. 똑똑.

골목 사이,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주점 앞에 다다른 히나는 암호대로 노크를 했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노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문을 살짝 열고 히나를 확인하자마자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비밀 통로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폐허처럼 보이는 주점 안은 먼지가 가득했다. 손으로 코를 가린 채 그녀는 자연스레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 구석에 비어 있는 벽을 밀자 숨겨진 문이 열리며 지하 계단이 이어졌다.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자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들키진 않았겠지?”

“네. 걱정 마세요.”

마침 와 있던 풀토 공작이 히나를 훑으며 물었다.

풀토 공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반황제파의 귀족 세력이 모인 곳이었다. 이 지하도는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어 풀토 공작의 집과도 이어져 있었다.

“진전은?”

“아직 없습니다. 그래도 대마법사는 저한테 호감을 보이고 있어요. 오늘 새로운 시녀와 시종들이 잔뜩 왔는데도 제게 특별 대우를 해주셨어요.”

“옆에서 보니 어떻더냐? 수상한 책을 읽는다든가, 특이한 걸 먹는다든가 그런 건 없었나?”

“책은 읽는데 수상한 건 아니었습니다. 뭘 먹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하루에 차 세 잔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먹지 않을 때가 많아요.”

히나는 이제껏 보고 느낀 카신에 대한 보고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황제가 왔다 간 얘기까지 전부 말하자 풀토 공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황제는 계속 대마법사를 만나고 있었군.”

자주는 아니지만 황제는 주기적으로 대마법사를 찾았다. 대마법사의 별궁 주변은 마법이 걸려 있어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철통 보안에 둘러쌓인 황제의 뒤를 겨우 밟아 알아낸 정보였다.

고민에 빠진 풀토 공작을 보던 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라리 대마법사님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는 게 낫지 않나요? 황제 폐하는 모르겠지만, 대마법사님은 좋은 분인 것 같…….”

“멍청한 것!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지금 이 제국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건 바로 황제 옆에 몇백 년이고 붙어 있는 그 돌연변이 마법사란 말이다! 황제보다도 더 먼저 죽여야 될 놈이야! 만약 대마법서를 훔치지 못한다면 황제나 마법사나 둘 중 한 명은 꼭 죽어야 해!”

어릴 때부터 히나는 황제의 독재와 횡포로 이 제국이 망해가고 있다는 걸 들어왔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가난하고 배고픈 마을에서 살며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죄송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풀토 공작은 전부 황제가 사치를 부려 이리된 거라고 했고, 히나는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히나는 가난한 마을에서 항상 배를 곯고 아무것도 먹질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황제를 원망하고 또 원망해 왔다. 풀토 공작이 마을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어서 그런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겉보기와는 다른 거로군요. 이 임무, 공작님께 은혜를 갚는 걸 떠나서 제국을 위해 꼭 수행하겠습니다!”

시무룩해진 히나의 얼굴에 단호한 결단의 기색이 보이자 풀토 공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때 줍길 잘했어.’

멍청한 구석이 있어도 성실하기 짝이 없는 히나는 비밀을 누설하지도 않고, 시키는 일은 꼭 했다. 그녀는 가족도 없고,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하고 있으니 대마법사의 밑에 들어가 정보를 캐내기에 딱 적합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어쩌면 이것이 정말 성공할지도 모르겠어.’

풀토 공작은 히나 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