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156)화 (156/167)

156화

그 말에 귀족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게 자비인가 아닌가 헷갈리는 게 분명했다.

리엔이 손을 펴 보였다.

“죄질에 따라 가장 가벼운 죄를 지은 자부터.”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처형한다.”

“……!”

그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하얘졌다. 여기 어디에 차등이 있냐는 얼굴이었다.

“간격은…….”

리엔은 검지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면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예쁜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두 시간 정도가 좋겠어.”

그녀는 세운 무릎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괴었다.

“한 시간은 너무 짧지. 어차피 죽을 미래, 제 차례가 곧이라는 생각에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며 희망을 느낄 수 있거든.”

그녀가 제 손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57분, 53분, 49분…… 점점 깎여 나가는 시간을 보면서 말이야.”

그녀의 웃음이 짙어졌다.

“하지만 두 시간은 그 희망이 절망과 공포로 바뀌기 아주 적절한 시간이지. 기다려도 기다려도 시간이 가지 않거든.”

그녀가 리벨을 돌아보았다. 해사한 미소에 리벨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았다.

“아가도 알아 두렴.”

뭐뭐뭘요? 처형 간격은 두 시간? 그걸굳이알아둬야할까요? 써먹을일이없어야하는게아닐까요?

“칼, 네 생각은 어떠니?”

리엔이 칼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제국의 황좌에 앉은 건 카리스였다. 그녀는 ‘의견’만을 냈을 뿐 제 뜻대로 밀어붙일 생각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하는 행동이었다.

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귀족 하나를 가리켰다.

“가리키는 순서대로 지하 감옥에 가둬라.”

그리고 기사들을 불러 한 명씩 지목하기 시작했다.

“먼저 저놈.”

그가 처음으로 가리킨 자는 얼굴이 사색이 됐다.

“폐, 폐하!”

하지만 변명할 틈도 없이 끌려가 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지목당하는 자들은 늦게 지목당하는 것이 좋은지, 빨리 지목당하는 것이 좋은지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로 어버버하며 끌려갔다.

처음에는 늦게 처형된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자들이 끌려가는 걸 보면서 이내 현실을 깨달았다.

늦게 처형된다는 건, 그만큼 죽음에의 공포를 오랫동안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일곱 번째로 지목당한 자는 바로 마사제 카르도였다.

그는 리엔이 직접 마신전에서 포섭한 마사제였다.

“자자잠깐!”

그가 얼굴이 새하얘져서 외쳤다. 그리고 리엔을 똑바로 돌아보았다.

“말이 다르지 않소! 분명 흑마법을 양지로 끌어오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가 소리쳤다. 그러자 리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아. 네게 그렇게 약속했었지.”

깜빡했었다는 듯한 말에 카르도의 얼굴에 희망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근데.”

리엔이 손을 펴 보였다.

“네가 양지로 나올 수 있게 해 준다고 한 적은 없는데.”

“뭐, 뭐요?”

카르도가 입을 떠억 벌렸다. 리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전형적인 ‘리엔식 자비’였다.

제국 전체에 이미 유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리엔은 몸을 일으켰다.

“좋아, 네게는 특별히 선택지를 주마.”

엥, 진짜요?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로? 기분이 좋으신가?

“선, 선택지라시면.”

카르도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귀족들의 부러움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리엔은 똑바로 세운 검지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과 저쪽, 그리고…… 저쪽.”

이곳저곳을 가리킨 그녀가 손을 펴 보였다.

“어느 쪽이 좋겠니? 네 미래는 네가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마.”

진짜요?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카르도는 살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리엔은 그런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저긴 새로 지을 마탑 자리고, 저긴 기사관이지. 그리고 저쪽은 가장 햇빛이 잘 닿는 종탑이란다. 어디가 좋겠니, 네 새 보금자리로?”

그 말에 카르도가 희망찬 얼굴로 답했다.

“마, 마탑이 좋겠습니다!”

흑마법을 드디어 마탑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카르도의 얼굴에 희망과 뿌듯함이 가득 찼다.

리엔은 그가 충분히 기뻐하길 기다려 주었다가 말했다.

“좋아. 그럼 저 아이는 저곳에 매달아 주렴.”

“예?”

카르도가 돌처럼 굳었다. 리벨은 이마를 짚었다. 그럼 그렇지.

“저놈 목을.”

리엔은 그런 카르도 앞에서 해사하게 웃었다.

애초에 반역에 가담하지 않고 이쪽에 정보를 줬다면 모를까, 반역에 가담했다가 이쪽에 붙어 정보를 흘린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리가 없었다.

“이건 약속이 다르지 않소오오오!”

끌려가는 카르도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  *  *

전국 각지에서 반역자들이 산지 직송으로 실려 오는 사이.

리벨과 시스테인은 황성 본관에 있었다. 대공령의 업무를 이쪽에서 처리해도 된다는 카리스의 허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들을 내 눈 밖에 놓는 것보단 낫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옆에서 리엔이 말했다.

‘왔다 갔다 하기 번거롭지 않겠니?’

카리스는 리엔의 그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카리스가 우리를 조금 걱정해 준 걸지도 모른다! 리벨이 희망찬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대공비 전하, 감옥에서 자꾸 전하를 뵙게 해 달라며 난동을 부리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시스테인의 서늘한 시선이 감찰기사를 향했다.

그런 자들이 있다 한들 리벨에게 굳이 알려 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난동?”

