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황제를 죽이고 자결한다면?
그럼 죄가 없는 카신은 잠시 추궁을 받을 뿐, 금방 풀려날 것이다.
나라를 첫 번째로 생각하는 풀토 공작이라면 카신의 오해를 풀고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카신은 잡힌다고 해도 금방 풀려날 것이다.
“대마법사님을 조금만 만나봐도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으실 거야.”
방으로 돌아온 히나는 풀토 공작이 건네준 독약을 소매 속에 몰래 숨겼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카신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통처럼 지키고 있는 응접실 앞의 기사들이 히나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익숙하게 다시 차를 갖고 들어가자 카신과 황제가 담소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전 가지 않습니다.”
“내 탄생일이잖나?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고 한번 오지 그래?”
“생일 선물을 받고 싶으신 거라면 따로 보내 드리죠.”
두 사람은 곧 있을 성대한 파티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황제의 탄생일에 맞춰 열리는 것이니, 아주 호화로우리라.
“카신, 정말 이러기인가? 황제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친우인 자네가 빠지면 안 되지.”
“측근이라면 로티스 공작이 있지 않습니까?”
“로티스 공작은 나와 연배가 안 맞지 않나?”
“제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잊으신 모양이군요. 저를 친우라고 하기보다 로티스 공작과 동년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만.”
황제의 간곡한 부탁에도 카신은 완곡히 거절하고 있었다.
‘황제가 시키는 걸 무조건 들어주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럼 황제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쩔쩔매는 황제의 얼굴은 절대 카신을 이용하거나 조종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카신이 황제를 이용해 나라를 망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누가 문제인 거지?’
그녀의 눈에는 황제도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 보기엔 그랬다.
어쩌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카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마법을 쓰고, 성정은 착하나 통치를 못하는 황제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풀토 공작에게 말해주고, 그가 황제를 잘 이끌어준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결국 히나는 숨겨둔 약을 꺼내지 않은 채 조용히 옆에서 차를 따랐다.
황제를 죽이지 않고 전부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카신 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두 분 중 한 분만 잘못된 상황을 깨달으면 되는 거잖아.’
거기다 귀찮은 티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만, 카신은 황제를 아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감히 황제의 친우라고 칭할 수는 없겠지만, 둘이 각별한 사이인 건 틀림없었다.
‘카신 님의 유일한 친우분이니까 한번 믿어보자. 공작님께 말씀드리고 판단해도 늦지 않아.’
히나는 혼자 만족스런 결론을 지으며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잠깐.”
루이스의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려는 히나를 멈춰 세웠다. 히나를 보며 루이스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자네 대신 이 시녀를 초대하지.”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받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잠시……!”
“이름이 뭐지?”
루이스는 이 상황을 막으려는 카신의 말을 재빠르게 끊고, 턱을 괸 채 거만한 얼굴로 히나를 보았다.
“히, 히나입니다!”
갑작스런 황제의 시선에 당황한 히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퍼뜩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카신과 가장 친한 사이니, 네가 대신 내 탄생 파티에 와줬으면 하는데.”
“폐하!”
카신의 딱딱한 목소리가 루이스를 가로막았다.
루이스는 빙긋 웃었다. 그는 카신의 시선을 철저히 외면한 채 히나에게 말했다.
“감히 나의 초대를 거절하진 않겠지?”
“어, 어찌 제가 폐하의 초대를 거, 거절하겠습니까!”
히나는 루이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대답했다. 어디에 초대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숨을 쉬듯이 즉각 대답하는 히나를 보며 루이스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카신, 자네 시녀가 걱정되면 파트너로 와도 되네.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형식상 초대장을 따로 보내주도록 하지.”
한 방 먹은 얼굴의 카신을 보며 루이스는 히쭉 웃었다.
“……그러도록 하죠.”
카신은 어릴 때부터 봐온 애송이가 자신을 물 먹인 것이 분했다.
지금껏 그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장난을 거는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 루이스가 유일했다.
남을 잘 이용해 먹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황제.
어릴 때부터 본 루이스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카신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히나, 그만 돌아가 보거라. 폐하와 할 얘기가 있으니.”
“네, 네!”
황제에게 더 말리기 전에 히나를 내보내야 했다.
