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필레 공작을 조사했다고요…….”
이야기를 들은 시스테인이 뇌까렸다.
리벨은 들킬 각오를 하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의외로, 그녀에게 중요한 걸 묻지 않았다.
왜, 무슨 이유로 필레 공작을 조사했는지를.
“……아무래도 수상해서요. 그 살롱도 그렇고. 이상한 일을 도모하는 게 아니면 그렇게까지 모임을 숨어서 하는 경우는 없잖아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리벨은 그런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당신은 이제, 내 정체를 알까?
“…….”
그가 눈을 뜰 때까지, 리벨은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스테인의 말에는 분노도, 실망도, 배신감도 없었다.
대신 걱정이 담겨 있었다.
“위험한 일을 하셨군요.”
……내가 그 벨이란 걸 알아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리벨은 걱정만이 담겨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에서 걱정을 덜어내면, 당신의 반응이 보일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경계가 너무 철저해서, 어떻게 해도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기사들도 그렇고.”
그렇게 말하면서 리벨은 시스테인을 거듭 살폈다.
그는 그녀의 옆에 누운 채, 리벨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고 있었다.
“현명하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걱정이 걷어진 시스테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차올라 있었다.
리벨이 생각하던 그 어떤 감정도 아니었다.
“……그래서, 시스한테 도와 달라고 하고 싶었어요.”
그가 감찰기사단장임을 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얻은 정보도 아니었을뿐더러, 그가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바쁘지 않다면요.”
리벨이 덧붙인 말에, 시스테인이 낮게 웃었다.
“물론 도와 드리겠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그가 리벨을 끌어안았다.
* * *
그날 밤 이후, 시스테인은 리벨에게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리벨은 그의 마음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는 마음과, 더 밀어내는 것조차 상처라는 마음이 부딪혀서 그녀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리벨, 오늘 업무는 끝나셨습니까.”
그리고 그런 그녀를 꽉 잡기라도 하려는 듯이, 시스테인은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툭.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본 헬리아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놀랐구나, 나도 처음엔 많이 놀랐단다.
그리고 지금도 놀랍단다! 리벨 역시 그 미소에 멈칫했다.
“……이래도 괜찮아요?”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서 감정을 보이지 않는 이유.
그건 그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휩쓸려 폭주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비록 리벨과 함께 있다고 해도, 그는 명백히 다른 사람 앞에서 그녀에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변인들이 놀랄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지금껏 감정이 없는 것처럼 억눌러 왔던 제게, 어떤 파동이 되어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걱정에 시스테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러지 않으면, 도리어 미칠 것 같아서.”
그 말에 헬리아는 서류를 줍는 것도 잊고 제 주인을 바라보았다.
물론 시스테인은 헬리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리벨만이 있었다.
* * *
그날부터, 디란타 저택엔 기묘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가주님께서 환하게 웃으셨대.”
“차라리 어제 훈련장에서 훈련하다 죽은 유령을 봤다고 하지?”
그의 웃음이 심령현상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 사이, ‘귀족가의 폭풍’ 벨에게는 한 가지 제보가 들어왔다.
[쥬리 백작 영애가 필레 공작에게 구애하고 있다]
리벨은 그 문장을 눈을 비비며 다시 봐야 했다.
“뭐?”
쥬리 백작 영애가 필레 공작한테?
원작 내용대로라면 놀랄 일도 아니었겠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그랬기에 리벨은 입을 떠억 벌렸다.
“그럼 블레어 디망 경은???”
황제 카리스가 밀어준 황가 육촌 기사는???
카리스가 그렇게 밀어주는 티를 냈는데 설마 깐 거야?
드디어 미친 거야?????
* * *
물론 쥬리 백작 영애에게 블레어 디망 경의 청혼은 굉장히 갑작스러운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이 귀족 사회의 특성상 쥬리 백작 영애는 그 청혼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황제가 직접 말하지 않았는가.
블레어 디망 경의 첫사랑이 어떻게 될지 기대된다고.
현 황제 카리스 치세에 오래 있었던 자라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이다.
‘그냥 닥치고 결혼해!’
그래서 그 기사가 뜬 이후, 귀족가의 모든 이들은 의심 하나 없이 한 쌍의 커플이 탄생했음을 축하했다.
“쥬리 백작 영애에게는 잘된 일이지.”
“맞아. 영애는 오래전부터 권력 있는 핏줄과의 결혼을 꿈꿨잖아.”
“블레어 디망 경께서도 첫사랑이라 하지 않았소?”
“게다가 아카데미에서도 쥬리 백작 영애가 그분께 얼마나 살가우셨는데요.”
살가웠던 건 블레어 디망이 황제의 육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자마자 쥬리 백작 영애의 관심은 싸늘하게 식었을 것이다.
