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무거운 정적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들었어? 조금의 일격이라도 된대!”
“그럼 살짝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가능한가?”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가능하기는 해?”
교실 안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그래도! 우리한테 조잡한 마법진이나 그리고 있으라고 했다고. 너희들은 그 말에 자존심도 안 상해?”
조잡한 마법진.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들은 재능을 갖고서도 피나는 노력을 해야 들어올 수 있는 상급반에 들어왔다. 그런 무시를 당하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 불쾌감은 상대가 누구인지 인지하자마자 바로 사라졌다.
“하지만…….”
“역시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맞아. 솔직히 황궁 마법사들이 그린 마법진도 교수님께는 조잡한 마법진이지 않을까?”
“황궁 마법사가 떼로 덤벼도 조금의 일격도 못 줄 것 같은데.”
자신 없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황궁 정식 마법사들을 모두 합쳐도 상처 하나 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대마법사를 공격하라니,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난 할래.”
침체되는 분위기 사이로 강한 의지가 박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대마법사님 수업 들을 거야. 못 듣는다고 해도 대련 시합을 언제 또 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한 루터의 두 눈엔 확고함이 묻어나 있었다.
“나, 나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대마법사님하고 직접 대련해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거잖아!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맞아, 맞아!”
“이것도 수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황궁 마법사가 된다고 해도 교수님하고 대련할 일은 없을걸?”
“나도 할래!”
어떻게든 카신의 수업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히나, 너도 가자.”
루터로 인해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그의 목소리로 인해 한순간에 식었다. 히나는 루터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루터, 아무리 걔가 네 동생이라고 해도…….”
“도움도 안 될 거라고.”
“맞아. 오히려 방해만 되니까 오지 말라고 해. 어차피 아무런 힘도 없잖아.”
“마법 시연도 못 하는 애라고.”
살며시 올라가던 히나의 손이 곧바로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
“쟤,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몇 번이고 불렀잖아?”
줄리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히나를 훑었다.
“너, 대마법사님의 약점이나 뭐 알고 있는 거 없어?”
“약점이 있을 리가 없잖아. 비켜, 줄리아. 어차피 히나가 있든 없든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방해되는 건 똑같아.”
딱히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하는 줄리아를 두고 루터는 히나에게 내민 손을 더 뻗었다.
“가자. 가서 마법진 그리는 거나 도와줘. 책 보고 그릴 수는 있지?”
사실 히나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루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갈수록 히나가 안쓰러웠다. 항상 교실 안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눈치만 보는 그녀를 조금은 도와주고 싶었다.
“인원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나으니까. 같이 가자.”
자그만 손이 책상 위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같은 교실에 있다고는 하나 항상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루터와는 얘기할 틈이 거의 없었다. 특히나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는 히나에게는.
“시간 없어! 가서 하나라도 더 마법진을 그려놔야지!”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학생들까지 뒤늦게 일어났다. 대련을 해서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전부 이득인 일이었다. 겁이 난다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상급반 학생 모두가 대강당으로 모였다. 나름대로 알고 있는 모든 수식을 동원하여 각자 마법진을 펼치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위대한 대마법사에게는 작은 손상도 줄 것 같지 않았다.
“이런 걸로 될까?”
“누구 고위 마법진…… 펼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
“하아, 그걸 말이라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모를까. 아무리 세인트의 상급반이라고 해도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적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암울한 미래만이 보였다.
“너 정말 교수님의 약점이라든가, 잠깐이라도 방심할 수 있게 막 시선을 강탈할 만한 거, 몰라?”
항상 새침하던 줄리아가 간절한 표정으로 히나에게 물었다.
마법사의 꿈을 갖고 세인트에 입학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루터를 통해 힘들게 얻은 기회였다.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말 특별한 능력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빨리 말해.”
“그, 그런 거 없는데…….”
“그럼 교수님께서 좋아할 만한 거나 그런 거라도 대봐! 아우, 답답해. 이거 누가 데리고 온 거야?”
