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리벨은 시스테인의 말에 살짝 입을 벌렸다.
시스테인의 말이 거듭 이어졌다. 리벨은 뜨거운 열기가 그에게서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당신만이 나를 진정시킬 수 있으니 저번처럼 도와 달라 애걸해도, 밀어내실 겁니까?”
거짓말이다. 리벨은 그 사실을 알았다. 시스테인은 아프지 않았다.
마력도 몸 상태도 목소리도 멀쩡하다. 하지만 그는 원하는 답을 분명히 한 채 묻고 있었다.
저를 더 이상 밀어내지 말라고.
“그―”
리벨이 뭐라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의 손끝이 그녀의 아랫배에 닿았다.
저릿한 느낌이 순간 리벨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했다.
명백한 의사를 드러내는 손끝이 그녀의 몸 위를 덧그렸다.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주장을 해서라도 당신이 나를 밀어내지 못하게 하고 싶다면, 그래도 거절하실 겁니까.”
시스테인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많이 생각해 온 것처럼.
“아…….”
리벨이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시스테인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저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시스테인을 밀어낼 수가 없다는 것을.
그가 제게서 정을 떼기 전에, 그와 거리를 두는 건 오히려 그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도 너무나 힘든 일이란 사실을.
“폭주는…… 거짓말이죠?”
리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어둠 속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혹시나, 아주 혹시나 새하얗게 질려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리벨은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
시스테인은 답 대신 리벨의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할지 알려 주기라도 하는 듯이, 코끝을 가볍게 간질이던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았다.
순식간에 숨을 빼앗긴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물론, 이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시스테인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래도 감정을 숨기지 않으려고 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으니까. 리벨 자신 앞에서는 괜찮았으니까.
“……시스?”
하지만 오늘따라 그는 더욱 충동적인 것 같았다.
며칠 밀어낸 동안, 억눌러 온 그가 쏟아져 나온 것처럼.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어 준 시스테인이 작게 답했다.
“네, 거짓말입니다. 근데.”
아까 리벨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이어진 말은 진실이었다.
순식간에 열기를 띤 목소리가 리벨의 목가를 간지럽혔다.
“조금 전까진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에게 답을 들을 때까지는. 내가 나를 억누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탁한 목소리가 흘렀다.
“너무 힘들어요, 리벨.”
그가 침대를 짚지 않은 손으로 리벨의 볼을 감쌌다.
이제 어둠에 적응한 리벨의 눈이, 그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 * *
시스테인은 긴 밤을 보내면서 리벨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근래 들어,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걸 압니다.”
그것도 모자라 연회에서는 오히려, 당신이 더 힘들어 보였죠.
시스테인의 말에 결국 리벨은 웃어 버렸다.
“일부러 그러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모를 리가요.”
시스테인은 짧게 답했다. 잠시 텀을 두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리벨, 내가 싫어하는 것을 굳이 했던 이유가 뭡니까.”
그는 돌려 묻지 않았다. 피할 곳은 없다는 듯이.
“…….”
리벨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열기로 흐려진 시야에도 그의 푸른 눈은 또렷하게 보였다.
“밤에 물어보는 건…… 반칙인데.”
리벨이 작게 뇌까렸다.
정말 반칙인데.
그것도 땀에 젖은 얼굴로 그렇게 내려다보면서.
리벨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적막이 두 사람을 감쌌다. 리벨은 그 침묵마저 자신을 재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답해 보라고.
“…….”
리벨은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당신과 멀어져야 하는데.
당신이 내가 누군지 알기 전에, 나를 싫어하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너무나도 어렵다.
당신이 나를 유혹하고, 나도 당신에게 이끌려 버려서.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지 몰라, 말씀해 주시길 기다렸습니다.”
조용한 가운데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리벨.”
도저히 정답을 모르겠어요. 그가 속삭였다.
그는 근래 리벨이 저를 지나쳤던 시간들을 분명히 기억했다.
애써 시선을 떼던 그녀의 모습도, 평소와는 달리 사용인들을 통해 그의 안부만 묻고 저택을 나섰다는 보고도.
