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조각사
위드와 스미스가 흑색 게이트를 타고 이동한 장소는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시커먼 바위산이었다.
보통의 바위산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바위는 칠흑처럼 시커먾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으며, 주변에는 강이 흐르고 있다.
-크에에에.
-우리를 살려 줘. 살려 줘.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줘.
강이 울었다. 귀신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통곡의 강인가?'
바위산에는 굉장히 많은 조각품들도 있었다.
흉신 악살. 악귀 들을 떠올릴 정도로 섬뜩한 조각품들!
아이를 품고 있는 어미의 목은 잘려 있었다. 인간이 아닌 오크 모녀였다. 트롤들은 서로를 창으로 찌르고 있
고, 인간들은 집단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한 마을을 약탈하고 방화하는 장면들도 조각품으로 표현되어 있다.
강이 흐르는 장소를 따라서, 그런 조각품의 무리가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는 것이다.
"크흠."
위드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어떤 조각품도 긍정적이지 않은, 부정적인 모습들만을 그려 놓았다.
정상인이라면 당연히 거부감을 느낄 수준.
그나마 마음에 들고 이해가 가는 조각품은 얄밉게 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깡마른 아이들을 두고 혼자만 맛있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노예로 보이는 아이들은 기껏 보리 빵을 먹고 있
는데.
"돈이 없으면 굶어야지! 보리 빵이면 얼마나 잘 대우해 주는 것인데......"
위드의 공감을 100% 자아내는 조각품!
아마 악덕 상인에 의해 부림을 받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될지도 모른다. 위드였다면 피죽 한 그릇 안 쑤어 주
었을지도 모르니까!
통곡의 강을 따라서 조각품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강물은 하류로 흐를수록 거칠고 탁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끄어어어.
-죽여 줘. 죽여 줘.
강물로 다가가서 보니 보통의 물이 아니었다.
강물 깊은 곳에서는 온갖 몬스터나 인간의 원혼들이 그대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납량 특집, 귀신의 집에서도 보기 어려운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스미스가 다가와서 말했다.
"조각품의 영향이 아닐까?"
"예?"
"예술품들 말일세. 예술품들의 기본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게야. 이 조각품들이 강을 울게
만들고 있어."
위드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조각사가 만드는 조각품에는 만든 사람의 감정이 묻어 나온다. 다 똑같은 조각품 같지만 실상은 매우 달랐다.
막 잠에서 일어난 사람이 초췌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막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은 여자에
게서 전해지는 느낌이 초췌할 리는 없으리라.
열망과 희망. 애정으로 충만한 느낌!
대상이 같더라도 어떤 느낌으로 조각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기분을 전해 준다.
시인들이 쓰는 시나 작가들의 글도 느낌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
예술품들은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다.
우중충한 그림이나 조각품 들이 집 안에 가득하다면 당연히 기분도 위축되고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부정
적인 조각품들로 집이 가득하다면, 아침에 일어나기도 싫을 것이다.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분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몇 년, 몇십 년이 된다면 충분히 사람도 바뀌게 만들 수 있다.
"풍수지리로군요."
"응?"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아파트가 더 비싼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까."
"무슨 소리야?"
"전망이 좋을수록 아파트 값이 비싸다.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위드는 알 것 같았다.
예술품이 감정을 전해 준다면, 악념만을 가지고 만들어 낸 조각품들이 강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
다.
풍수지리를 만드는 조각품!
위드는 살다 살다 별꼴을 다 경험하고 있었다.
"자고로 아파트 시세만큼 정확한 게 없죠. 그보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봐야겠군요."
그때였다.
띠링!
『-지옥의 입구. 통곡의 강에 진입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이 숨을 쉴 수 있는 대륙의 끝.
마탈로스트 교단의 인도자들이 죽은 이들을 지옥으로 이끄는 장소입니다.』
"오호라."
