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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45)화 (45/167)

제45화

“렐라 지하에서 뵙겠습니다.”

리벨이 남자와 롤란드의 대화를 들은 건 우연이었다.

“렐라?”

롤란드가 뭐라고 말을 걸려는 것 같기에, 쌩 지나오면서도 그녀는 머릿속에 남는 단어를 뇌까렸다.

“분명 최근에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단어인데.”

기자로서 오랫동안 활동한 그녀는, 단편적인 정보를 머릿속에서 연결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 덕에 그녀는, 이내 렐라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알아차렸다.

“크라이베리!”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크라이베리 신문 1면.

리벨 자신의 기사 때문에 슈의 기사가 공란으로 비었던 날, 그 칸에 뜬금없이 나온 의상실 이름이 바로 렐라였다.

“근데 의상실 지하에 있으면 뭐가 있다고……?”

아니, 애초에 의상실 지하에 창고 말고 뭐가 있어야 한단 말인가?

리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가…… 냄새가 난다! 사건의 냄새가!

그녀가 와인잔의 목을 잡고 빙글빙글 돌릴 때였다.

“신문이 보고 싶으십니까?”

시스테인이 옆에서 불쑥 물었다. 리벨은 발을 삐끗할 뻔했다.

“네?”

여기서요? 갑자기요?

“예. 크라이베리를 찾으시기에.”

시스테인이 짧게 답했다.

“아.”

리벨은 그제야 제가 신문 이름을 외쳤다는 걸 떠올렸다.

이런 세……심한 사람 같으니…….

혼잣말하는 버릇 좀! 리벨은 애써 표정 관리를 시작했다.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버릇이 여기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리벨은 직업 정신이 발동하려는 제 머릿속을 붙들어 매며 웃었다.

“요요즘 못 봐서요. 저택으로 돌아가면 봐야겠어요.”

아무 말 신공!

“……아침에 보신 신문이 크라이베리입니다만.”

효과는 미미했다! 시스테인의 표정이 다소 이상해졌다.

맞다, 그랬지! 리벨은 머리를 싸맬 뻔했다.

하지만 임기응변이 없어서는 기자 일을 못 하는 법!

“제가 그걸 자주 안 보면 그, 금단 현상이 와 가지고…….”

리벨의 아무 말에 시스테인이 눈썹을 치켜 올릴 때였다.

리벨의 구원자……가 아니라 디란타 대공가에 말 한마디라도 걸고 싶어 하던 귀족 중 한 명이 용기 내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대공비 전하.”

리벨의 눈엔 이름 모를 남귀족 뒤에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환영! 매우 반갑! 리벨이 환하게 웃자 귀족이 멈칫했다.

“이,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우십니다.”

멈칫하는 것도 잠깐, 그녀가 말을 받아주자 용기가 났는지 귀족의 말이 점점 유려해졌다.

“아, 그렇죠?”

리벨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아름답다는 말은 빈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녀가 오늘 입고 있는 옷은 엄청나게 돈을 처바른…… 결혼식용 이브닝드레스 중 하나였으니까.

정확히는 결혼식용으로 쓰이려다가 탈락(?)한 친구 중 하나였다.

“오, 대공 전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레틴 자작입니다. 이번…….”

한 귀족이 말을 거는 데에 성공하자,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우르르 두 사람 옆으로 모여들었다.

“안녕하세요.”

리벨이 한 마디를 받으면 세 마디가 돌아왔다.

“세상에, 어쩌면 이런 고급스러운 귀걸이가!”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연회에 참석하시는 것도…….”

그러니 리벨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해는 갔다. 대공가에 얼굴도장 한 번이라도 찍으려는 것이.

그들은 디엘렌 가와 어울리는 자들이니만큼 이름 없는 귀족들이나 지방에서나 영향력 좀 있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공가와 같은 까마득히 높은 귀족들과는 어울리기 쉽지 않은 자들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리벨이 어디에 답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 쏟아지자, 시스테인이 에스코트하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작은 행동이었지만, 귀족들의 말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

시스테인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그는 아무 생각 없었다.

다소 귀찮게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얼음장 같은 시선에 귀족들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저들이 불편하십니까?”

조용해진 가운데, 시스테인이 물었다. 안 그래도 굳어 있던 귀족들이 아예 냉동고에 들어간 것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아아아뇨, 그럴 리가요!”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불편한 건 맞았지만 불편하다고 했다간 ‘그럼 편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저들의 모가지를 날려 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 먼저 다가와 인사해 주셔서 너무 좋은데요! 하하하하!”

너무 좋다! 사람 죽는 것보단 낫지! 하하하하! 리벨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 그렇습니까?”

“이렇게 받아 주시니 저희야말로 영광입니다.”

얼어붙어 있던 귀족들이 간신히 녹아내리려는 찰나였다.