“흐음, 난 자네의 시녀와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예상대로 히나를 통해 무언가를 더 얻으려고 했던 루이스가 아쉬워하는 것이 보였다.
“폐하의 절친한 친우인 저와 더 얘기를 하시죠.”
“아까는 친우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돌려 말하지 않았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잠시 루이스와 카신을 보던 히나가 고개를 숙이며 조심히 나갔다.
카신은 히나가 나간 문이 완전히 닫힌 것까지 확인하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교양 따위는 집어던지며 크게 웃었다.
“절 골탕 먹이는 거라면 성공했습니다.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카신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황제를 비꼬았다.
“저 시녀가 그렇게나 소중한가 보지?”
카신의 얼굴은 꽤나 볼만했다. 루이스는 한참을 웃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수상한 시녀가 영 꺼림칙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시녀는 처음으로 카신을 골려먹을 기회도 주었다.
“그럼 선물은 그때 받기로 하지. 대마법사께서 선물도 준다고 했으니, 기대하고 있겠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얄밉게 할 말을 마친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다니던 카신은 단단히 삐치기라도 한 것인지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인사를 하지 않는 무례보다도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즐거운 것인지 루이스는 또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참, 저 시녀에 대해서 알아보니 신분도 없더군. 리처드 백작을 통해 들어온 것 같은데……. 알고 있었나?”
카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제의 정보는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철저한 완벽주의인 루이스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정보를 줄 리는 없었다.
신분이 없다면 고아일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 리처드 백작은 반황권파의 앞잡이 중 한 명이 아니던가.
반황권파가 황제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대마법사에게 보낸 첩자라면 당연 가족도, 신분도 없는 사람을 썼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막상 사실을 들으니 걱정이 되었다.
“외롭긴 해도 제겐 아직 멀리 떨어져 계신 부모님이 있거든요. 형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가족들을 생각하면 막 힘이 나요!”
“너무 멀리 계셔서 지금은 만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꼭 만나러 갈 거예요!”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 것일까.
행복한 얼굴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풀어놓던 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가까운 미래에 그녀가 아주 많이 슬퍼할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제가 조만간 해결하도록 하죠.”
루이스가 걱정되어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진실을 늦게 알면 알수록 더 상처받을 히나가 걱정되어 해결하려는 거였다.
“탄생 파티에 리처드 백작도 당연히 오겠지요?”
“물론이네.”
루이스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나오는 카신에게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해 주자마자 자리를 떴다.
황제가 떠나고도 카신은 응접실에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찻잔을 치우기 위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히나가 곧 조용히 들어왔다.
“히나.”
찻잔을 가져가려던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는 게 낯설었다. 히나는 왠지 쑥스러웠다. 여태 그녀를 친근하게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성을 듣지 않았군. 네 성은 뭐지?”
“전 성이 없어요.”
성이 없다는 건 부모에게서 성을 물려받지 못한 고아이거나 천한 신분임을 뜻했다.
“네 부모도 성이 없는 건가?”
카신은 후자이길 바랐다. 고아인 부모를 갖고 있다거나 신분이 천해서 성이 없는 것이기를.
히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있는 것은 별로 원치 않았다. 하지만 부모가 없는 것에 슬퍼하고 절망할 그녀를 보는 건 피하고 싶었다.
“부모님은…… 저도 잘 몰라요. 멀리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 것만 알아요.”
“그렇군.”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히나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을 보며 카신은 부드럽게 웃었다.
“저녁에 차를 내오는 건 됐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그래도 되나요?”
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내일 아침까지 자유를 얻게 된 히나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억지로 좋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물러가는 히나의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카신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끝까지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히나가 보이지 않자 그의 표정은 동일 인물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섬뜩하게 변했다.
“리처드 백작이라…….”
만약 히나에게 부모가 없다면 그녀의 배후를 샅샅이 뒤져내어 한 명도 남김없이 그 죗값을 치르게 해주리라.
거짓말을 한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철저하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재미있는 파티가 될 것 같군.”
샛노랗던 카신의 눈동자에 순간 잔인하리만치 섬뜩한 붉은빛이 돌다가 사라졌다.
“그날이 기다려져.”
카신은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응접실에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