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마차는 현장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소리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리벨과 소리 없이 움직이는 나인이 현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원래 수상한 놈들은 외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법!
그리고 외진 곳은,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숨을 곳도 많다는 뜻이 된다.
“왔나?”
“예.”
“뒤따라오는 자는?”
“없었습니다.”
검은 로브를 쓴 자와 불량배 놈들의 대화였다.
뒤따라온 자 여깄습니다!
리벨은 속으로 손을 들며 그들을 살폈다.
“좋아, 오늘은 얼마지?”
주변을 휘이 둘러본 로브의 남자가 후드를 젖혔다.
그러자 드러나는 건, 다름 아닌 시장에서 본 디엘렌 가의 기사였다.
오와우, 대박.
리벨은 슬그머니 카메라를 꺼내 그 현장을 찍었다.
물론 빙의 전 세계와는 달리 화질은 구렸지만, 이 정도로도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굳이 화면에서 연예인 모공까지 보일 정도로 좋은 화질은 일상생활에는 필요 없거든요.
리벨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그들을 살폈다.
“오늘이…… 어디 보자, 12골드 7실버 정도입니다.”
불량배의 말에 기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동전은 가져.”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10골드는 내놓고.”
“넵.”
아까는 껄렁하기 그지없었던 불량배는 지금은 아주 깍듯했다.
강한 자에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전형적인 인간상이었다.
리벨은 그 꼴을 보면서 감탄했다.
“이야…… 이거 생각보다 더 쓰레기들이었네.”
그녀의 입 안에서나 맴돌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나인과 다른 황태후의 그림자들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흘끗 리벨을 향했다가 떨어졌다.
“그럼 다음 주 이날에 또 보자고. 10골드 이상 꼭 챙겨오는 거 잊지 말고.”
기사가 손을 흔들자 불량배들은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펄럭!
기사 역시도 검은 후드 쓴 채 자리를 재빨리 벗어났다.
몇 번 더 사진을 찍은 리벨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야, 난 상인들한테 돈 뜯는 놈들을 기사들이 눈감아 주고 있는 줄만 알았지.”
그런데 주기적으로 돈을 뜯으라고 시킨 거였어?
게다가 돈을 주고받는 걸 보니, 아까 기사들이 상인들을 구해 주고 불량배를 쫓아냈던 것도 다 짜고 치는 연기였던 게 분명했다.
‘그래도 여긴 안전한 편이지. 기사님들이 저렇게 와 주시잖아.’
리벨은 그렇게 말했던 천 상인을 떠올렸다.
다른 시장은 불량배들이 자릿세를 뜯어도 기사들이 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야 그렇겠지.
다른 시장에 기사를 파견하지 않으면 당연히 안전 문제로 이 시장에 사람들이 몰릴 거고, 그럼 자릿세 수익은 더 올라갈 테니까.
“으.”
더티하다, 더티해. 리벨은 손을 툭툭 털면서 수풀 사이에서 일어났다.
“뭐? 사랑스러운 어쩌구는 알 필요가 없어?”
리벨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건 롤란드가 언젠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우연히 봤던, 롤란드가 접촉한 수상한 자들은 십중팔구 저런 자들이었음이 분명했다.
“저놈들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리벨이 수풀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나인이 불쑥 말했다.
“알아보겠습니다.”
당당하게 걸어가던 리벨은 발을 삐끗할 뻔했다.
그러게? 내가 직접 알아볼 필요가 없네?
황태후 폐하는 무려 기사들을 마음껏 부려먹으라고 하지 않았는가?
“오…….”
리벨은 반짝이는 눈으로 나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 문제를 깨달았다.
“나인 경, 혹시 사진 잘 찍어?”
빙의 전 세계야 스마트폰이 활성화된 곳이라 사진이라면 일단 거의 찍을 줄 알았다.
그 사진이 예쁘냐와는 별개로.
하지만 이 세계는 달랐다.
이 카메라도 가격이 있어 신문사 편집부에서 대여해 준 마법 카메라였다.
잃어버리면 월급은 물론이고 잘하다가 반년 치 연봉이 날아갈 수 있는 귀하신 물건.
그런 만큼 다룰 줄 아는 자가 다뤄야 했다.
리벨의 말에 나인이 멈칫했다.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 답에는 리벨이 멈칫했다. 이거 잘하다가 카메라, 아니 내 반년 치 연봉 작살나는 거 아니냐?
하지만 멈칫한 건 아주 잠깐이었다.
황태후 리엔에게서 전해진 행복한 돈주머니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거면 이런 후진 카메라가 아니라 좋은 카메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리벨은 기쁜 얼굴로 나인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대충 이거만 누르면 돼. 철컥 소리 나면서 마법 필름에 알아서 저장되거든.”