“쥬리 백작 영애가 드디어 꿈을 이뤘군.”
그들은 모두 쥬리 백작 영애가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쥬리 백작 영애는 권력 있는 핏줄과의 결혼을 꿈꾼 게 아니라, 그냥 황후 자리가 갖고 싶은 거였으니까!
[저는 블레어 디망 경께서 쥬리 백작 영애에게 청혼할 당시 성인식에 있던 사람입니다.
소문에 밝으신 벨 기자님이시니 아시겠지만, 쥬리 백작 영애는 청혼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야 거절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 표 끊는 건데 거절할 리가 있나.
[그런데 그 후에 조금 만남을 이어 가다가 두 분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손에는 여전히 약혼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그저 소문이겠거니 생각했는데, 필레 공작 전하와 쥬리 백작 영애가 같은 방에서 나오는 걸 보았습니다.]
뭬야? 리벨은 뒷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니, 이 여자는 금단의 사랑에 미쳤나 봐!”
처음엔 기혼자인 시스한테 접근하더니, 이번엔 약혼 상태로 사람을 만나냐!
아무리 저는 원치 않는 결혼이었기로서니 이렇게 대놓고 바람피우는 게 소문나 버린다고?
물론 익명으로 온 제보였으니 확실히는 조사해 봐야 할 터였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고…….”
리벨이 이마를 짚었다.
이 세계에서 원작을 본 사람이 리벨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당연히 쥬리 백작 영애가 황위 계승권자들을 건드려 가며 황후가 되려는 큰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더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소문이 났다간 황제 카리스의 검에 쥬리 백작 영애와 그 남자 친구의 목이 쌍으로 날아갔을 테니까.
그러니 요컨대, 쥬리 백작 영애와 필레 공작은 표면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이 난다면?
그건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긴 있다는 거였다. 이 사람이 본 게 진짜든, 아니든.
“……설마.”
설마 원작에서처럼 그대로 진행되는 건 아니겠지?
좀 고민하던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쥬리 백작 영애가 금단의 사랑에 미쳤든 안 미쳤든 간에, 필레 공작은 쥬리 백작 영애의 마음을 틀림없이 거절할 테니까.
적어도 원작에서처럼 둘이 대놓고 붙어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필레 공작 입장에선 쥬리 백작 영애를 피하고 싶을걸?”
그럴 수밖에 없지. 리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필레 공작은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나라 어디에 황태후 리엔과 황제 카리스의 눈과 귀가 있을지 모르는데, 당연히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 쥬리 백작 영애가 접근해 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녀는 황제의 육촌 블레어 디망의 청혼을 받은 사람이다.
게다가 황제 카리스가 ‘두 사람의 관계를 기대하겠다’라고까지 했다.
당연히 황제 카리스의 시선은 쥬리 백작 영애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필레 공작이 가까이할 리가 없다. 머리가 텅텅 빈 게 아니고서야.
“좋아…….”
리벨은 받은 제보를 불태워 버렸다. 좋은 정보를 준 건 고마웠지만 자신이 취재하러 나갈 정도의 정보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런 정보라면 또 기가 막히게 물어 가는 신문이 따로 있었다.
신문 블랙스트리트.
[사교계 시즌 말미, 금단의 삼각관계!? “충격”]
아니나 다를까 곧 블랙스트리트에는 쥬리 백작 영애에 대한 소식이 올라왔다.
[쥬리 백작 영애는 얼마 전 블레어 디망 경의 청혼을 받은 바가 있다.
블랙스트리트에서 확인해 본 결과 두 사람 사이에는 긍정적인 결론이 났고, 그 증거로 약혼반지를 나눠 끼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여러 번 포착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블랙스트리트에는 익명의 제보가 접수되었다.
바로 쥬리 백작 영애가 또 다른 남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
그 남자가 필레 공작이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블랙스트리트의 기사에는, 잘 보면 증거가 없었다.
죄다 심증이나 정황상 증거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리벨에게 온 제보도 두 사람이 같은 방에서 나왔다는 말뿐이었다.
그럼 같은 방에서 이야기한 황제 폐하하고 나도 불륜이게?
리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론 뭔가 더 있었으니까 제보했겠지만, 리벨은 그 제보를 더 파 보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 내렸다.
“어쨌든 블랙스트리트에 떴으면 분명 필레 공작도 봤을 거란 말이지.”
그럼 당연히 대외적으로 입장 표명을 할 수밖에 없다.
블랙스트리트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염문은 헛소문에 불과했고, 그걸 귀족가에서 해명하는 일이 희귀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크라이베리 신문 1면에는 필레 공작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필레 공작, 쥬리 백작 영애와의 열애설 부인]
그것도 엄청나게 대문짝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