시스테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  *  *

시스테인인 리벨을 에스코트할 때마다, 그녀가 제 마력을 가라앉히는 걸 느꼈다.

그건 함께 보내는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와 깊이 접촉할 때마다, 그녀와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끓는 듯한 마력은 순한 양처럼 변해 그의 심장에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원래 제 감정에 따라 널을 뛰었던 것이 거짓말같이 잠잠해지는 것이다.

“…….”

그리고 그건 에스코트를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에스코트를 하며 연회장에 들어온 직후까지는 그러했다.

“대공비 전하, 이번 연회에는―”

“저희 가문 양조장에서 아주 귀한 와인이 납니다.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들이 몰려들어 말할수록 기묘하게 마력이 끓어올랐다.

처음에는 저들이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제 기분 때문에 마력이 끓어오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제 기분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열기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의 마력은 은은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

시스테인은 제 변화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 마력을 처음 알아챘을 때부터, 그렇게 실수로 형인 카리스를 죽일 뻔했을 때부터 그는, 제 몸 상태를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상태는 지금 매우 이상했다.

이렇게 제가 아니라 다른 자에게서 마력적 영향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

불안한 듯이 조금씩 떨리는 마력.

이건 내 감정이 아니라…….

시스테인의 시선이 제가 에스코트하고 있는 리벨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이 긴장 때문인지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리벨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명백하게 불편해하고 있었다.

“저들이 불편하십니까?”

시스테인은 곧바로 물었다.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홰홰홱 저었다.

“아아아뇨, 그럴 리가요!”

하하하하! 그렇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어색하기만 했다. 시스테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들이 불편하신 게 분명하다.

“…….”

시스테인의 시선이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이 연회는 분명 디엘렌 가의 연회였지만, 분위기는 이미 묘해진 지 오래였다.

중간중간 굵직한 귀족들 몇몇도 보이고, 작위가 높은 가문의 일원도 몇몇 보였지만 그들은 디엘렌 가의 일원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뒤로 선물이라도 받고 자리를 채워 주는 게 분명했다.

디엘렌의 건재함을 보여 주기 위해선 높은 귀족 가문들과의 연결 고리도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했으니까.

“…….”

하지만 이미 이쪽으로 모든 이목이 쏠려 버렸다.

게다가 디엘렌 가와 디란타 가가 혹시나 좋은 인연이 있나, 생각하는 자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리벨도, 시스테인 자신도 디엘렌 가 사람들과는 인사만 했을 뿐 그 어떤 접촉도 없었으므로.

“…….”

이 연회에 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디엘렌 가가 이 연회로 화제가 되어 재기하기는 이미 글렀다.

그렇게 판단하자마자 시스테인은 리벨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목이 쏠리길 원해 온 거지만, 너무 지나치게 시선이 쏠린 듯했다. 덕분에 그의 신부는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럼 잠시만 쉬러 가시겠습니까.”

그가 물었다. 점점 그녀에게 영향을 받아 그의 마력도 끓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입 안에서 단내가 나려 했다.

여기서 마력이 끓어서는 곤란했다. 그녀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듯했다.

사람이 이렇게 모여드는 건 좋아하지 않으시는군.

그렇게 기억에 새겨 둔 시스테인은 리벨의 답을 기다렸다.

“그, 그럴까요?”

리벨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손을 통해져 오는 열기가 덜해졌다.

끓어오르려던 마력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물론이었다.

“그럼 잠시 나갔다 오죠.”

시스테인은 그녀를 이끌어 연회장 밖으로 향했다.

―…….

찬 공기가 가까워질수록 리벨의 마음은, 그의 마력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후아아.”

리벨이 한숨을 푹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쉴 만한 곳이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시스테인이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였다.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화원?

“저곳에서 잠시 쉬다 가시겠습니까?”

시스테인이 화원을 가리켰다. 리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죠!”

그녀는 들뜬 얼굴로 그를 이끌었다.

사람 없는 곳이 그리도 편하신지,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가시는 것이 누가 에스코트를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라고 시스테인이 생각했다.

“우와……!”

리벨은 아치형 문을 지나 드러난, 생각보다 커다란 규모의 화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 내쉬는 그녀의 얼굴은 훨씬 편하게 풀어져 있었다.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십니까.”

그의 질문에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연회장 문 쪽을 곁눈질하다가 말했다.

“사실 저렇게 몰려드는 목적이야 뻔하잖아요. 게다가 저 사람들은…….”

리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작게 그에게 속삭였다.

“제가 이벨라 자작 영애일 때, 절 엄청나게 무시하던 사람들이거든요.”

시스테인은 그녀의 감정이 왜 그렇게 불안정했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도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 다른 사람의 뒷이야기를 부풀려 누군가를 괴물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자들…….

“……아,”

그 생각을 하니, 마력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순간 입술을 깨문 그가 비틀거렸다.

놀란 리벨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디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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