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전 칭호도 있고, 작위까지 있는 데다 양녀지만, 후작가의 영애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조금 손해 보는 것 같아요.”
“히나, 지금…….”
“거기다 공작가에서 혼사도 들어오고 있고.”
히나는 일부러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자 카신이 기가 막힌 얼굴로 하, 하고 짧게 실소를 내뱉었다.
결국 히나는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카신이 그녀를 놀릴 때마다 왜 즐거워하는지,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제가 카신 님과 결혼을 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카신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히나는 장난이 심했나 싶어 잠시 눈치를 보다가 발끝을 있는 힘껏 들어 그의 턱에 입술을 쪽 맞췄다.
‘내가 조금만 더 키가 컸다면 좋았을 텐데.’
이왕이면 그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다. 그녀의 키가 작은 것도 있지만, 카신의 키는 너무 컸다.
“이런다고 내가 풀어질 것 같아?”
그래도 싫진 않은지,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카신의 표정은 거의 풀어져 있었다. 히나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그보다 언제 폐하께 승인을 받은 거예요?”
카신은 한쪽 눈썹을 쓱 들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국에서는 귀족이 결혼을 하려면 황제에게 승인을 받아야 했다. 카신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황궁 소속이었고, 히나는 후작가 영애였다. 당연히 황제의 승인이 이루어져야 결혼이 가능했다.
‘황제가 반대를 해도 결혼은 무조건 할 거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카신은 거의 반 협박으로 루이스에게 결혼 승인을 서명으로 받아냈다.
루이스는 차일피일 미루며 끝까지 서명을 해주지 않으려 했다. 전쟁의 뒷수습을 하느라 무척 바쁘기도 했지만, 히나를 이용해서 카신에게 더 많은 것을 빼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히나는 아직 세인트를 졸업하지도 않았어. 결혼은 세인트를 졸업하고 하는 것이 어떤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단 말일세.”
어차피 카신은 루이스의 허락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이 예정보다 늦어진다거나 무효가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카신이 굳이 루이스의 허락을 받으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히나는 아직 세인트의 학생 신분이기도 하고, 출생이 불분명한 후작가의 수양딸이었다. 당연히 사교계 활동이 활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으로 인해 히나는 수많은 파티에 초대될 것이다. 다른 의미로 많은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며, 또한 남자들의 구애도 수없이 받게 되리라.
그렇게 되면 가장 큰 걸림돌인 라우너가 애가 타서 히나에게 더 집적거릴 게 뻔했다. 그것만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여기에 어서 친필 서명과 옥새를 찍어주지 않으면 당장 히나를 데리고 제국을 떠날 겁니다.”
결국 카신은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결혼을 뒤로 미루려는 루이스에게 강력한 협박을 했다.
결국 루이스는 그의 강한 의지에 바로 서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짜도 정해주려 들었다.
황제의 허락이 담긴 친필 서명서는 결혼식보다도 더 확실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은 양가 집안에서 모든 상의가 끝난 두 사람이 함께 황제에게 허락을 맡으러 갔다.
“그런데 히나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되나?”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한 루이스가 서명서를 적으며 한 말이었다. 그때는 히나와 미리 상의를 했다며 얼버무렸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자고만 했지, 실제로 루이스에게 승인을 받는 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얘기하지 못했다.
그는 당시에 히나가 깨어나면 결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의한 다음, 후에 황제에게 승인을 받았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계획이었다.
“원래 폐하께는 함께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카신은 이미 승인을 받아놓은 일에 대해 미리 말할 생각이 없었다. 히나를 단단히 홀린 두 여인네들만 아니었다면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히나를 어떻게든 그에게서 빼돌리려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카신은 앞뒤 가리지 못하고 그 말을 털어놓은 것을 후회했다.
“아직 아버지께 구체적으로 말씀도 못 드렸는데.”
상황이 역전되었다. 단단히 삐쳐 있던 카신은 바로 자세를 바꾸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네가 정신을 차리지 않아, 리베리아 후작과 상의해서 미리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랑 상의했다고요? 정말이에요?”
멈춰야 한다는 걸 알지만,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히나가 잠들면 리베리아 후작에게 당장에 달려갈 생각이었다. 상의를 하고 입을 맞춰야 했다. 그 대가로 황궁 마법사단의 조건을 들어줘야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리베리아 후작과 함께 폐하께 가려 했지만, 황궁 마법사단 일로 바빠 나 혼자 가게 됐지.”
갈수록 골치가 아팠다. 점점 커지는 거짓말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져만 갔다.
“그랬단 말이죠?”
순진한 얼굴로 묻는 히나에게 카신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
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카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카신을 보고 있으려니 알면서도 넘어갈 것 같았다.