리벨도 눈을 깜빡였다. 해 봐야 살려 달라는 거 아냐?

근데 하필 나를 부르는 이유는 뭔데? 내가 가장 자비롭게 생겼어?

하긴 황태후 리엔 폐하와 황제 카리스, 시스테인과 나. 이렇게 넷을 보면 가장 자비로워 보이는 건…….

……아니, 만만해 보이는 게 나잖아!

리벨이 속으로 발끈했다.

“누군데?”

누가 내가 밥이래? 응?

리벨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은 감찰기사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롤란드 디엘렌입니다.”

“엥?”

귀족의 품위고 뭐고 까먹어버린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걔가…… 왜…… 나를……?

혹시 사형을 앞당기고 싶니?

“꼭 뵙게 해 달라며 간수에게 제 옷에 달린 보석을 모조리 떼어 주고 있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감찰기사가 물었다. 리벨이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보러 가는 거야 자유겠지만…….

시스테인도 마침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묻는 시선으로.

리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뭔 말을 하려고 그렇게 부르는지 들어나 볼까요?”

어차피 살려 줄 생각은 쥐뿔만큼도 없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찰기사는 조심스럽게 지하 감옥으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지하 감옥은 바깥에서부터 시끄러웠다.

“한 번만! 대공비 전하를 한 번만 뵙게 해 주게!”

‘마음껏 공포를 나누라’는 카리스의 자비로운(?) 명령으로 입에 재갈을 물지 않은 사형수들은 감옥에서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발악이 심한 건 롤란드 디엘렌이었다.

“한 번만! 드릴 말씀이 있다고!”

그 목소리는 리벨이 지하 감옥에 들어설 때까지도 쩌렁쩌렁 울렸다.

얼씨구, 대공비 전하?

언제 대공비 전하라고 불렀냐? 언제는 나보고 추하다며?

리벨은 어이없는 얼굴로 감옥에 들어섰다.

“대, 대공비 전하.”

간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잠시 나가 있어요. 피곤했죠?”

안 그래도 간수는 밤새 시달린 듯했다.

지금까지 세 명이 처형당했고, 다음 순서인 자는 달달 떨고 있었다.

리벨이 기억하기로 롤란드 디엘렌의 순서는 좀 더 뒤였다.

“리, 리벨!”

그때 창살로 롤란드가 달려들었다.

―덜컹!

창살이 쓰러질 일은 당연히 없었지만, 시스테인은 그가 달려드는 창살을 한 손으로 받쳤다.

혹시 모르니까.

롤란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리벨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간절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살려 줄 거지? 응? 이거 다 쇼지?”

쇼를 이렇게 거국적으로 하십니까? 리벨은 어깨를 으쓱했다.

롤란드가 그런 그녀에게 계속 말했다.

“정이란 게 있잖아. 응? 한동안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데.”

그 말에 리벨은 어이가 없어 답이 튀어 나가 버렸다.

“장난으로 약혼한 사이?”

롤란드는 움찔했다. 제가 입을 털어댄 업보였다.

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얼굴에 철판 좀 깐다고 문제가 있겠는가?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그보다 깊은 사이였잖아, 응?”

롤란드가 창살에 철썩 달라붙었다. 그런 그를 서늘한 표정의 시스테인이 지켜보았다.

“……!”

본의 아니게 남편 보는 앞에서 전 남친의 정을 운운한 셈이 되어 버렸다.

롤란드는 제 목숨이 다시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아냐! 리벨만 설득하면 대공은 어떻게든 리벨이 설득해 주겠지!

“난, 난 반역에 스푼만 얹었을 뿐이야. 진짜야. 알잖아, 응? 나 그런 거 못 해. 나 쫄보잖아.”

“스푼만?”

자아 성찰이 죽기 몇 시간 전에 이루어졌다니 정말 통감할 노릇이었지만 리벨의 황당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푼만 올려? 수상 소감 읊니?

“살려 줄 거지? 응? 너 아는 사람 죽는 거 싫어하잖아.”

롤란드의 간곡한 말에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는 사람 죽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그 말에 롤란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치?”

희망찬 얼굴을 보니 문득 리엔이 생각났다. 최고로 희망에 벅차오르게 했다가 절망으로 떨어뜨리는 것.

그건 리엔이 자주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해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왠지 리엔을 닮아 가는 것 같은 리벨은 그에게 해사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근데 그건 사람 말하는 거고.”

“으, 응?”

멈칫하는 롤란드에게 리벨이 말을 이었다.

“네가 사람이니? 사람이야?”

그녀의 말에 롤란드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사람이지, 당, 당연히…….”

“사람이면 너처럼 낯짝 두껍게 못 살지.”

리벨은 창살에서 떨어지면서 말했다.

절망에 물들어 가는 얼굴에 대고, 그녀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리 수거라는 말 아니, 롤란드?”

“응?”

분리 수거가 뭔지 알 리가 없는 롤란드가 멈칫했다.

“쓰레기들은 한데 묶어서 같이 태운다는 뜻이야.”

그 말에 롤란드의 얼굴이 완전히 흙색으로 변해 버렸다. 리벨은 그런 그에게 미련 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이승하고 마저 작별 인사 나누고.”

안녕 해, 안녕~

그녀가 손을 흔들어 주고는 시스테인의 손을 잡았다.

“리베에에에에에엘!”

절규해도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아이고, 쌤통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