스미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가 인간 대륙의 끝이로군. 용병질을 하면서도 여기까지 와 보지는 못했는데...... 술이나
한 병 주게. 술자리에서 친구 녀석들에게 해 줄 자랑거리가 늘었지 않은가. 껄껄!"
스미스는 술을 먹으며 즐거워했다.
위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더니 이제 지옥의 입구까지 오게 되었다. 그것도 주정뱅이와 함께 말이다.
'어쩐지 주위의 모습이 많이 이상하더라니......'
토둠에 막 갔을 때와 약간은 비슷한 으스스한 분위기!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고, 적막하기 짝이 없고 을씨년스러웠다.
나침반을 꺼내 봤지만 바늘이 핑글핑글 돌면서 고정되지 않았다. 하늘에는 별자리도 관찰되지 않았다.
'이래서는 돌아갈 수도 없을 텐데......'
위드는 스미스와 함께 통곡의 강을 따라서 걸었다.
강가에는 수천 점 이상의 조각품들이 주제별로 모여 있었다.
긍정적인 조각품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예쁘고 깜찍한 소녀의 조각품을 보고 의아해서 다가가면
충격적인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귀여운 소녀가 침을 뱉고 있는 것!
손에는 개구리를 쥐고 있기도 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서적인 충격에 빠지게 하는 장면이다.
근육질의 여자들이 축구를 하는 끔찍한 장면도 있었다.
물론 축구공은 오우거의 머리통!
위드는 조각품들의 정보를 확인해 보기 위해 감정했다.
"감정!"
띠링!
『오우거들의 수치스러운 조각품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각사의 작품.
오우거들은 숲과 산의 제왕이다. 영역에 대한 자부심으로 침입자들에 대해 흉포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마탈로스트 교단의 제작 의뢰를 받아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
오우거들이 이 조각품을 본다면 매우 큰 분노와 원한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술적 가치:전혀 없음.
특수 옵션:오우거들의 슬픔을 자극함. 』
-끄흐흐흐흐.
통곡의 강의 신음 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
위드는 이틀째 통곡의 강에 머물면서 유적을 찾아냈다.
마탈로스트 교단의 신전!
대륙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교단의 신전이 여기에 있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완전히 폐허나 다름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
게 만들어져서, 들어가는 것조차 고민하게 만든다.
"콜 데스 나이트!"
연기와 함께 등장한 데스 나이트가 검을 들었다.
"불렀는가. 주인."
"너, 저기 들어가 봐라. 살아 있는 사람이나 몬스터가 있다면 즉각 나와서 보고해다."
"알겠다."
데스 나이트의 친밀도가 약간은 하락했겠지만, 함께한 시간이 길다 보니 끈끈한 미운 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데스 나이트는 신전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주인."
"그래?"
위드도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신전의 입구가 무색하게, 내부에는 신을 모시는 석상들만이 있을 뿐이다.
"신전은 남아 있지만, 사제들은 모두 떠나 버리고 난 후로군."
위드는 금방 마탈로스트교의 신전을 나왔다.
사제실에도 물건 하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전 안에서는 옷에 먼지만 잔뜩 묻혔다.
통곡의 강에서 사흘째!
신전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100명이 넘는 사제들과 암흑 기사들을 발견했다.
"엠비뉴 교단!"
위드의 입에서 신음 같은 소리가 나왔다.
본 드래곤이 있던 지역에서도 엠비뉴 교단의 흔적을 발견했다. 원정대와 서윤, 알베론 등의 도움을 받아서 퇴
치하였던 기억이 있다.
위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번에도 엠비뉴 교단이 개입되어 있었나!"
니플하임 제국의 몰락에도 영향을 주었던 엠비뉴 교단인데 여기서도 발견하다니,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위드는 일단 몸을 숨겼다.
엠비뉴 교단의 사제와 성기사 들이 있는 부근에는 1,000마리도 넘는 마물들이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막강한 전력!
더구나 그들은 심상치 않은 의식을 펼쳤다.
