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44)화 (44/167)

제44화

“어서 오십시오, 디란타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

하하하하! 그렇게 웃는 디엘렌 백작의 웃음소리는 앵무새에게 대신 웃어 보라고 해도 이보다 자연스러울 듯했다.

롤란드의 입꼬리는 웃는 듯 올라가 있었지만 못으로 입꼬리를 고정이라도 해 놓은 듯, 부자연스럽게 파들거리고 있었다.

“…….”

시스테인은 그들의 인사를 고개를 까딱여 받았다.

그리고 리벨의 손을 잡아 완벽한 예법으로 에스코트했다.

“크, 크흠.”

롤란드는 옆을 스쳐 지나가는 리벨을 보면서 심각하게 갈등했다.

알은척해야 하나?

분명 얼마 전까지는 반말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롤란드는 결국 떫은 웃음을 지으며 리벨에게 말했다.

“환……영합니다, 대공비 전하.”

리벨의 시선이 흘끗 롤란드 디엘렌을 향했다.

감찰에서 나오자마자 연회 준비를 하느라 바쁘긴 했는지, 눈에 판다 같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아무리 화장해도 숨길 수 없는 것도 있지.

리벨은 그가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권력에 발발 떠는 꼴이, 아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디엘렌 영식.”

리벨은 고개 한번 안 까딱이고 말했다.

롤란드가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금의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신 분들께서 이런 곳까지 어쩐 일로 오셨는지…….”

물어볼까 말까 고민한 태가 났다. 리벨은 웃음을 삼켰다.

제발 돌아가길 원하는 게 눈에 보였다. 실수로 왔다고 말하길 원하는 게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

리벨은 디엘렌 별저 쪽을 돌아보았다.

“디란타 대공 전하께서 오셨어.”

“대공비 전하께서도…… 그럼 여기가 대공비 전하의 데뷔탕트 연회가 되는 건가?”

“세상에, 이런 영광이.”

이미 귀족들의 시선은 모두 디란타 가에 몰려 있었다.

과연, 디엘렌 가에서 제발 두 사람이 돌아가길 원할 만도 해다.

이곳은 디엘렌 가의 건재함을 보여 주기 위한 연회지, 디란타 대공비의 데뷔탕트를 위한 연회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그걸 신경 써 줘야 할까요?

리벨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롤란드 디엘렌의 눈앞에서 흔들어 주었다.

“초대받아서요.”

그녀가 더욱 눈부시게 웃었다.

그러면서 왠지 리엔 황태후가 떠오른다고 생각했다.

디엘렌 가 사람들에게는 사악하게 보일 이 해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하지만 미소가 나오는 걸 어떡해?

리벨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초대장을, 잘못 보냈다고 할 셈은 아니겠죠?”

그녀의 말에 디엘렌 백작과 롤란드 디엘렌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들의 심경은 단 하나였다.

차라리 잘못 보냈으니까 가라고 하고 싶어!

하지만 이미 연회의 주인공은 바뀌고 있었다.

*  *  *

“아니, 왜 하필이면 여기냐고!”

급히 빈방으로 들어간 롤란드 디엘렌은 씹어 뱉듯이 외쳐 댔다. 그리고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리벨 이벨라……!”

이제는 리벨 폰 디란타겠지만 그는 이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얼마를 써서 만든 기회인데!”

앞으로 디엘렌 가가 다시 재기한다고 해도 이런 거대한 연회는 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공들이고 공들여서 준비했는데……!

―쾅! 쾅!

그가 벽을 주먹으로 연거푸 내리쳤다. 그래도 이미 주인공은 디란타 대공 부부가 되어 있었다.

“아, 쓰.”

물론 분노와는 별개로 손은 엄청나게 아팠다.

낡아 빠진 건물을 얼마나 튼튼하게 보수했으면 주먹이 쪼개질 지경이었다.

“이…… 분명히 리벨 그것이…….”

