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6 <-- 던전 구상 -->
=========================================================================
시엘의 감각 공유로 갔었던 개울가는 상당히 가까웠다는 느낌인데, 실제로 가니 매우 험난하고 어려운 등산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던전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황량한 들판과 폐허에 가까운 잿빛 지평선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자 던전 입구 반대쪽에 있는 작은 뒷산은 푸르름이 남아있다. 아니, 오히려 녹음이 우거지는 푸른 산이었다.
나는 괜찮다며 어깨동무를 하고 부축하려는 시엘을 두고 일어서려고 했으나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넘어졌다.
어색하게 웃었을 뿐인데, 두 네임드는 한숨을 쉬고 나를 들어 올려 개울가로 올라간다.
“으, 워, 어어, 으아아? 그만, 그만 놔 주지 않을래?”
“주인님, 조금만 참아요.”
갑자기 사람, 아니 서큐버스를 들고 뛰는 것도 무섭지만, 마구 흔들리니 속도 안 좋아지는 기분이고 어지럽고 너무 높다.
아니, 원래 이 정도의 키에서 오는 시선은 있었지만 너무 작아진 키에 적응해서일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이 아이들, 나를 들고 뛰면서도 날아다닌다. 바위와 바위 사이를 마구잡이로 날아다니는 게 꼭 영화에 등장하는 스턴트맨들 같다.
개울가에 도착하고 나니 밖은 한밤중이고, 지금은 달이 천공에 있다.
방느 몬스터들이 제대로 활동할 시기이고 나도 에너지가 많이 회복되는 듯한 느낌은 든다.
감각 공유에서 보았던 그 개울가로 왔지만, 들려오느라 어지럽고 괴로운 나는 흐르는 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호흡이라도 제대로 쉰다.
시엘은 엘프이기 때문에, 몬스터라고 해도 낮에 활동하는 게 더 좋은 편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일부러 일어나있고, 타피는 오히려 물 만난 아이처럼 붉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낸다.
하지만 흐르는 개울가는 싫어하는 듯, 내 뒤에서 나를 안고 있다.
“타피, 머리카락 냄새 맡지 말렴.”
“히으윽?”
뭘 놀란 건지, 뒤에서 안으면서 비비적거리는 뱀파이어를 생각하면 그 생각밖에 안 든다.
평화스럽게 발을 내밀어 흐르는 개울가에 담그니, 위쪽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살이 느껴진다.
하늘에는 달빛이 내려오고, 금발의 엘프는 천천히 바람을 불러들여 주변에서 불어오는 돌풍을 차단하고 시간 마법을 연습한다.
3개월 동안 기절하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시엘이 다루는 시간 마력은 더 정교해졌고, 아름다워보인다.
“시엘이 이젠 나보다 더 강한 걸까?”
“아니, 주인님. 이건……”
시엘이 부끄러운 듯 마법을 해제한다. 시간의 마력, 그러니까 세피아 색으로 빛나는 시간의 정수가 공중으로 흐트러진다.
시간의 정수를 저렇게 흐트러트릴 수 있는 건지, 순식간에 해제하는 시엘의 마력이 얼마나 늘어난 건지 궁금할 정도이다.
몸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시엘과 함께 시간의 정수로 놀았을지도 모른다.
“연습했어요…… 우리들이 코어를, 주인님을 지켜야 하니까요.”
“고마워, 시엘.”
앉은 자리에서 시엘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엘의 황금빛 눈동자는 하얀 달빛을 받아 더 반짝반짝 빛난다. 뒤에서 타피가 심술궂게 꽉 껴안는다.
“마스터, 나도 있다고요.”
“그래, 타피도 고마워.”
타피의 머리도 거칠게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타피의 머리카락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어깨로 떨어진 뱀파이어의 붉은 머리카락이 내 새하얀 머리카락과 섞인다.
타피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뒤쪽에서 가까이 다가온다.
“마스터님,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응? 무슨…… 갑자기 그러니.”
시엘은 질투하는 듯 옆에 있던 산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가지를 따온다.
그리고 이렇게 먹으라는 듯, 하나하나 따서 입에 집어넣고 챱챱 씹어 먹는다.
나도 가지를 받아 들고 한알 한알 따서 입에 집어넣는다. 달콤하다기보단 시큼한 향이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터질 때마다 시큼한 느낌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런 거로는 배를 채우긴 힘들 듯하다. 그래도 이런 걸 먹어야만 다음 인간들이 다가올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이런 것만 먹으면서 버티게 한 내가 너무 못났다.
“후……”
“주인님, 맛이 없었나요?”
“아니야, 너희들한테 이런 것만 먹고 버티게 해서 미안해.”
“……”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별들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인간일 때와는 달리 매우 깨끗하고 수많은 별이 보인다.
그대로 뒤로 누우려다가, 뒤에서 나를 안고 머리카락 냄새를 맡으면서 눈을 감은 타피가 있어 눕지는 않았다. 타피는 나를 안은 채 잠이 든 것 같다.
“시엘, 슬슬 내려갈까?”
“……네!”
“마스터……님……”
타피는 뱀파이어인데, 밤인데도 나를 품으며 눈을 감는다.