"크에에에. 떠나지 말지어다. 너희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를 하라!"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 절망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어라."
"다시 되돌아와서 너희의 복수를 하라."
통곡의 강 하류에서 살육의 의식을 벌인다.
어린양이나 사슴 등의 제물을 바칠 때마다 강물이 출렁거렸다. 분수처럼 높이 솟구치기도 하고, 때로는 바로
다가올것처럼 넘실거렸다.
엠비뉴 교단의 사제들은 그럴 때마다 강물을 피하기 위하여 야단법석이었다.
"원통한 마음, 끊이지 않는 애잔함, 끓어오르는 화를 폭발 시켜라!"
신관들이 어린양의 심장을 바쳤을 때였다.
촤아아아아!
강물들이 역류할 것처럼 출렁거렸다. 그리고 10미터는 높이 솟구쳤다.
더럽고 탁한 구정물!
강물에서 원혼들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채 신음 소리를 냈다.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데스 나이트."
"말하라. 주인."
"이 자리에서 스미스를 지켜라."
"알겠다."
스미스와 데스 나이트를 남겨 놓고 혼자 잠입해 볼 작정이었다.
스미스가 나섰다.
"헐, 아니야. 내가 도와주지. 자네 같은 풋내기 조각사에게 정찰 임무라니 가당치도 않아."
"......"
"초일급 용병인 나를 남겨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나를 믿어 보게."
위드는 반쯤 남은 위스키를 미련 없이 던져 주었다.
"허억! 고급 위스키! 과연 입안에 쩍쩍 달라붙는구나."
스미스는 술을 마시느라 정찰에 따라나서려는 생각은 깨끗이 지웠다.
위드는 이렇게 짐 덩어리를 해결하고, 혼자 엠비뉴 교단의 지역으로 잠입했다.
말이 거창해서 잠입이었다. 실제로는 바위산을 오르며 야금야금 접근하는 정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돌 부스러기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엠비뉴의 사제들이나 암흑 기사들이 눈을 돌리려고
하면 재빨리 엎드려서 숨었다.
바위의 구멍 난 틈으로도 바람이 불어서 으스스한 귀곡성까지 들렸다.
위드는 엠비뉴 교단과 가장 근접한 바위산의 정상에까지 올랐다.
사제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엿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초를 서고 있는 암흑 기사들이 하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 했는가?"
"오늘은... 마리를 했다는 보고를... 같군."
"조각품을 활용... 계획은 탁월해."
"베르사 대륙이 도탄에... 우리의 목적."
단편적으로 들리는 말들!
바람 소리 때문에 부분 부분 끊어져서 들렸다.
위드는 대화 내용을 조합해 보았다.
눈치로 먹고산 인생이었다. 사장의 표정만 보아도 월급이 무사히 나올지, 혹은 떼어먹힐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마리를 했다. 뭔지는 몰라도 통곡의 강에 있는 원혼들을 어떻게 했다는 것 같은데, ... 조각품을
활용한다. 통곡의 강에 있는 원혼들에게 나쁜 힘을 작용시키는 데 쓰고 있겠군.'
조각품의 다른 이유란 없어 보였다.
통곡의 강 하류로 갈수록 강물이 탁해지고, 원혼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조각품이 주는 부정적인 힘이 개입한다
고 봐야 했다.
"... 시간이 이렇게."
"교체... 휴식을 취해."
"신선한 양의 피를......"
암흑 기사들의 경계 임무가 교체되었다.
위드는 그다음 암흑 기사들이 보초를 설 때에도 묵묵히 기다렸다.
"바람이 강해."
"날씨가 나쁘... 케르탑들이 출현......"
1시간에 한두 마디를 할 정도!
그것도 사제들이 펼치는 의식과는 무관한 이야기만 한다.
위드는 일단 스미스와 데스 나이트가 숨어 있는 장소로 철수했다. 그리고 죽음의 상을 꺼내 보니 언제부터인지
마수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감정!"