그녀는 누가 봐도 눈에 띄게 시스테인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제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한 듯했다. 밤마다 고민이 너무나도 많아 보였다.
게다가 그 연회.
리벨은 연회를 싫어했다. 그날 그보다 먼저 지친 것 역시 리벨이었다.
당신이 더 피곤했을 텐데.
시스테인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무엇 때문에, 원치 않는 걸 하셨던 겁니까.”
“내가 원치 않는 게 아니라,”
리벨은 저도 모르게 입을 뗐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을 기다려 주었다.
결국 짧은 침묵 끝에 리벨이 말했다.
“―시스가 원치 않는 걸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싫어하는 걸 하고 싶었어.
원작에서 쥬리 백작 영애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 나를 싫어하게 되었으면 해서.
리벨은 그 뒷말까지 잇지는 않았다.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싫어하는 걸 굳이 했다는 제 아내를, 그는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저를 싫어했다면 이런 방법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제가 그녀를 더 이상 마음에 담지 않기를 원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의 방법들은 그에게 단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도 난 상관없습니다, 리벨.”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담담한 말에 리벨은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제 능력, 때문에요?”
그러길 바랐다. 나라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능력 때문이길 바랐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명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어둠 속도 잘 보게 된 리벨의 눈이 그의 행동을 명확하게 잡아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리벨, 언젠가 제게 물으셨죠. 당신에게 마음이 있느냐고.”
언젠가 그녀와 보냈던 충동적인 밤에, 리벨은 그에게 물었다.
‘정말 이 모든 행위에,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그는 깨달았다.
저는 정말로 리벨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움직입니다.”
시스테인이 말했다. 그의 손끝이 리벨의 입술을 매만졌다.
“당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내가 흔들립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겐 당신이 위험합니다.”
요동치면 안 되는 내게는, 당신만큼 위험한 사람이 없어요.
그가 속삭였다.
“그러니 멀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멀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리벨.”
그의 손끝이 멈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떠나려 하셨다면, 그러지 마세요.”
시스테인의 말에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떠나려고 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결국 숨길 수 있었던 건 없었던 모양이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에 답했다.
“우연히 보았습니다, 서류를.”
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내게 숨기려고 했던 것임을 알면서도.
“제 집무실에 있는…… 거요?”
리벨이 되물었다. 시스테인은 답하는 대신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난 리벨,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말한 시스테인이 다른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파앗!
그의 손이 푸르게 번쩍이면서, 방 한쪽에 있는 책장에서 노란 서류철을 이끌어 냈다.
그의 마력으로 빛나는 그 물건을 리벨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탁.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서류철을 그의 손이 잡아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화륵!
리벨의 눈에 그의 모습이 순간 명확하게 보일 정도로, 주변이 환해졌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는 불타고 있었다.
아직 불타는 서류 덕에, 리벨은 시스테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불꽃에 일렁이는 그의 표정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싫지 않아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도, 위험하게 들렸다.
그건 욕망이었다.
그가 평생 억눌러 오려고 했던 욕망.
그걸 끄집어낸 건 리벨 자신이었다.
“아…….”
리벨은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걸.
* * *
긴 밤이 지났다.
그간 떨어져 있던 것을 보답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서로를 갈구하는 밤이었다.
밤의 끝자락에 시스테인이 물었다.
“그래서 저를 피하시면서도, 제 주변을 맴도셨던 이유가 뭡니까.”
제 마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가 리벨을 돌아보았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의 말에 리벨은 잠깐 멈칫했다. 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야 분명했다.
감찰기사단의 조력을 받고 싶다고.
하지만 그러려면 제가 조사를 나갔었단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 이야기까지 하면 시스테인은 제 정체에 대해 반은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원래는 좀 더 많은 거짓말과 함께 전해 주려던 정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 진솔한 밤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실, 조사를 나갔었어요.”
리벨이 입을 열었다. 그에게 숨겨야 하는 비밀.
그녀의 정체.
간 크게 귀족가의 뒤를 캐는 직업이 기자 외에 달리 무엇이 있을까.
이제는 정말 그가 고개를 돌리면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리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