그렇게 내가 좋은 건지, 흐뭇한 마음이 들면서도 3달간 기절하고 방치한 자책을 또 하게 된다.
시엘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온다. 정확히는 시엘이 나와 타피를 동시에 업은 채로 내려온다.
엘프라서 그런지 산속에서는 거의 무적이라고 할 정도이다. 나중엔 시엘을 위한 필드도 만들어주고 싶다.
내려와서 던전의 우리 방까지 돌아오면서, 슬라임들과 스켈레톤들을 다시 살펴보고 온다.
슬라임들이 있는 첫 번째 방은 늪지대와 같은 함정 역할을 하며 인간들의 발을 늦출 것이며, 스켈레톤들은 인간들과 직접 싸울 예정이다.
이왕이면 빈 보물 상자나 미믹을 만들어 배치하면 절망감을 더 줄 수 있겠지만, 그건 DMP가 더 쌓였을 때 채우자고 생각한다.
우리의 돌바닥 스위트 룸까지 내려오니, 시엘과 타피는 잠이 든다.
시엘은 그렇다고 쳐도, 타피까지 잠을 잘 줄은 몰랐다.
소멜은 날아오다가 중간부터 잠이 들어서 시엘이 안고 왔었다.
두 명의 소녀와 한 마리의 메로우가 잠이 든 모습은 정말인지 아름답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수면이라는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코어를 지키는 수호신이라던가, 그런 종류의 것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기지개를 쭉 켜고, 코어가 있는 3층으로 유리 바닥을 뚫고 내려간다.
무의식적으로 3층까지 뚫고 내려왔지만, 어떻게 내려왔는지는 모른다.
내 코어의 옆에 있으면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고, 정말 언데드처럼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처럼 느껴진다.
온기가 돌아오고 활력이 살짝 도는 탓인지 몸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 같다.
혹시 코어 주변에 있어야만 체력이나 마력이 회복되는 걸까?
운디르나 선배님께 여쭤볼 게 너무 많아서 머릿속에 다 정리하지도 못할 정도다.
우선 머릿속으로 네임드들과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던전의 구성 방법이라던가, 내 던전이 어떤지 평가받아야 하기도 하고, 어둠 속에 갇힌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을 듣고 싶다.
그래, 몸이 약해진 걸 회복시키는 방법이나, 코어에서 던전의 구조를 보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몬스터를 세는 방법도 물어봐야 한다.
코어의 옆에 있으니 마치 명상을 하는 듯 정리하기 쉬워진다.
아리에타 씨에게 배웠던 명상 방법이 도움이 되는 건지, 마력으로 하는 호흡도 편안하고 몸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해준 모두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잠이 안 온다.
이건 인간으로서 멀어진 증거다.
깨어있는데도 항상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고, 머리가 팡팡 돌아간다.
다시 2층으로 올라오니 아이들은 잠을 자는데,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잠을 잘 수가 없다. 마치 거부당한 느낌이다.
쓸쓸하게 2층을 걷다가, 위쪽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기에 한발 한발 움직이며 걸어 나온다.
코어의 옆에서 온기를 얻은 탓인지 몸에 활력이 돌아 홀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입구로 나오자, 익숙한 물빛 정령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인간형 신사 모습의 장년, 그리고 뒤쪽에 있는 서큐버스 언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고, 달려가 운디르나 선배님을 안았다.
“선배님!”
내 옷이 물에 마구 젖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운디르나 선배님을 보니 그저 달려가고 싶었다.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 선배님을 보니 그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다.
“후후, 세이나. 일어나자마자 무리하면 안 돼. 알겠지?”
“……그런 건 안 알려주셨잖아요.”
“몸이 나른하고 피곤하지 않니? 물론 우리는 잠이 없으니까 피곤하다는 말은 틀린 걸까? 흐흐”
운디르나 선배님은 역시나 평소같이 푸근한 말투로 말씀하신다.
“묻고 싶은 거 잔뜩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코어로 가서 이야기해요!”
“응응, 알았어 세이나. 벌써 던전을 꾸며놓은 거야? DMP는 부족하지 않았어?”
“엄청 부족했어요. 지금 먹을 게 없을 정도라니까요!”
“아아, 그래, 그래서 아리에타도 왔단다. 아리에타와 몬스터들 100기를 풀어줄 테니까, 내 DMP를 써서 한 구획을 만들자꾸나.”
“……네? 그래도 되는 건가요?”
선배님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내 던전인데 어떻게 구조를 만든다는 거였지?
내 DMP를 이용해서 선배님의 던전 안에 구조를 만들었던 기억이 나기는 한다.
“세이나의 던전에서 인간들이 도망가는 걸 보았거든. 아마 협박해서 돌려보낸 거겠지? 그 인간들에게서 보호할 병력은 있어야 하잖니.”
“그, 정말로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다른 마스터들은……”
“아, 회의에서 들었거든. 우리들은 고유 스킬이 없는 미약한 마스터는 보호하기로 했기 때문에 한 구획 정도 만들어주는 건 괜찮단다.”
“그럼…… 저는 다른 마스터들에게 알려진 건가요?”
“그래, 던전의 힘을 키우기 전까지 시간 마법은 알려주면 안 돼, 알겠지?”
“네…….”
나는 또 거대한 숙제를 안아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