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11)화 (111/167)

111화

리벨은 잠입 취재를 하면서 변신을 수도 없이 해 봤지만, 이렇게 알차게 변신 시간을 쓴 건 처음이라고 자신했다.

변신이 유지되는 2시간.

리벨은 그동안 수상한 사람들과 아스테아 백작 부인이 대화하는 걸 듣고, 그들이 나올 때 그들의 모습까지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

다행히 시스테인이나 그림자, 감찰기사들처럼 기척에 예민한 자들은 없었는지 그들은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변신이 십수 분 남은 지금.

리벨은 아주 안전한 곳에 있었다.

“풀려도 십 분만 숨어 있으면 되니까.”

그녀가 뇌까렸다. 눈을 감았다 떠도 달라지는 게 없을 만큼 어두운 이 공간은, 리벨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스륵.

마력을 가라앉히는 체질 덕인지, 마법으로 감추어져 있던 벽 안의 공간은 그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하게도 벽을 감춘 마력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녀의 손이 닿을 때만 작동하지 않을 뿐이었다.

덕분에 그녀 없이는 벽 안의 공간으로 들어올 수 없는 엘브와 나인도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

하지만 나인과 엘브는 지금 다른 방에 있었다. 일단 이 공간은 리벨 같은 특이체질이 아니면 오갈 수가 없어 그들에게는 오히려 활동에 제약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공간의 바로 옆과 건너편 방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은 게이트가 있는 곳과 아주 가까웠다.

“저 안에 있는 게 뭔지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리벨이 고심했다.

시스테인이 이 근처에 있는 걸 보면, 그가 저택 밖에서 느꼈다는 수상한 마력도 십중팔구 저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물건을 저 수상한 자들이 고친다는 것 같은데.

“…….”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이 복도에 시스가 있는 이상, 어차피 같은 걸 보러 온 셈이니 그녀는 빠지는 게 나았다.

하지만 지금 어설프게 나가 봐야 시스테인이나 저들에게 들키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이 복도에 있는 모두보다 가장 늦게 나가야 했다.

그녀가 새삼 숨을 죽였다.

“…….”

하지만 그녀가 한참 동안 가만히 있어도 바깥에선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아니, 안에 뭐 꿀이라도 발라 놨어? 왜 이렇게 안 나와?

뭔진 몰라도 간단하게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헤매고 있는 거 아냐?

리벨이 별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였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또각, 또각, 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건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힐 소리다.

“?”

근데 그 소리 말고 다른 발걸음 소리가 없었다.

문제의 방에 그림자가 되는 방법이라도 쓰여 있는 게 아니고서야, 아까까지만 해도 화려한 걸음 소리를 냈던 수상한 자들이 이렇게까지 인기척을 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고치는 거 오래 걸려서 그냥 나왔나?

그렇다기에는 아스테아 백작 부인에게는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았다.

“?”

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저 방에 그 사람들 묻고 나오셨습니까?

그게 아니면 그 사람들은 왜 안 나오지? 살림 차렸대?

사실 알고 보니 여기가 귀빈 전용 숙박시설?

별생각이 다 들 때였다.

―파앗!

“!”

눈앞이 순간 번쩍했다. 리벨이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곧 변신이 풀린다는 의미였다.

미리 풀어 버릴까?

고민하던 리벨은 문틈을 아주 살짝 열어 보았다.

“!”

그리고 숨을 멈췄다.

이 문을 활짝 열어 둬도 나인과 엘브에게는 그냥 벽으로만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문을 다 열어도 눈이 마주치진 않을 듯했다.

하지만 그가 너무 가까이 있었다.

시스테인이었다.

변신 안 풀길 잘했다! 리벨이 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철컥!

복도 전체에 뭔가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리벨이 움찔했다.

이거 문 잠그는 소리랑 비슷한데, 설마?

나인과 엘브는 아직 방 안에 있었다. 설마 갇힌 거야?

시스테인도 그 소리에 멈칫하는 게 보였다.

그 옆의 그림자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 그가, 기사를 복도 끝으로 보냈다.

망이라도 보는 거겠지.

“…….”

그사이 시스테인은 문을 신중하게 살폈다. 아까 리벨이 소리가 들린다고 했던 그 방이었다.

그리고 이내 시스테인이 문을 연 순간.

“……!”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시스테인은 곧바로 문을 닫았다.

뭐야? 뭔데? 안에 정말 사람 묻었어? 뭐가 있는데 그래요?

리벨이 눈을 깜빡일 때였다.

“!”

복도 끝에 있던 감찰기사가 어느새 그의 옆에 달려와 있었다.

그가 바쁘게 뭐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저 모든 것이 거의 소리가 없이 이루어진다는 게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잠깐. 리벨은 그들을 자세히 살폈다.

상황이 안 좋은가?

살짝 보이는 시스테인의 옆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쿵, 쿵.

그리고 리벨의 귀에도, 뭔가 소리가 들렸다.

이 익숙한 울림. 분명히 리벨 자신도 건너왔던 공간이었다.

“……!”

설마, 이 복도로 사람 올라오고 있는 거야, 지금?

층과 층 사이인 것 같은 이 기묘한 복도에는 출입구가 하나뿐이었다.

이 복도에 볼만한 거라고 해 봐야 시스테인이 열었던 방뿐이니, 올라오는 사람이 누군진 몰라도 그 방을 보러 오는 게 뻔했다.

그럼 그 방에 들어갈 수도 없고, 다른 방의 문은 닫혔을 테니까…….

―쿵, 쿵, 쿵……

계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리벨의 심장도 비슷한 박자로 뛰는 것 같았다.

이대로면 시스도, 기사도 들킨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시스테인은 지금 변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하고 마주칠 생각이 없었을 테니 당연했다.