어제 루터에게 서신이 왔었다. 카신에게 차를 직접 타주러 복도로 나오자마자, 마침 서신을 받은 시녀가 전해주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없었던 카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루터가 보낸 서신에는 리베리아 후작의 안부 인사도 전해 있었다. 전쟁의 뒷수습으로 많이 바쁘니 카신의 별궁에 조금 더 오래 있으라는 말과 함께 결혼을 조금 더 늦추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번엔 넘어가 줄게요.”
“뭘?”
“뭘 넘어가는지 말하면 카신 님이 불리한 거 아니에요?”
카신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히나, 이 문제를 떠나 요즘 내가 무척 궁금해서 그런다만, 도대체 어디서 뭘 듣고 다니기에 뭐든 다 알고 있는 거지?”
세이나의 일부터 지금 일까지.
카신은 은근히 히나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나 싶어서. 숨기고 있는 게 하도 많아서인지 찔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 카신 님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카신 님에게 관심이 많아요.”
히나는 카신을 향해 돌아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알려고 할 거예요.”
먼지 하나 없는 새하얀 제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손을 올려 제복 끝을 잡았다.
“그러니까 제게 그렇게 숨기면 안 돼요.”
카신이 무엇을 숨기든 히나는 아무런 상관 없었다. 적어도 그는 그녀를 누구보다도 사랑해 준다. 그것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황제에게 먼저 가서 결혼 승낙을 받아온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애가 타서 하는 행동이었다.
“제가 카신 님의 것인 것처럼, 카신 님도 이제 제 것이 되어야 하니까요.”
처음에는 카신이 그녀를 빼앗길까 불안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그녀를 갖고 싶어 전전긍긍하는지.
히나는 카신의 옷자락을 벗겼다. 손끝이 떨려왔다. 입안이 마르고, 가슴이 아프도록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머뭇거리거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겉옷 하나가 그의 몸에서 벗겨지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히나는 살며시 손을 거두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대로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럴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여긴 그의 방과 이어진 테라스였다.
어째서 바깥에서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고, 어쩌려고 옷을 벗긴 걸까. 히나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나머지는 들어가서 하자고 해야 하나?’
그렇게 직설적인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카신이 다가와 번쩍 안았다.
카신이 큰 보폭으로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침실에 도착했다. 그가 그녀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주었다.
히나는 이 와중에 테라스 바닥에 떨어져 있을 겉옷이 떠올랐다. 괜히 테라스에서 카신의 옷을 벗긴 건가, 생각하던 히나는 점점 다가오는 카신을 향해 말했다.
“저…… 카신 님의 제복이 테라스에 있어요.”
자신이 생각해도 정말이지, 쓸데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사소한 것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시녀가 알아서 치워둘 게다.”
“하지만…….”
카신에게 안기고 싶다. 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첫 경험을 한다는 것이 조금 무섭지만, 그녀도 그를 무척이나 원하고 있었다.
“아마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을 텐데…….”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다른 걱정들이 튀어나왔다. 카신이 얼마나 자신을 답답하고 한심하게 볼까. 히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계속 나오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치우라 이르지.”
카신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가 손을 그녀의 허리 뒤로 가져왔다. 스윽, 하는 서늘한 소리와 함께 허리를 꽉 조인 코르셋이 느슨해졌다. 동시에 히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에 비가 와서 젖을지도 모르니까…… 시녀에게 지금 말해놓아야겠어요!”
“굳이 지금?”
히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드는 카신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코르셋이 허리에서 스르륵 하고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코르셋을 보며 히나는 눈을 크게 떴다. 꽁꽁 얼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굳어 있던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절대 이상하게 보이지 않게 발을 들어 동그랗게 둘러싼 코르셋 안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그 모습이 여태 한 행동 중에서 가장 어색하다는 걸 그녀도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어색한 행동을 멈출 순 없었다.
허리가 조금 헐렁해졌을 뿐, 옷이 벗겨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히나는 혹시라도 아래로 흘러내릴까 싶어 드레스를 꽉 붙든 채로 소리 지르듯이 힘주어 빠르게 말했다.
“겨, 겸사겸사 씻고 올게요! 시녀에겐 제가 말할 테니까 카신 님은 여기 그대로 계셔야 해요!”
후다닥 소리와 함께 히나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신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몸을 반쯤 뉘여 도망가는 히나를 지켜보았다.
히나가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복도에서는 다급히 뛰어가는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예절 교육을 하면서 듣지 않았던, 귀족들이 흔히 말하는 방정맞은 걸음이었다.
“그대로 계시라니. 오기는 오는 걸까?”
히나가 먼저 다가와 겉단추를 푸르고 옷을 벗겼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한 행동은 절대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나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끝을 보며 덩달아 그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잔인하다니까?”
사람의 애간장을 다 태워놓고는 고작 겉옷 하나를 핑계 대며 도망가 버렸다.
히나가 원망스럽다기보다는 그녀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예리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이렇게 엉뚱하게 나오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히나와 있는 시간은 언제나 신선하면서도 즐거웠다.
“옛날부터 허튼소리는 안 하니, 한번 기다려 보지.”
어쩌면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기대가 되고 설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