애먼 루터를 탓하며 줄리아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조, 좋아하는 거라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히나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히나는 생각보다도 더 집중되는 이목에 난감했다.
“느긋하게 차 마시는 걸 아주 좋아하시는데…….”
매일같이 차를 달고 사는 카신을 떠올리며 히나가 소극적으로 말했다.
김빠지는 대답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한순간 기대하고 있던 루터도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 표정 봐. 뭘 좋아하시긴 하겠냐?”
“아! 혹시 재밌는 책이라도 떨어뜨리면 궁금해서 보려고 하시지 않을까? 왜, 매일 책을 읽으시잖아!”
“근데 방심한다고 해도 공격할 수 있긴 한 거야?”
“몇 초라도 잠깐 다른 데에 눈 돌리게 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항상 자습을 시키고 책을 읽는 카신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아, 아니야! 교수님은 책 별로 안 좋아해.”
조용히 있던 히나가 다급히 막았다.
“그건 폐하께서 읽으라고 억지로 쥐어주고 가신 거라고 했어. 그래서 읽는 거지, 책에 관심은 굳이 없다고…….”
“제대로 알고 말하는 거 맞아?”
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카신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진실이리라.
“지루하지만 그나마 시간 때우기 좋아서 책을 읽으시는 거라고 하셨어.”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럼 다른 좋아하는 건 없어?”
좋아하는 거.
생각해 보니 카신이 좋아하는 걸 하나도 모른다. 나름대로 오래 알고 지냈는데 알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런 말도 못 하는 히나를 보며 더는 알아낼 게 없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애초에 교수님은 왜 이런 애를 그렇게 불렀던 거야?”
“모르겠어? 특례 입학으로 온 게 궁금해서 몇 번 불렀는데,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까 관심 끊으신 거겠지. 요즘 안 부르는 거 보면 몰라?”
도움이 되는 건지, 마는 건지.
히나를 향한 힐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마법사님 약점은 너희들도 평생 모를 거면서 왜 히나한테만 그래?”
묵묵히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루터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들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마법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법진을 펼친다고 한들,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는 그리고 있던 마법진을 쓱쓱 밟아 지워 버렸다.
“솔직히 처음부터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남 탓은 그만해. 애초에 대마법사님이 방심할 정도로 좋아하는 게 있을 리가…….”
좋아하는 거. 잠깐 방심할 정도로 좋아하는 거라면…….
“아!”
루터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났어!”
확실하진 않지만, 아주 좋아해서 방심하게 하는 방법이라면 있었다. 루터의 입매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올라갔다.
“뭐?”
“고위 마법진이라도 생각난 거냐?”
“대마법사님의 약점이라도 아는 거야?”
“뭔데 그래!”
살며시 뒤로 물러나려는 히나의 몸이 움찔, 멈췄다. 시선을 맞추며 무섭게 다가오는 루터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위험스러웠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저, 전 역시 빠지는 게…… 으악!”
루터는 뒤돌아 도망가려는 히나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무섭게 다가왔다.
“너, 몸은 튼튼하지?”
마법을 못 해도 좋았다.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깝지 않게 아무런 능력도, 존재감도 없는 것이 나았다.
“아, 안 튼튼한데요.”
“아니야. 이 정도면 튼튼하지. 그래, 그렇고말고.”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루터는 카신이 히나로 인해 세인트로 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남들에겐 말해봤자 믿지 못하겠지만, 카신은 히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역시 전 빠지는 게…….”
“내가 마법진 만드는 거 도와주러 온 거 맞지? 응?”
대답을 하는 순간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았다. 히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루터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금 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저, 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루터와 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무엇이든 다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대답한 건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지금 네 오라버니가 동생인 네게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거절 안 할 거지, 히나?”
히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을 오라버니라 칭하며 하는 강압적인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루터는 여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기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히나.”
결코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 히나의 의견은 묵살됐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활짝 웃는 루터에게 거절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거의 광기에 휩싸이다시피 한 루터를 보며 히나는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