분명히 나를 골리려고 한 짓이다.

디엘렌이 감찰기사단에 털리기도 했겠다, 이번 기회에 아예 밟겠다 이거지?

―까득!

그가 이를 갈았다. 어떻게든 리벨 이벨라, 저걸 끌어내릴 방법이 없을까?

물론 디엘렌 따위가 디란타 대공가에 해를 끼칠 방법은 없었다. 아주 미칠 노릇이었다.

“돈이 얼만데, 돈이!”

결국 롤란드는 다시 벽을 내리쳤다. 물론 손만 더 아플 뿐이었다.

“그게 이런 거물이 될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헤어졌지!”

그가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그는 언젠가 리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난 누구에게든 기본은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그녀의 그 말에 롤란드는 동의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필요 없는 놈은 인생에 영원히 필요 없는 법이다.

이 넓은 세상에 필요한 사람 제대로 대접해 주기도 바쁜데, 쓸데없는 하류 인생들에게까지 신경 썼다간 속 터져서 죽고 말 거다.

기본이고 자시고, 내게 필요한 쪽에 맞춰 주느라 심력을 소모했으면 다른 한쪽엔 화풀이할 데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게 그의 기본적인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주로 겨냥하는 자들은 작위 낮은 귀족들이나 사용인들, 영지민 같은 자들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날고 기어 봐야, 백작 영식인 자신에게 기어오를 순 없으니까!

‘리벨, 우리 사랑을 사교계의 모두가 축하해 줄 거야.’

그렇게 속삭이자 볼을 발그레 붉혔던 리벨이 떠올랐다.

물론 그때쯤 디엘렌 가는 이미 알레로 가와 정략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결혼 이야기요? 농담이었죠. 친구 사이에 장난스레 오갈 수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리벨을 보란 듯이 걷어찼을 때.

그 인터뷰를 할 때 리벨 이벨라의 표정을 못 본 건 아주 아쉬웠다.

한 사람의 인생을 환하게 만들었다가 순식간에 진창에 처박을 수 있는 것.

롤란드 디엘렌은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그 느낌, 그 쾌감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리벨 이벨라를 그렇게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걷어찬 것도 같은 이유였다.

베니카 알레로에게 제가 ‘진심’임을 보여 줄 필요도 있었지만, 리벨의 절망하는 얼굴을 상상만 해도 쾌감이 올라왔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대체 이게 뭐냐고!”

그가 이를 다시 바득바득 갈았다.

분명히 한낱 자작가, 그것도 도박 빚에 집조차 사라질 위기였던 이벨라 자작가는 디엘렌 백작가에 감히 기어오르지도 못해야 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디란타 대공이라는 크나큰 변수에 의해.

“대체 나랑 연애하다가 언제 대공을 만난 거지?”

바람피운 거 아냐?

리벨이 들었으면 뒷목을 잡았을 어이없는 생각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대공 때문에 호의호식하는 주제에…….”

그는 조금 전 리벨이 보란 듯이 싱글벙글 웃었던 것을 떠올리며 발을 쾅쾅 굴렀다.

어차피 대공가의 힘만 없으면 리벨 이벨라는 그냥 리벨 이벨라일 뿐이다.

그리고 디란타 대공 역시, 숱한 소문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남자였다.

“남자란 다 똑같은 법이지.”

롤란드 디엘렌은 제가 남자의 사고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방자한 자였다.

리벨 이벨라가 바람을 피울 수 있다는 사실만 흘려 줘도, 그래서 디란타 대공이 그녀를 의심하기만 시작해도, 그 관계에는 금이 쩌저적 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실금이 커다란 균열이 되는 건 순식간이지.

“흥.”

롤란드 디엘렌이 소리 없이 웃었다.

리벨 이벨라와 오랫동안 사귀어 온 만큼, 그는 리벨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허구한 날 밤마다 어디론가 나가서 새벽에나 들어오는 여자.

