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마법사를 훔쳐라-11화 (11/128)

#11.

평소와도 같은 일상이었다. 별궁에 새로 들어온 여럿 시종들과 시녀들은 히나를 더 한가롭게 만들어주었다.

원래 할 일이 거의 없었던 그녀의 업무는 이제 정말 하루에 세 번 차를 타주는 일이 다였다.

시간에 맞춰 차를 탄 히나는 조용한 걸음으로 카신의 옆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그 옆에 있는 붉은색의 두꺼운, 거기다 자물쇠까지 달려 있는 책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볼일이라도?”

카신이 넋 놓은 히나를 조용히 부르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닙니다!”

경직된 몸짓과 딱딱한 목소리.

카신은 싱그럽게 웃으며 그녀의 시선이 한동안 닿아 있던 붉은 책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그러고 보니 대마법서에 관심이 많았었지.”

히나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카신의 손끝에 닿는 서적으로 향했다.

“이것이 궁금하니?”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히나의 얼굴을 보며 카신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히나를 속이는 재미는 확실히 엄청났다.

‘남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흥미로울 줄이야.’

죄책감은 없었다. 어차피 피차 같이 속이는 입장이었다. 진실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일 뿐이었다.

“보, 보여주실 수 있나요?”

몇 번을 고민하고 말한 티가 났다. 순진한 눈망울을 마주하니 마구 괴롭혀 주고 싶은 못된 심술이 일었다.

“글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아, 네!”

히나의 얼굴엔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한 거짓말을 후회하는 티가 역력했다.

‘더 궁지로 몰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카신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장난기를 애써 감췄다. 구석으로 계속해서 몰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 순하고 연약했다.

“난 그리 야박한 남자가 아니야. 나와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기꺼이 보여주마.”

히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법서를 가지고 당장에라도 풀토 공작에게 돌아가 부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처음 보는 엄마의 따뜻한 얼굴, 아빠의 넓은 품에 어서 안기고 투정을 부린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았다.

“참, 다음 휴가를 반납하겠니?”

궁금한 것을 물어봐도 좋다는 뜻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부모를 만나는 상상을 하며 히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거라.”

샛노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또다시 빠르게 뛰어댔다. 한동안 괜찮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다시금 미친 듯이 뛰어대자 히나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카신은 빛이 났다. 히나는 빠르게 뛰는 제 심장 소리에 귀가 먹어버릴 것 같았다.

‘어서. 어서 대마법서에 관한 질문을 해야 해.’

머리는 그리 말하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아.’

부모님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지금은 조금 늑장을 부리고 싶었다.

“아무거나 물어봐도 되나요?”

“그래.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거라면 말해주마.”

고뇌하는 히나를 보며 카신의 노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첩자인 그녀가 할 질문에 대해 기꺼이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최대한 그녀에게 맞춰주고 싶었다.

“카신 님은 몇 살인가요?”

“뭐?”

“아…… 나이는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요?”

“하하. 그건 아니란다.”

당연히 스파이로서 질문을 할 줄 알았던 카신은 그녀의 순수한 질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대마법사가 아닌, 오로지 카신이란 사람에 대한 궁금증에 던진 그녀의 의외의 질문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내게 관심이 영 없는 건 아니군.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풀리겠어.’

바로 답변을 해주려던 카신은 곧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에 히나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 나이를 모르겠구나.”

“네? 나이를 몰라요?”

“어느 순간부터 나이를 세지 않았단다.”

히나가 처음으로 한 사적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해주고 싶었던 카신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요?”

히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살며시 피어올랐다. 정말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난 아주 오래 살았어. 몇 번이고 나라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걸 지켜봤지. 이 황궁에 오고 나서는 황제가 바뀌는 걸 열두 번이나 봤단다.”

“그렇게 오래 사셨다면 가족은…….”

“가족?”

카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히나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부인이나 아이 말이에요. 오래 사셨으니까 있으셨겠죠?”

질투?

아쉽게도 질투는 아니었다.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마음이 가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거든.”

어째서 그녀의 질문이 질투가 아닌 순수한 호기심인 것이 아쉬운 걸까.

카신은 하루하루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픽 웃었다.

“그렇게 오래 사셨으면서요?”

“그건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만약 나중에 히나와 결혼을 하면 어떨까?

노부부처럼 행복하게 살 자신이나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와는 해볼 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백의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히나와 함께 평생을 맹세하는 것이 꽤 기대됐다.

“그럼 부모님은요? 부모님은 계셨나요?”

“그래. 아주 오래전에 모두 죽고 나 혼자만 남았지.”