말을 닮은 마수. 마탈로스트교의 신물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라.
이것은 죽은 자들을 인도하는 마탈로스트교의 역사이다.
마탈로스트교는 다른 교단의 견제에 힘을 잃었다. 그때 복수를 꿈꾸면서 엠비뉴 교단과 손을 잡았다.
엠비뉴 교단은 증오밖에 모르는 악신들을 숭배하는 무리.
"너희가 가진 권능을 이용하라. 칼칼!"
"베르사 대륙이 마탈로스트 교단을 숭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라."
"우리가 원하는 바는 오로지 파괴일 뿐. 도와주겠다."
마탈로스트교는 타락했다.
죽은 자들을 인도하는 임무를 방치한 채로 엠비뉴 교단의 열한 번째 지파가 되었다.
마물들을 양성하여, 베르사 대륙을 짓밟는 악의 군대가 되었다.
그들의 힘의 원천인 통곡의 강을 정화하라.
통곡의 강이 정화되면 마물들도 힘을 잃게 되리라.
띠링!
『엠비뉴 교단과의 싸움
대륙을 악으로 물들이려는 엠비뉴 교단의 행위를 저지하라.
엠비뉴 교단의 의식이 진행될수록 베르사 대륙은 혼란에 빠지고 말것이다. 그들의 의식이
진행되지 못하도록 통곡의 강 유역에 있는 조각품들을 바꾸어 놓아라.
단, 조각품들을 파괴하면 암흑 기사들의 추적을 받게 됨.
연계 퀘스트 마탈로스트 교단의 포로 구출, 엠비뉴 교단 11지파의 파멸, 마탈로스트 교단
의 숙원과 이어짐.
난이도:조각사 한정 퀘스트
보상:조각술의 대업적으로 기록됨.
엠비뉴 교단을 제외한 베르사 대륙의 모든 교단과의 선호도 상승.
명예로운 칭호.
퀘스트 제한:부활의 군대와 엠비뉴 교단이 베르사 연합군에 의해 전멸하면 퀘스트는 자동
적으로 취소됨. 』
위드의 눈이 빛났다.
"이건 또 다른 연계 퀘스트의 시작과도 같군."
조각사 퀘스트!
죽음의 상을 가지고 따라온 의뢰였다.
만약 이 의뢰를 받아들여서 성공시킨다면, 엠비뉴 교단의 의식을 방해하고 파멸시키는 등의 연속 퀘스트와 이어
지게 된다.
진짜 퀘스트의 출발점과 같다는 뜻이었다.
위드는 도전을 거부하지 않았다.
"해 보겠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통곡의 강 유역!
강가를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몬스터와 마물 들로 넘쳐 났다. 최악의 사냥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깡말라서 뼈밖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마른 체구, 짙은 암청색의 피부에서 전기를 발산하는 몬스터들!
지옥의 몬스터들이 대거 돌아다니고 있었다.
몬스터와 마물 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에 위드도 안전한 강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몬스터들의 레벨이 최소한 300대 후반이란 이야기인데......"
강 유역의 가장 약한 몬스터들의 레벨이 그 정도였다.
날씨가 칙칙하고, 대기 중에 습기가 차 있으면 놈들이 발사하는 전기의 위력이 가공스러울 정도다.
위드는 실험도 해 보았다.
"데스 나이트, 공격!"
"알았다. 주인!"
데스 나이트가 두셋의 합공에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는 것으로 이미 증명이 되었던 바!
통곡의 강 부근을 벗어나지 못하니 더 움직이면 어떤 몬스터들이 출현할지 짐작조차 불가능했다.
데스 나이트는 죽음의 기사였기에 계속 되살아나지만, 당분간은 심하게 약화되었다.
위드는 얌전히 조각칼을 들었다.
"한 걸음씩 차분히 해야지."
