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23)화 (23/167)

제23화

“리벨 이벨라.”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자줏빛 눈동자와 발랄하게 웨이브 진 머리칼이 활발한 분위기를 주는 영애였다.

이야기할 땐 엉뚱한 곳에서 당황하고는 하는 점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특한 사람이기도 했다.

―우우웅!

감정이 들끓을 때만 움직이던 마력이, 다시 조용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녀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쿵쿵.

모종의 결심을 한 그가 노크하듯 책상을 두드리자, 다른 기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찾으셨습니까, 단장님?”

“리벨 이벨라 영애께 사람을 보내서 여쭤봐. 내일 만나 뵐 수 있는지.”

“알겠습니다.”

부단장의 부관이자 비서 역할을 담당하는 이 기사는 이미 결혼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명령을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달칵.

다시 문이 닫힌 사이, 시스테인이 생각했다.

곧 만나 뵐 수 있을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던 자줏빛 눈, 마력을 가라앉혀 주는 기묘한 그 사람을.

하지만 그의 계획은 조금 어긋나 버렸다.

몇 시간 후, 엉뚱한 연락이 돌아온 탓이었다.

“이벨라 영애와 연락이 안 됩니다. 오늘 낮부터 저택에서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사라져?”

기사의 보고는 시스테인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감정이 겉으로 크게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안전에 위협이 있으신 건 아닌가?”

그의 침착한 말에 기사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오전 기자들이 이벨라 저택에 몰려간 후 명령하신 대로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습니다만, 수상한 자들은 없었습니다.”

기사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황태후 폐하 소속의 기사들이 이벨라 영애를 호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께서 위험해지셨다면 이미 연락이 왔을 겁니다.”

기사는 궁금했다.

리벨 이벨라라는 이름은 지난번에 신문에서 처음으로 봤는데, 언제 단장님과 만났고 언제 황태후 폐하의 신임을 얻어 호위기사까지 얻게 되었는지.

그만큼 마음에 드는 며느리였다는 뜻일 텐데.

리엔의 그림자에 대해서 모르는 기사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그래, 그들이 있었지.”

시스테인은 기묘하게 날뛰는 마력을 잠재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사와는 달리 제 어머니의 기사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있었다면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내일은 그럼 뵐 수 없다는 거로군. 편지라도 남겨 놓고 오도록.”

그가 손짓했다. 내일이 안 된다면 모레는 뵐 수 있을지.

모레라도 이 끓어오르는 마력을 가라앉혀 주실 수 있을지.

“알겠습니다.”

기사가 나가는 사이, 시스테인은 다시 떠올렸다.

그녀의 반짝이던 자줏빛 눈동자를.

어딜 가든 눈에 띌 그녀인데, 어떻게 사라진 걸까.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휘하에 있는 기사단, 그중에서도 특별한 임무를 띠는 비밀 집단 ‘감찰기사단’의 일원들도 정보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들의 비리를 감시하고 감사를 나가는 기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사들에게조차 들키지 않고 나갔다는 건, 기묘한 일이었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나 눈에 띄는 사람인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조금은 궁금해졌다.

*  *  *

“이야, 이거 진짜…… 아주 괜찮은 천이네요.”

다른 것에 감탄하고 있던 리벨은 재빨리 만지고 있던 천 얘기를 덧붙였다.

“그렇다니까! 내가 직접 짰어! 50년 수공예 장인을 못 믿는 건 아니겠지?”

당당한 말을 하는 것치고는 상인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바로 근처의 상가가 불량배들에게 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는 조금 전에 동전 5개를 곱게 바치고 장사로 복귀한 참이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눈에 잘못 띄었다간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 돈을 재차 뜯어내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저 집이 마지막이니까, 저놈들도 곧 가겠지…….

천을 팔던 상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님들은 언제 오신담…….”

무심코 상인이 중얼거리는 말에, 리벨의 귀가 쫑긋 섰다.

“네? 기사님들이요?”

“아아아니!”

상인은 화들짝 놀라 리벨의 입을 틀어막았다.

“말실수야, 말실수. 그래서 이거 살 거야, 말 거야?”

“흐음.”

말실수 아닌 것 같은데~ 제대로 말한 것 같은데~

리벨은 가사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천을 더 살피는 척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물론 그 옆에서 형 연기를 하는 나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께서 이런 천은 싫다고 하셨어. 좀 더 부드럽고 살갗에 닿을 때 편안하지만 잘 늘어나면서도 빨래하면 다시 돌아오는 좋은 천은 없을까?”

그런 게 있겠냐? 리벨이 황당해할 때였다.

“어떤 놈들이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벨이 기겁했다.

그러게, 이 구린 대사를 치는 건 어떤 놈들이야?

리벨이 홱 돌아보니 놀랍게도 그 대사를 친 건 디엘렌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또 너희들이야?”

기사들은 불량배를 처억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불량배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 씨, 젠장!”