리벨은 셔터 버튼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습득이 빠른 나인은 바로 리벨을 찍어 보았다.
―찰칵.
수풀 흔들리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말씀이십니까?”
나인이 물었다. 리벨은 답하기 전에 카메라를 뺏어 들고 필름을 꺼내 보았다.
마법 필름이라 나인이 뭘 찍었는지는 선명하게 보였다. 물론 햇빛에 필름이 상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
그리고 그 모습에는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목 아래만 찍혀 있었다.
너는 사람 목 썰고 다닌다고 사진에서도 썰어 버리면 어떻게 하니?
“……사람 얼굴 나오게 찍기. 오케이?”
그 말에 나인이 심각한 얼굴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한다고는 안 하네. 리벨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적들 본진 가서 나인이 엉뚱한 사진 찍어 오면, 내가 다시 가서 사진 찍으면 되지.
어차피 위치는 알아 올 테니까.
―찰칵.
그때 사진기 소리가 다시 들렸다.
리벨이 돌아보자, 카메라를 제 신발에 들이대고 있던 나인이 움찔했다.
“소리 나니까 안 들키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나인이 다시 진지해졌다.
모르는 물건 앞에서는 황태후 폐하의 그림자라도 허당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리 만능으로 키웠어도 암살자가 기자 일까지 잘하겠어?
고개를 끄덕인 리벨은 마차로 향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덜컹!
돌아가는 길. 리벨은 다시 평민 여자의 차림을 한 채였다. 이제 이벨라 저택 근처에서 원래 모습으로 바꾼 다음, 외출 다녀온 척 들어가면 된다.
“흐음. 롤란드 놈 멕일 기사 초안은 이 정도면 됐고.”
흔들리는 마차에서 기사 초안 쓰는 거야,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리벨은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분명히 내일쯤 기사가 뜰 텐데.”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건 자신의 기사가 아니었다.
슈, 그러니까 베니카 영애가 쓴 기사가 뜰 터다.
왜냐고?
내가 디엘렌 가 마차 막았잖아? 그러니까, 베니카 앞 막았잖아?
내 남편 될 놈을 뺏은 것도 모자라서 졸렬하게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줄줄이 써 대며 리벨 이벨라를 집중 취재했던 그녀가, 이번 사건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탁!
수첩을 접은 리벨은 수첩 뒤쪽에 끼워 두었던 슈에 대한 정보를 다시 살폈다.
“참 나.”
베니카 영애 사진이 붙어 있는 걸 보니 두 번 봐도 어이가 없었다.
“업계인끼리 기삿거리 뺏는 건 봤어도 남편 뺏는 건 또 처음 보네.”
이런 더러운 싸움은 전생 현생 통틀어 처음이었다.
물론 지금은 쓰레기를 쓰레기가 가져갔으니 분리수거 했다고 치지만, 그와는 별개로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탁! 탁! 탁!
리벨은 종이를 칼 각으로 접어서 다시 수첩에 집어넣었다.
저쪽에서 나를 책잡기 전에 기삿거리를 건졌으니, 터뜨릴 타이밍만 보면 되는데…….
“롤란드 결혼 전이 좋으려나, 후가 좋으려나?”
흔들리는 마차에서 그녀는 고민했다.
그리고, 리벨의 고민은 이벨라 저택에 무사히 도착한 후 들린 소식에 증발해 버렸다.
“대공 전하께서 찾으셨습니다.”
저택에 대기하고 있던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이자 새로 들어온 하녀가 말했다.
“헉, 낮에?”
그때 나 없었잖아! 리벨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릴 때였다.
“외출 사실만 알고 가신 것 같습니다.”
저택에 남은 그림자들은 이벨라 저택을 살피러 온 기사들에게 대응할 수 없었다.
그들은 ‘황태후의 그림자’에 대해 아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미리 말하고 나갈 걸 그랬나.”
리벨이 머리를 긁적였다.
시스테인은 어디에 갔는지 제대로 못 들었을 텐데.
“걱정하진 않았겠지?”
시스테인이 나를 걱정하는 인간 군상이었으면 황태후 폐하께서 굳이 나한테 감정을 깨워 달라고 부탁을 했을까요?
NO!
간단하게 결론 내린 리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영지 좀 둘러보고 왔다고 해야겠다.”
거짓말하는 건 미안하지만 직업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럼 내일 오후에 뵐 수 있느냐고 연락해 봐.”
하녀에게 손짓한 리벨이 책상에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하녀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 일정 말씀입니다만, 내일 오후에 황태후 폐하께서 두 분과 식사 시간을 갖고자 하십니다.”
“으으응?”
리벨이 우뚝 굳었다.
왜? 중간보고 뭐 그런 거?
혹시 성과에 못 미치면 모가지 쓱싹되는 구조였나요, 폐하?
리벨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