아이를 안고 있는 채로 목이 잘린 어미 오크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어미 오크의 머리통을 제작하여 정밀하게 붙여 주는 작업!
통곡의 강 유역에 수천 점이나 되는 조각품들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야 했으니 위드에게도 대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미 오크가 따사롭게 웃고 있는 머리통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오크의 눈초리는 쭉 찢어졌고, 아이를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식욕이 가득 찼다.
자기 아이까지 잡아먹을 듯한 눈빛!
새끼 오크가 젖을 먹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버릴 것처럼 보이는 머리통이었다.
오크 카리취로 독특한 미적감각이 충분히 증명되었지만, 지금은 잡념까지 가득해서 조각품들이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위드는 조각칼을 놓았다.
수천 점이나 되는 통곡의 강 유역의 조각품을 바꾸어 놓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강물 속의 원혼들이 귀곡성을 터트리고, 안개 낀 강가의 조각품들이 무섭게 보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몬스터들!
엠비뉴 교단의 사제들과 암흑 기사들을 방치해 둔 채로 조각품만 만들 수는 없다. 이건 마치 한창 성장할 초등
학생에게 고기반찬은 절대로 먹지 말고 나물만 먹으라고 강요하는 꼴이 아닌가.
경험치와 아이템에 대한 욕구.
위드의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넘쳐 나는 강한 몬스터와 아이템들. 이것들을 내버려 두고 오크 머리통이나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갈증에 위드는 다시 조각칼을 들었다. 통곡의 강 유역에 있는 조각품을 수정하는 게 아닌,
온전히 새로운 조각품을 만들려는 목적에서였다.
서걱서걱!
흑암을 잘라서 조각품을 만든다.
바위를 이용한 대형 조각품은 익숙한 방식이었다. 의외로 무르고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는 조각칼로 쉽게 자를
수 있었다.
"탈것부터 만들어야 해."
위드는 스켈레톤 나이트가 되었던 때를 떠올렸다.
해골 기사 자체로는 영웅의 탑 관문에서의 전투는 그럭저럭이었다.
역사적인 팔랑카 전투, 대평원에서 말을 타고 보여 주던 폭발적인 가속력!
기사의 질주에 장애물은 없었다.
몬스터들을 가르고 나아가던 돌격. 기사에게 말이 주어지면 그 전력은 3배, 4배 이상이 된다.
"조각사라도 질주는 할 수 있지."
기사처럼 특별한 스킬, 말과 사람이 일체화되는 스킬 등은 없어도 질주는 가능하다.
용병들도 웬만큼 성장하면 자기 말 정도는 갖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다고 구태여 말을 조각할 필요는 없어."
위드는 나약한 말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말은 빠르지만 지구력은 그다지 높지 않다. 흉맹한 기세에서도 달린다. 불이나 번개, 귀신 등 무서워하는 것도
많다.
어차피 기사로서 말에 대해 특화된 것도 아닌 마당이었다.
"역시 탈것의 최고라면 바로 그거지."
위드는 대한국민이었다.
수없이 길고 굴곡진 역사 속에서 민족과 함께 아픔을 달래 주었던 가축!
강하고 굳건하며, 가족처럼 친근한 데다 엄청난 근력을 가진 가축이 있는데 말을 조각할 까닭이 없다.
우리 소.
한우!
위드는 암석의 특성상 시커먼 흑우를 조각했다.
다리는 굵고 탄탄했다. 허벅지의 근육은 섬세하기 짝이 없었으며, 몸통도 완전한 근육질이었다.
보통 사료를 먹고 자란 소들이 육질을 위해 지방을 줄줄이 달고 있다면, 지금 조각하고 있는 소는 달랐다.
가히 베르사 대륙 미스터 황소 올림피아에 나가도 될 정도!
육체미를 좋아하는 암소들이 본다면 곧바로 짧은 꼬랑지를 흔들며 엎드리리라.
"무턱대고 근육만 키워서는 안 돼."
위드는 절제의 미덕까지 발휘했다.