뭘 하는지는 몰라도 분명 그 시간에 하는 짓이 건전한 짓은 아닐 거다.

롤란드 디엘렌 자신이야 그녀가 수상하다 느끼면서도 그냥 만났다.

왜?

어차피 곧 차 버릴 거였으니까!

하지만 디란타 대공이 그 사실을 안다면?

롤란드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좋아…….”

대공과 찢어지는 순간, 리벨 이벨라 그 버릇없는 것의 웃는 얼굴도 확 찢어 버릴 것이다.

그가 주먹을 꽉 쥐고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물론 최대한 부드럽게 표정 관리를 하면서.

이번 연회가 비록 디란타 대공가에 시선이 쏠렸다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무려 디란타 대공비가 데뷔탕트 무대로 쓰는 귀한 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걸 어떻게든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가 그렇게 다짐하며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 실례했소이다.”

급히 걸음을 옮기느라 남자 한 명과 부딪힐 뻔했다.

순간 얼굴을 구길 뻔했지만 그것도 잠깐, 롤란드는 곧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와 부딪힐 뻔한 남자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 평범한 자였지만 분명 낯익은 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연회에 왔다는 것만으로 디엘렌 가에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생각을 하니 롤란드 디엘렌의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그때였다.

“아, 롤란드 디엘렌 영식이시군요.”

갈색 머리의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악수를 청해 왔다.

“이번 연회에 돈깨나 쓰셨겠습니다.”

그 말에 롤란드는 최대한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물론이죠. 이렇게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데, 어떻게 부족한 건물에 모시겠습니까?”

그러자 갈색 머리 남자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과장되게 감탄했다.

“캬, 역시 디엘렌 가의 저력은 대단하군요. 감찰에게 물어낸 벌금도 꽤 클 텐데…….”

감찰 이야기에 롤란드의 눈썹이 살짝 파르르 떨렸을 때였다.

갈색 머리 남자가 제 겉옷 속주머니에서 검은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

이게 뭐지? 롤란드가 의아한 얼굴로 명함을 받아들었다.

남자는 그런 그를 살피며 빙그레 웃었다.

“언제 한번 이곳에서 뵐 수 있겠습니까?”

“이건……?”

롤란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렐라 의상실]

뜬금없이 귀족 영식들이 의상실에서 만나 이야기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명함을 뒤집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일반적인 명함과는 달리, 괴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상대에게 좋은 첫인상을 보여야 할 명함에 그려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문양이었다.

이런 뱀이 득시글거리는 문양이라니.

롤란드가 손끝을 슬그머니 뱀 문양에서 떨어뜨릴 때였다.

남자가 다시 웃었다.

“초대장이지요.”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권력과 명예,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돈을 기반으로요.”

그렇게 씩 웃은 남자가 손을 펴 보였다.

“렐라 지하에서 뵙는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렐라 지하? 여기 지하에 뭐가 있나? 무엇보다…… 권력과 명예를, 취할 수 있는 곳이라고?

……돈을 기반으로?

그런 자신 있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어지간한 자는 초대받지 못하는 곳인 모양이다.

“그럼.”

롤란드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는 걸 관찰하던 남자가 자리를 떴다.

“흐음.”

명함을 다시 뒤집어 본 롤란드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기억해 두기 위해서였다.

“……!”

그런데 그때 그와 눈이 마주친 건, 남자가 아니었다.

마침 주변에 서서 하인에게 잔을 받고 있던 리벨이었다.

움찔한 롤란드가 입을 뻐끔거렸다.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하나?

리벨이 지나간 자리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말 한번 걸어 보고 싶어 하는 수많은 귀족들과 상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말 걸기 유리한 사람은 이 연회의 주인인 디엘렌 가의 롤란드, 자신이었다.

―쌩!

하지만 리벨은 롤란드가 뭐라고 말을 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옆을 지나가 버렸다.

보란 듯이.

롤란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오, 저걸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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