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반역자들이 속속들이 잡혀가는 사이.
필레 공작의 살롱 근처, 그들의 안가에 잡혀 있던 베니카는 문득 눈을 떴다.
며칠 동안 식사는커녕 물도 제대로 못 마셔서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녀는 제 주변에 사람의 기척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없어요?”
눈을 가린 천도 며칠 동안 울고불고했기 때문인지 느슨해져 있었다.
설마?
“……!”
그녀는 마구 고개를 내젓고 얼굴을 움직이며 천을 벗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보, 보인다!”
앞이 보였다. 천이 코에 걸쳐지면서 시야가 반쯤 확보된 덕이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급히 나가기라도 했는지 뭔가 휩쓸고 나간 것처럼 방 안은 엉망이었다.
“끙!”
그녀는 며칠 고생한 탓인지 살이 빠져 틈이 많아진 줄을 금세 풀어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 눈의 천을 풀고, 의자에 제 몸을 속박하던 다른 줄까지 푸는 건 순식간이었다.
―탁!
천과 줄을 내팽개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때라면 이런 몸 상태로는 상상도 못 할 움직임이었지만, 이 기회에 나가지 못한다면 죽는다는 생각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일단, 일단 나가야 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뭔가 일이 잘못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를 잡은 이들에게 일이 생겼다면,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좋아. 일단 탈출해서…….”
저를 지켜 줄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알레로 자작가, 제 본가를 생각했던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미 슈의 정체에 대해 소문이 났다면 아버지가 나를 보호해 주진 않을 것이다.
가문에 더 소문을 얹고 싶진 않을 테니까.
그럼 날 지켜 줄 사람은? 생각나는 자는 없었지만 일단 움직여야 했다.
―탁!
그녀는 바닥에 버려져 있던 검은 로브를 뒤집어썼다.
생각나는 자는 없었지만 재빨리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일단 사교계는 안 돼.”
베니카 알레로와 슈에 대한 소문은 이미 다 났을 테니까.
―타타탓……!
그녀가 나름 걸음 소리를 죽여 빠져나온 안가는 수도 한가운데의 뒷골목과 연결된 곳이었다.
기자인 슈가 자주 오간 곳이기도 했다.
깊은 밤인지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수도에는 기묘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락.
급히 걷는 그녀의 발에 뭔가 종이 같은 것이 밟혔다.
재빨리 종이에서 발을 떼던 베니카는 멈칫했다.
종이, 아니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제 사진을 발견한 탓이었다.
더러운 신문을 편 그녀가 신문을 살폈다.
[블랙스트리트]
뒷골목에 굴러다니는 신문답게 가십이나 실어 대는 블랙스트리트였다.
그런데 그 블랙스트리트는 지금 제 기사로 빼곡했다.
[슈 기자의 정체는!?]
[알레로 자작 영애의 일생을 돌아보다]
이미 벨의 기사 때문에, 그녀의 정체가 다 밝혀진 것이다.
“이……!”
그녀가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슈도 알레로 자작 영애도 실종 상태라면서, 공식 입장은 아직 없다고 떠드는 중이었다.
“당연히 없지……!”
잡혀 있었으니까!
신문 한편으로 둘이 함께 실종된 걸 보니 확실히 슈의 정체는 알레로 자작 영애일 거라고 확신하는 기사가 몇 개나 눈에 띄었다.
그녀는 신문을 내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역시 사교계는 안 된다.
사교계와 거리가 멀면서도 나를 지켜 줄 만한 곳!
어디 없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슈 기자?”
골목에 서 있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베니카가 움찔했다.
“누, 누구……?”
“주말 없이 영애를 찾아다닌 불쌍한 기사입니다.”
그건 다름 아닌 감찰기사 레오였다.
“수도에 있는 집 다 뒤질 뻔했네.”
“아, 아니, 갑자기 나는 왜…….”
“갑자기라뇨. 신문 기사 재미난 거 쓰셨잖아요.”
레오가 그녀의 손을 돌려 묶으면서 말했다.
“일단 본부 가서 얘기하시죠. 신문 기사는 어쩌다 쓰셨는지 아주 소상히.”
“그, 그거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거 아니라고!”
레오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그렇게 말하죠. 갑시다.”
“진짜라고!”
그녀의 절규는 수도 한복판을 처절하게 울렸다.
얼마 후 ‘고의는 아니나 반역에 가담한 죄’로, 제국에서 영구 추방당한 베니카 알레로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 * *
베니카 알레로가 감찰기사단 본부에서 발악을 하고 있을 때쯤.
그녀와 비슷한 처지의 영애가 한 명 더 있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그녀는 다름 아닌 쥬리 백작 영애였다.
분명히 완성된 계획이었다.
“내가 어떻게 결혼을 피하면서 도운 계획인데!”
사실상 황제 카리스가 이어 준 사이.
황제의 육촌 블레어 디망과의 결혼을 클레어 쥬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차피 황좌의 주인만 바뀌면 없어질 결혼이잖아?’
