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카신은 히나에게 표식을 해두었다. 그래서 딱히 보고 있지 않아도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히나의 뒤를 좇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히나의 기운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성에 가둬 버릴까.’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밖으로 나도는 히나를 신경 쓰지 않으면 귀찮을 일도 없어지겠지만, 앞으로 그녀가 나갈 때마다 일일이 따라다니리라. 오늘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앞날이 훤했다.
‘기억을 지우면 가둘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사람의 기억을 조작하거나 마음을 억지로 변화시켜서 좋았던 결말은 거의 없었다.
마법은 적당히 부리는 것이 좋았다. 아무리 완벽한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일이 항상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자연스럽게 빼오는 것이 좋겠지.’
그에겐 마법 서적이 있지도 않았고, 따로 특이한 연구를 하지도 않았다. 있다고 한들 감출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히나가 뭘 알아내든 그가 마음만 먹으면 루이스의 걱정처럼 딱히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다.
설사 대마법서가 있어 적에게 넘어간다고 한들, 수천 년간의 경험과 지식을 쌓은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히나를 완전히 소유하려면 그래야겠지.’
지루했다.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히나가 없는 지금 지루해서 미칠 것 같았다.
최근 히나로 인해 심심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서 그런지 갑자기 못 견딜 정도로 지루함이 몰려왔다.
‘역시 그녀가 꼭 필요해.’
필요하다. 필요하다고 인식을 하니, 갚고 싶어졌다.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끓어올랐다. 눈앞에서 없어지니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때 봤던 노부부처럼, 히나가 소소함에서 일어나는 행복을 제게 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확신은 하지만, 그도 미래를 예견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의 흥미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빛, 계속 걸려.’
그때의 영롱한 빛은 그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가끔 생각이 나는 그 빛을 다시 보고 싶었다.
‘일단 배후의 본거지를 대충이라도 알아내 볼까.’
많은 인파를 제치며 걷는 카신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딱히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는 그는 황궁에 오기 전까지 한가로이 사막을 찾아 걸었다. 아늑함마저 느껴지는 그 고요함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시장 골목을 자의로 걷고 있다는 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기했다. 불쾌감이 들었지만, 카신은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히나에게 거의 가까이 왔을 때였다. 그나마 사람이 뜸해지는 시장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즘이었다. 카신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딸랑.
문을 열자 맑은 음색의 종소리가 들렸다. 낡은 상점 안에서 종이 특유의 냄새가 풍겨왔다. 오래됐지만 고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괜찮은 가게였다. 책장에 얇고 두꺼운 책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주인이 일어나 그에게 물었다.
주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카신은 가장 구석에 있는 낡고 두꺼운 책을 꺼냈다.
붉은색 가죽으로 된 책엔 자물쇠까지 걸려 있었다. 그럴듯해 보이는 책의 겉모습에 카신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하지.”
가격 따위는 물어보지도 않고 카신은 금화 다섯 닢을 놓아두고 돌아섰다. 감사하다며 연거푸 인사를 건네는 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밖으로 나오자 마침 좁은 골목에서 히나가 튀어나왔다. 카신은 히나가 보기 전에 책을 재빨리 소매 속에 숨겼다.
“카, 카신 님? 어째서 여기에…….”
“걷다 보니 시장 끝이구나. 필요한 것은 샀느냐?”
“아, 아니요! 어느 게 싸고 좋은지 한 바퀴 둘러보던 참이었어요!”
카신에겐 귀여움이 돋보이는 주옥같은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봐둔 물건은?”
히나는 난감함에 그의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발끝으로 애꿎은 바닥만 툭툭 쳤다.
이렇게 빨리 카신을 만날 줄 몰랐다. 혹여 들킬까 싶어 빨리 나오긴 했지만, 아직 시장을 둘러보지 못했다.
“없으면 가지. 바깥 공기는 이쯤 쐬면 됐으니.”
원래라면 히나가 원하는 걸 사게 하고,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할 때까지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잠시 떨어진 그녀에게 집착하게 될 것을 몰랐던 때엔 말이다.
카신의 눈이 그녀가 나온 골목에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미련이 남았지만, 지금은 이 시끄러운 곳을 당장 떠나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배후를 당장 찾아내는 것을 과감히 포기했다.