근육질의 몸은 순간적으로 내는 힘은 강할지 몰라도 지구력이나 민첩성에는 둔한 약점을 지닌다.
"불필요한 근육들은 최소화하고, 근력과 지구력의 최적화를 이루어야지."
위드는 황소의 조형미까지 신경 썼다.
데스핸드와 조각술 승부를 겨루기 전에, 얕보이기 위해 일부러 실패작 황소를 만들었다. 명성의 손해까지 감수
하며 쌓았던 경험이 있다. 황소를 조각하는 데 훨씬 능숙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뿔은 30센티 정도에 끝은 철판도 뚫을 정도로 뾰족하게 만들고, 얼굴은 넓적하게 했다.
근육질의 황소임에도 엉덩이는 질펀했다.
"한우의 얼굴은 넓적해야 돼. 엉덩이는 클수록 좋아. 눈은 동그래야 해."
소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위드가 조각품을 완성했다.
『-만드신 조각품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누렁이."
『-누렁이가 맞습니까?』
지금은 검은색 소지만 차후 누런색으로 염색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위압감과 공포감까지 느껴질 정도의 5미터 거구의 흑우를 보며 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는 누렁이가 딱이지."
띠링!
『역사적인 조각품, 황소의 전설 누렁이를 완성하셨습니다!
조각술계의 전설!
그가 조각한 모든 것들은 베르사 대륙의 역사가 된다.
고귀한 재능과 풍부한 예술성,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섬세한 재주로 다시금
경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창조했다.
소의 근엄한 매력과 역동성이 느껴지는 작품.
색다른 해석과 관점으로 가축계의 전설적인 조각품이 될 것이다.
예술적 가치:거장 조각사 위드의 작품.
6,124
특수 옵션:누렁이를 본 이들은 생명력과 마나 회복 속도가 하루 동안 15% 증가
한다.
누렁이를 본 이들은 사냥 시 고기 계열 식료품을 획득할 확률이 하
루 동안 49% 증가한다.
힘 80 상승.
인내력 25% 증가.
생산 계열 작업 능률 5% 향상.
암컷 소들의 번식 능력 38% 증가.
소들의 체중 증가가 빨라짐.
일대에 소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의 활동을 억제함.
다른 조각품과 중복 적용되지 않음.
지금까지 완성한 역사적인 조각품의 숫자:1 』
『-조각술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손재주 스킬의 숙련도가 향상되었습니다.』
『-명성이 412 올랐습니다.』
『-예술 스탯이 70 상승하셨습니다.』
『-힘이 3 상승하셨습니다.』
『-인내력이 10 상승하셨습니다.』
『-소에 대한 역사적인 조각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소에 대한 친밀도가 높아지고, 넓은
초지를 소유하고 있다면 저절로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재능 있는 조각사들이 이 조각
품을 본다면 조각술을 수련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역사적인 조각품을 만든 대가로 전 스탯이 2씩 추가로 상승합니다.』
위드는 역시 만족했다.
"소만큼 우리 민족을 잘 이해하고 보답해 주는 가축도 없어."
소에 대한 고마움!
과거에 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농사를 짓기도 어려웠을테고, 많은 이들이 기아에 허덕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농기계가 발달하기 전까지 한국인들의 식량 산업에 무궁한 도움을 주었던 소.
위드는 곧바로 보은을 내리기로 했다.
이토록 훌륭한 조각품을 단지 감상만 하기에는 아까웠다.
게다가 여기는 일반인들이 올 수도 없는 장소이지 않은가!
"조각품에 생명 부여!"
『-조각품에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조각품의 능력은 현재 설정된 예술 스탯 1,316에 따라 레벨에 맞춰 422로
변환됩니다.
역사적인 조각품의 효과로 인해서 15%의 레벨이 추가되어 485로 늘어납니다.
바위의 재질이 약하여, 20%의 레벨이 패널티로 줄어듭니다.