“도망쳐!”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쫓아라!”

기사 몇 명이 그들을 따라 뛰어갔다. 그러는 사이 높은 기사처럼 보이는 자가 상인을 안심시켰다.

“괜찮은가?”

“감, 감사합니다!”

상인은 안심한 얼굴로 가판대에 힘없이 기대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것 같군……, 피해는?”

기사는 안타까운 얼굴로 상인을 살폈다. 그는 손수 어질러진 가판대를 정리해 주기까지 했다.

“괜찮습니다!”

상인이 화들짝 놀라 가판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적절한 시점에 나타나 이번 주 자릿세는 면할 수 있었다는 게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저번 주에는 일찍 와 주셔서 나도 안 뜯겼는데…….”

그때 천 상인이 중얼거렸다. 리벨이 흘끗 상인을 쳐다보았다.

“매주 자릿세 내시는 거죠?”

그 말에 천 상인은 불량배가 주변에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매주 이 시간에 와요?”

리벨이 불량배가 사라진 쪽을 보며 물었다. 천 상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니야. 언제 올지 몰라. 알면 기사님들이 지켜 주셨게?”

천 상인이 말하는 사이 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저번처럼 놓치면 안 된다! 샅샅이 뒤져 흔적 하나라도 놓치지 마라!”

“예!”

앞서 놈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기사들 뒤로, 침착하게 흔적을 더듬으며 그들을 추적할 두 번째 추적조가 투입되고 있었다.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름 열심히 수색하는데?

이상한 건 저렇게 수색하면서 매주 놓칠 리는 없다는 거다.

분명 자릿세는 꽤 오랫동안 걷어 온 것 같은데, 기사들이 아무리 무능해도 그동안 한 번도 놈들을 잡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놈들이 기사단에 잡힌 적이 있다면, 어떻게 또 시장에 수금을 하러 나타난단 말인가?

그 정답은 천 상인에게서 튀어나왔다.

“저놈의 것들…… 잡아도 잡아도 또 기어 나오는 게 어디 산적 떼 놈들일지도 몰러.”

천 상인의 말에 리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끊임없이 온단 말이지.

“아, 매주 같은 사람이 오는 게 아니에요?”

“같을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고 그러지.”

천 상인은 불량배들이 간 후라 그런지 좀 더 편히 이야기했다.

“그래도 여긴 안전한 편이지. 기사님들이 저렇게 와 주시잖아.”

“아하…….”

그러니까, 일주일마다 오지만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지도 않고, 하물며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몰라서 돈을 걷어 간다는 제보를 듣고서야 기사들이 투입된다는 거지?

리벨이 눈을 반짝였다.

이건 개소리다. 멍멍.

취재를 수도 없이 해 본 그녀는 귀족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알았다.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여기서 들을 건 다 들은 것 같다. 사진도 아까 상점 사이 돌아다니는 척하면서 충분히 찍었고…….

“아, 역시 천은 어머니 모셔 와서 다시 봐야겠어요. 난 까막눈이라 아는 게 없네.”

리벨은 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천 상인이 툴툴댔다.

“안 살 거면 말을 왜 걸어!”

“이거 살려고 걸었지요.”

말만 많이 하고 물건을 안 사는 놈은 진상이다. 그리고 진상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리벨은 은화 하나를 꺼내 중간 정도에 있는 천 두 뭉치를 집어 들었다.

“이거 두 개, 은화 하나 맞죠?”

하지만 물건을 사 간 사람은 손님으로 남는다.

그리고 단골이 아니라면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맞지. 경우가 된 젊은이구만.”

천 상인이 만족하는 사이, 리벨은 천 뭉치 2개를 든 채 자리를 떴다.

*  *  *

리벨은 상점에서 멀어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나인 경, 혹시 저 기사들 뒤쫓을 수 있어?”

그 말에 형 행세를 바로 관둔 나인이 물었다.

“불량배들이 아니라, 기사들 말씀이십니까?”

“둘 다 쫓으면 좋긴 한데, 사람 부족하면 기사만이라도.”

리벨이 눈을 찡긋했다.

그녀의 느낌대로라면 둘 중 어떤 자들을 쫓아도 같은 곳으로 갈 것 같았지만, 확실히 현장을 잡기 전엔 확신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럼 모두 쫓으라 이르겠습니다.”

나인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해 보였다.

지나가듯 보기에는 눈에 띄지 않는 수신호였지만 누군가들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

“…….”

주변에서 물건을 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리벨은 그 모습에 감탄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맞다, 죽이지 말고!”

리벨의 급한 속삭임에 나인이 다시 수신호를 날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죽이려고 했냐! 이 쓱싹맨들! 

리벨이 이마를 짚을 때였다.

“놈들의 움직임이 빨라 바로 뒤따라가시려면 지금 마차를 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인이 말했다.

대체 수신호로 어떻게 저런 정교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거지? 의아함도 잠깐, 일단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