“돌아가자꾸나.”
당장 히나를 데리고 성으로 가고 싶었다. 북적한 이곳에 더 오래 있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하고 살았다. 오랜 시간 이기적인 삶을 살았던 카신에게 더 이상의 인내심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장소를 대충 알아냈으니, 다음에 시간이 있을 때 더 자세히 알아보면 되리라.
다시 이곳에 와야 한다는 것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다음에 왔을 땐 그녀에 맞춰 더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히나는 중간 보고를 하거나 목적을 이루면 이곳에 다시 오게 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그때 해결해도 충분했다.
‘이 시녀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
모든 건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래야 일을 그르치지 않으리라. 다행히 히나는 카신을 적으로 인식하고 증오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경계를 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 정도는 언제든 허물어뜨릴 수 있었다.
“아, 아직…….”
아무것도 사지 못했는데.
히나는 입을 다물며 뒷말을 삼켰다. 이제껏 무엇을 한 거냐고 물을까 봐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피곤하군.”
그런 그녀를 알고서도 카신은 모른 척 히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놀란 히나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주변엔 형형한 색의 빛이 일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란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며 히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아, 아…….”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히나를 내려다보며 카신은 그녀의 어깨를 더 꼭 감쌌다. 이렇게까지 잡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품에 들어오는 히나의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와 닿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더 보드랍고 좋았다. 짜증스러웠던 마음이 한결 풀렸다.
“어, 어?”
주변이 순식간에 일그러지자 히나는 멍하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꿈이라도 꾼 것처럼 주변은 고요했다.
“여, 여긴…….”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책상과 어지러운 기구들. 코끝에 느껴지는 약품 냄새와 고풍스런 가구.
북적거리는 시장이 아닌, 조용한 그의 연구실을 보며 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작게 벌렸다.
“오래간만의 외출이 힘이 들지 않았나 싶어서. 마법은 편리하라고 쓰는 거니까 말이다.”
단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카신은 뻔뻔한 얼굴로 히나를 걱정하는 척했다.
시끄러운 것도 싫었지만, 사람들이 부딪히는 좁고 번잡한 곳은 더더욱 질색이었다. 그나마 히나가 있어서 그만큼 버틴 거였다.
“화, 황궁 안에서는 마법이…….”
“그래, 마법을 함부로 쓰면 안 되지.”
황제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마법은 쓸 수 없도록 결계가 쳐져 있었다. 특히나 외부에서 내부로 적이 몰래 침범하지 못하도록 공간이동으로 누군가 절대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만약 마법을 쓰고 싶다면 황제의 허락을 받거나, 한정된 공간에서만 가능했다.
“그 결계는 내가 만들었으니, 내게는 해당하지 않아.”
고개를 뻣뻣하게 끄덕이며 억지로 수긍하려는 히나를 보며 카신은 픽 웃었다. 상당히 놀란 모양인지 히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얌전히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별궁이 조금 북적해졌구나.”
사람들을 꽤 들여서 그런지 한적했던 별궁에 여러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도 내 옆에는 너만 둘 거다. 내게 차를 타주는 사람은 너 하나면 된다. 알겠느냐?”
히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카신을 바라보았다. 진심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는 그를 배신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안하기만 했다.
“구,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말을 꺼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히나의 입에서 절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잘됐다 싶으면서도 가슴은 그가 명령을 거둬줬으면 했다.
“차별을 두는 것에 좋아해야 하지 않아?”
카신의 말에 히나는 입을 다물었다.
시녀에게 그보다 더한 대우는 없었다. 특별 대우를 받으면 봉급이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대마법서에 대한 조사를 더 쉽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나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래도 날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군.’
사실 이렇게 떠보지 않아도 히나가 난감해하는 걸 알고 있었다.
히나는 남을 해하는 것을 무척 꺼려 했다. 배후의 적은 그녀의 착한 마음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리라.
히나를 이용하는 무리들을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결심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바보처럼 남을 잘 믿고 순한 히나를 이용하는 건 앞으로 자신만이 가능해야 했다.
“조, 좋습니다! 정말 좋아요! 감사합니다!”
억지로 얼굴을 펴는 히나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