생명체에 세 가지의 속성이 부여됩니다.
조각품의 모양과 수준에 따라 부여되는 속성의 수준과 능력치가 다릅니다.
인내의 속성(100%), 땅의 속성(100%), 충직함의 속성(100%).
인내는 어떠한 일에도 참을성을 키워 줍니다. 방어력이 증대하며, 독이나
마법 공격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땅의 속성은 약간의 방어력과 무거움을 더해 줍니다. 대지와의 친밀도로
인하여 특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충직함은 주인의 말을 잘 따르게 합니다. 쉽게 주인을 택하지는 않지만, 주인
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 죽는 순간까지 충심을 바칠 것입니다.
역사적인 조각품이기에 특수한 능력이 부여됩니다.
소들에 대한 지배력을 갖습니다. 누렁이를 본 수소들은 머리를 숙이고 복종할
것이며, 암소들은 안도하며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광란의 폭동.
누렁이는 온순하며 충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
지만 굴욕, 어린 소에 대한 학대, 주인의 죽음을 목격하면 미쳐서 날뛸 수 있
습니다.
마나가 5,000 사용되었습니다.
스킬의 효율이 증가해서 생명을 부여할 때 소모되는 레벨과 스탯의 양이 20%
감소합니다.
예술 스탯이 6. 영구적으로 줄어듭니다. 줄어든 스탯은 조각품이나 다른 예술
과 관련된 활동을 통해 보충할 수 있습니다.
레벨이 1 하락합니다. 레벨 하락에 따라서 보유하고 있는 스탯이 5 줄어듭니다.
줄어든 스탯은 레벨을 올리게 되면 다시 부여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부여된 조각품을 소중히 다루어 주십시오. 목숨을 잃으면 다시 생명을
부여해야 합니다.
완전히 파괴되었을 경우에는 되살릴 수 없습니다. 』
누렁이!
시커먼 눈동자에 빛이 어렸다.
뒷발로 땅을 긁으며 소 머리를 쳐들었다.
음머어어어!
누렁이의 듬직한 울음 소리였다.
위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바위의 재질이 좋았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탈것으로는 최상급!
"누렁아."
누렁이가 순박한 눈을 끔벅였다.
근육질의 거대 황소였지만 눈빛만은 선했다.
누렁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뜻이 전해졌다.
"누렁이가 내 이름인가?"
"그래."
황소가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조각품으로 만들면 빙룡도, 와이번도 말을 했으
니까.
위드와는 정신적인 교감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도 알아들을 수는 있지
만 무시하거나,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빙룡이나 금인이처럼 지성이 뛰어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나 엘프 등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했다.
"이름이 썩 좋은 것 같지 않다. 거친 나의 행동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누렁이가 뒷발로 땅을 심하게 파헤쳤다.
땅이 바스라지면서 자갈들이 뒤로 튀었다.
과연 힘이 좋은 황소!
"누렁이가 얼마나 정감이 있고 좋은 이름인데. 앞으로 네 이름은 누렁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주인이군."
누렁이는 까칠하게 나왔다.
충직한 소였지만, 초반에는 경계심을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겁 많은 새끼 송아지들처럼 위드에 대해 살피고
있다.
위드의 차후 행동을 보고 태도를 결정하려는 느낌이 전해졌다.
"앞으로 나와 무엇을 할 생각인가. 나는 넓은 초지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어여쁜 암소를 만나
송아지를 낳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자유 방목을 꿈꾸는 누렁이의 욕망!
위드는 고개를 저었다.
"너 타고 몬스터 사냥할 건데."
"......"
누렁이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사냥이나 전투에 대해서는 소의 습성상 거부감을 갖고 있는 모습이었다.
위드는 이 순진한 소에게 세상에 대해 가르쳐 줘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유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줄 알아? 너 돈 있어?"
"없다."
"초지라고 했는데, 넓은 초지에 니 땅이 있어?"
"없다."