정작 카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히나의 눈동자엔 슬픔이 차올랐다. 잘못 봤다고 생각한 카신은 그녀의 턱을 들어 눈을 마주 보았다.

“슬퍼? 어째서 네가 슬픈 얼굴을 하지?”

“오래전부터 혼자만 남겨지신 거라면 아주 외로우셨을 것 같아서요.”

부모가 없이 자라면서 히나는 외로웠다. 이 기분을 아주 오랫동안 느끼며 참아왔을 카신에게 동정이 어렸다.

“내 부모는 생을 다 채우고 행복하게 떠났다. 별로 슬퍼할 일이 아니야. 난 지금 외롭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아.”

사실 별 감흥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는 마력이 넘치고 뭐든 척척 해내는 아들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카신은 제 발로 부모에게서 떠났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련을 두지 않았다.

부모의 사랑이나 애정 따위는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고, 딱히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완벽하다고 칭송받는 자신이 누군가의 걱정을 받고, 동정을 받는다는 건.

“내 얘기를 들려줬으니 네 얘기도 들려주렴.”

오늘은 히나와 조금 더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히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았다.

“너는 혼자라서 슬프고 외롭니?”

“슬프지 않아요! 외롭긴 해도 제겐 아직 멀리 떨어져 계신 부모님이 있거든요. 형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가족들을 생각하면 막 힘이 나요!”

주먹을 불끈 쥔 채 히나가 해맑게 말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나 형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은 무척 추상적이었다. 개운하지 않은 그녀의 가족 설명에 카신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생각만 해도 힘이 난다는 그녀의 가족이 부러웠다. 그도 누군가에게 필요에 의한 사람이 아닌, 존재만으로도 힘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사람이 갖고 싶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보고 싶겠구나. 혹, 내가 네 휴가를 빼앗아가서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니?”

왜인지 히나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방해로 인해 슬퍼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멀리 계셔서 지금은 만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꼭 만나러 갈 거예요!”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았다. 카신은 손으로 좁혀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가족이 인질인 건가?’

하지만 그러기엔 히나의 모습은 너무 밝았다.

‘돈을 많이 벌어야만 만날 수 있는 가족이라.’

속사정은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마 지금은 절대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카신은 씁쓸함을 감추며 히나에게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돈이 필요하면 빌려줄 수 있다만.”

이왕이면 히나가 알아서 그 집단에서 빠져나왔으면 했다. 나중에 이용당한 것을 알고 상처받을 그녀가 벌써부터 걱정되었다. 그는 턱을 괸 채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도 이제 다 컸는걸요? 스스로 할 수 있어요.”

의욕적으로 대답하는 히나의 눈에서 돈을 벌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역시 안 되는 건가.’

하긴 돈으로 해결될 문제였다면, 히나가 이렇게까지 이용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칫하면 목숨까지 버려야 할 정도의 일을 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려는 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카신은 히나가 가져온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제는 익숙해진 쓴 찻물이 입가에 닿자마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신경안정제라도 되는 듯 그녀가 잘못 타준 차를 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폐하께서 오고 있구나.”

“네?”

“차를 한 번 더 타줘야겠어.”

갑자기 황제가 오고 있다는 카신의 말에 히나는 눈을 크게 떴다.

“폐하의 기척이 다가오고 있거든. 곧 도착하실 거란다. 그러니 새로운 차를 준비해 주렴.”

딱히 기별이 온 건 없었다. 하지만 카신이 그리 말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히나는 멍하니 카신을 바라보다 뒤늦게 대답했다.

‘대마법사는 모든 것을 아는 걸까?’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는 카신은 항상 신비로웠다.

‘설마 내가 첩자인 걸 들키진 않았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돈까지 덥석 빌려준다고 할 정도로 나를 믿는데……. 내가 속였다는 걸 알면 얼마나 실망스러우실까?’

밖으로 나온 히나는 문에 몸을 기대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신 님에 대한 소문은 거짓도 많으니까. 풀토 공작님께서 잘못 안 걸지도 몰라.’

오랜 시간을 함께하진 않았지만, 카신을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는 악독하거나 포악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라를 망칠 정도로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라를 망친 것이 만약 황제 혼자 한 거라면…….’

황제만 죽이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리고 풀토 공작이 말한 새로운 황제라면 카신에게 포악한 짓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원하는 방법도 아니었다. 황제를 죽이게 된다면 자신도 자결을 택해야 했다. 그러면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부모와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기회는 많지 않아.”

카신을 속인 것이 미안했다. 성정이 선한 그는 아무런 죄도 없으니 되도록 살았으면 했다.

히나는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