이건 그도, 감찰기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짧은 순간 시스테인의 얼굴에 고민이 스쳤다.

고민이 끝났는지 그가 문으로 손을 뻗었다. 문제의 방이 아니라 다른 방이었다.

거기 아까 잠겼거든요! 으아아!

앞뒤 잴 머리가 없었다. 리벨은 문을 벌컥 열었다.

―……!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도 문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기해할 틈은 없었다.

“이쪽으로!”

문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리벨이 속삭였다.

두 사람이 리벨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에게는 벽에서 반쯤 몸이 튀어나온 괴기한 모습으로만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시스테인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였다. 잠깐 힘이 들어갔던 그의 팔에서, 사르르 힘이 풀렸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리벨은 절규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변신 풀걸!

차라리 하녀 차림으로 잠입한 리벨이었으면 작전에서 벗어나서 잔소리(?) 듣는 한이 있더라도 수상하지는 않았을 거 아냐, 아이고!

그리고 그가 벽으로 빨려 들어오는(?) 사이, 감찰기사가 검을 뽑은 게 보였다.

아니 소리도 없이 언제 뽑았냐고! 흉기 집어넣고!

“쉿!”

리벨은 검지를 제 입에 대어 보였다. 눈이 마주친 감찰기사는 멈칫했다.

그녀에게 살기가 없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그사이, 리벨은 감찰기사까지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

리벨은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물론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

그리고 어둠 속에 리벨과 두 남자만이 남았다.

애초에 좁아서 엘브와 나인도 들어오지 않았던 공간이었다.

거기에 키 180cm가 넘는 장신 둘이 들어왔으니 좁아터지는 게 당연했다.

“아,”

방 안에 있던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건지 손끝이 따가웠다.

리벨은 손을 슬그머니 구석에서 뗐다.

방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 조심해야 했다.

뒤를 돌아보아도 새까만 어둠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그때 감찰기사가 속삭였다.

분명 들어올 때 칼 들고 있었으니까, 아마 목에 칼이 들어와 있을지도 모른다.

리벨은 긴장감에 뒷골이 서늘해졌다.

하필 지금 그녀는 리벨 폰 디란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하녀, 그것도 이 아스테아 저택의 하녀 모습이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불러온 결과였다.

잘하다간 저 검에 유언도 못 남기고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시스를 이렇게 잘 지켜 주는 건 너무나 고마운데 이이이거팀킬이거든?

리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를 뭐라고 소개하지? 사실 저는 리벨(이었던 것)입니다?

요단강 익스프레스 정거장 위치만 떠오르는 가운데,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방금 수리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전하.”

이 목소리는 아스테아 백작 부인의 목소리였다.

근데 전하?

전하라고?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이 나라에서 전하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은 디란타 대공 시스테인과, 황가 피가 흐르는 공작인 필레 공작뿐이었다.

근데 시스테인은 이 공간에 있으니 아니고, 그럼 밖에 필레 공작이 왔다는 건데.

이번 연회에 필레 공작은 안 왔는데?

살롱 일이라고 친히 행차하신 거야, 지금? 리벨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순간이었다.

“답하지 않으면 벤다.”

충성스럽지만 본의 아니게 배은망덕한 감찰기사가 속삭여 왔다.

저기, 사람이 구해 준 은혜를 이렇게 갚으면 안 되는 거거든?

리벨이 뭐라 말하려는 때였다.

―파앗!

다시 눈앞이 번쩍였다.

아, 변신……! 리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태로 변신이 풀리면 저 감찰기사가 팀킬로 모가지인 건 둘째 치고, 나도 모가지다!

리벨은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또 뭔지 모를 것에 베일까 봐 소심한 움직임이었다.

여기선 필담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저 감찰기사처럼 기술 좋게 속삭일 자신도 없었다.

바깥으로 소리가 새진 않는 것 같았지만 혹시 몰랐다.

리벨이 말도 못 하고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검을 내려라.”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한바탕 이 공간 앞을 지나간 후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감찰기사가 하는 말이 들렸다.

역시 목에 검 겨누고 있었던 거지!

이 좁은 공간에서 잘도 안 다치고 들고 있네! 감탄할 틈은 없었다.

아니, 잠깐. 근데 검이 보이긴 보여?

리벨은 제 목에 검이 들어온 게 분명한데도 형체조차 볼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 공간은 어두웠다.

밤눈이 무시무시하게 밝으신 모양이네.

아니, 조명도 없는데 어떻게 보는 거야?

“방금, 도와주셨던 겁니까.”

그때 시스테인이 속삭여 왔다.

리벨은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대답을 안 해 봐야 더 수상해질 뿐이다.

리벨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네.”

그러니까 저 감찰기사 좀 말려 주실래요?

이대로면 참사예요, 대참사!

리벨이 속으로 외칠 때였다.

“갑자기 이런 곳에 끌려 들어와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당황한 사람 목소리가 왜 이렇게 딱딱하세요?

“저는 이곳에서 길을 잃었을 뿐인데.”

시스테인의 말이 이어졌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마를 짚을 뻔했다.

설마 이거…… 연기하는 거야, 지금?

검은 가면 때 72수레 어쩌고 외워서 말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엄청난 발연기잖아!

리벨이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시스한테 연기 안 시키길 잘했다!

리벨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의 말이 마저 이어졌다.

“왜, 저를 도와주신 겁니까? 마치 내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에 리벨의 숨이 멈췄다.

연기력은 별로였지만 시스테인은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묻고 있는 것이다.

모르는 사이인데, 왜 구해 주었느냐고.

애초에 그가 이곳에 몰래 들어온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아는 사이처럼.

리벨은 보이지도 않는 그의 시선이, 제 진짜 모습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