"돈 없고, 땅 없고, 예쁜 암소가 널 좋아해 줄 줄 알아? 쯧쯧. 요즘 암소가 얼마나 영악하기
짝이 없는데."
"......"
"새끼 소는 어떻게 기를 거야. 니 새끼가 평생 잡초만 뜯어 먹고 살게 하고 싶어? 영양분
가득한 건초라도 먹이려면 뭐라도 있어야 될 게 아냐."
사회의 쓴맛을 소에게 알려 주는 위드!
누렁이의 기세가 꺾이고 온순해졌다.
"생활에는 돈이 필요하겠군.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는 이유를 이해한다."
누렁이는 금방 설득당했다. 위드가 주인이기 때문에 일단 복종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누렁이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더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완벽한 근육질의 몸통의 옆구리에 한 뼘
정도 씩의 군살이 붙어 있었기 때문.
네발로 걸을 때마다 군살들이 출렁거렸다.
"주인, 여기는 뭔가?"
"거긴 꽃등심."
"......"
꽃등심과 아롱사태 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위드!
누렁이는 노골적으로 불만인 듯이 뒷발로 땅을 파헤쳤다. 무력시위를 하는 것이다.
씨알도 안 먹힐 행동.
위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누렁아, 보자 하니 너의 오만방자함이 끝이 없구나."
"흥."
"내일부터 코 꿰서 끌고 다닌다."
"......"
"밭일 시킨다. 농사지을래? 황무지 개간하고 싶어?"
"......"
"도축해서 냠냠 꿀꺽한다. 소에는 된장도 안 바르는 거 알지? 육회로 그냥......"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난 사골에 소꼬리까지 안 남기는 사람이야."
협박을 하라고 하면 2박 3일도 가능한 위드였다.
누렁이가 어느새부터인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순종!
이것으로 누렁이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위드는 누렁이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조각품을 더 만들었다.
빛을 이용한 조각품.
빛의 날개를 만든 이후로 숙련도를 더하고, 고심으로 시도한 조각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선명한 붉은색.
화염을 형상화한 것처럼 농도가 짙었다.
거대한 새를 만들었다.
빛을 이용한 조각품이기에, 작은 형태를 만들기가 훨씬 더 어렵다. 기술적으로 완전하지 않기에 세밀함 대신
크기로 승부하는 것이다.
불사조!
붉은빛에 화염의 성질을 더한 조각품을 만들고 생명을 부여했다.
조각품은 빛의 대작이 아닌 명작이 나왔지만, 그 자체로도 나쁘지 않은 성공작이었다.
불사조의 특성은 특히 훌륭했다.
『꺼지지 않는 불의 속성
체력이 완전히 다 사라지더라도 작은 불길만 있으면 되살아납니다.
되살아날 때에는 최대 생명력과 마나의 50%씩을 보유합니다. 』
불사조다운 훌륭한 면모!
위드가 만들어 내는 조각품들은 강함도 중요하지만, 생명력의 지속성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네크로맨서야 약간의 마나와 사체만 있으면 꾸준히 언데드들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위드는 조각품에 생명
을 부여할 때마다 레벨과 예술 스탯을 소모한다.
애써 조각품을 깎아서 언데드보다 더 강한 놈들을 만들더라도, 죽으면 그걸로 끝!
조각품들은 독립된 개체로서 충성을 다한다.
그들이 전멸당하면 위드의 손실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늘고 길게.
생명을 부여한 조각품들은 소모품이 아니라, 단점을 보완해 주며 함께 성장해야 할 가족이었다.
"불사조가 괜찮군."
위드는 불사조를 총 5마리 만들었다.
모양이 같은 조각품들이라 다시 만들 때에는 걸작들밖에 나오지 않았다.
최종적인 레벨도 400이 간신히 되었다.
"너희의 이름은 불사조 오형제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불사조들이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였다.
위드는 누렁이에 탄 채로 불사조들의 인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