그래서 블레어 디망의 끊임없는 구애를 피하며, 그녀는 이번 일에 어떻게든 손이라도 얹으려 했다.
권력에 관심도 없다는 수도 구석 기사의 아내로 생을 마무리하긴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익명으로라도 필레 공작의 일을 돕길 자청했다.
‘이후 어떤 작위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늘이 제대로 된 하늘로 바뀌길 바라는 것뿐이에요.’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그녀는 상단의 이름으로 간신히 필레 공작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쉬울 것 없는 놈들에게까지 싹싹 빌어 가면서.
그런데.
‘잡아라!’
‘이곳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축배를 들고 있던 살롱에 뜬금없이 황가 놈들이 들이닥쳤다.
마침 술자리에서 잠시 벗어나 있던 그녀는 아무 게이트로나 뛰어들었다.
그것은 수도 근처 가문의 공터로 연결되는 게이트였다.
다행히 그 영지의 시장과도 가까운 곳이었다.
“마차!”
마차가 늘어서 있는 곳에 간 그녀가 다급히 외쳤다.
새벽에도 급히 움직이는 자들이 있으니, 마부들은 지금도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하아아아암…… 누구요?”
아니나 다를까,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작은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마차와 마부가 필요해. 지금 당장.”
그녀의 말에 남자는 그녀를 의심스럽게 훑어보았다.
아래는 화려한 파티용 드레스인데, 뒤집어쓴 건 새까만 로브이니 한눈에 봐도 수상했던 것이다.
“대가는?”
그의 말에 쥬리는 손에 낀 반지를 빼 보였다.
마부의 얼굴에 탐욕이 어렸다.
“어디로 뫼실깝쇼?”
“디망 경의 저택으로.”
“디망 경?”
유명한 귀족가라면 모를까, 기사의 저택을 평민이 알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 기사, 블레어 디망이 황제의 육촌이라고 해도.
“일단 수도 남쪽 외곽으로 나가. 길은 내가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아무 마차에나 올라타며 말했다.
―히힝!
말을 끌고 나오며 마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경이라면 적어도 귀족이나 기사 나리인데, 이 새벽에 웬 여자가 보러 간다고 하니 의아하게 여길 법도 했다.
혹시 금단의 사랑?
마부는 머릿속으로 소설을 쓰면서도 착실하게 마부석에 올라탔다.
“출발하겠소.”
“최대한 빨리!”
쥬리 백작 영애가 마차 문을 재빨리 닫으며 손짓했다. 혹시 제 모습이 보일세라 검은 로브 후드를 뒤집어쓴 채였다.
“휴.”
일단 다행히도 늦은 밤인지 지나가는 자들은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돌렸다.
일단 디망 경의 저택에만 무사히 도착하면 된다.
블레어 디망.
성직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는 황제의 육촌 기사는 신문을 안 보는 사람이었다.
최대한 속세와의 연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니 당연했다.
사교계에도 안 나가고, 게다가 저택도 수도 외곽에 동떨어져 있어 그는 소문에 느렸다.
그래서 싫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아직 이 상황은 모를 거야.”
쥬리 백작가는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상단의 이름으로 반역에 참여했다 해도, 감찰이 본격적으로 파기 시작했으면 제 정체를 알아채는 데에도 시간이 길게 걸리진 않을 테니까.
그럼 살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다!
“최대한 빨리 디망 경하고 결혼을 해야 돼.”
결혼은 시간이 걸리니 약혼이라도!
어떻게든 그가 이은 황가의 피에 기대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가 한 것이야 상단의 이름으로 돈을 댄 것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물론 중죄였지만 어떻게든 협박당했다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 황가 육촌의 아내로서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빨리……!”
쥬리 백작 영애가 거듭 입술을 깨물었다.
문제라면 아직 블레어 디망과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영애, 제 마음은 진정으로 받아 주기 어려운 것이오?’
블레어 디망이 그렇게 고백할 때마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자리를 피했으니까.
‘전……!’
황제가 지켜보고 있다고 했으니 결혼을 깔 수도 없고, 방법은 딱 하나.
블레어 디망이 이쪽을 포기해 주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근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그가 고백의 ‘고’라도 꺼내면 그녀는 덥석 결혼하자고 할 생각이었다.
―덜컹!
“여기서 왼쪽 길로!”
생각하면서도 쥬리 백작 영애는 길 안내를 잊지 않았다.
이내 마차는 디망 가 앞에 멈추었다. 그녀는 마부에게 반지를 던져 주다시피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수고하십쇼.”
마부는 횡재했다는 얼굴로 반지를 든 채 마차를 돌렸다.
“후우.”
늦은 시간에 마차가 오자 부산스러워진 디망 가 내부가 보였다.
쥬리 백작 영애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로브를 벗었다.
“어서 오십시오, 영애.”
손님을 모시러 나온 집사가 그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마님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망 가의 사람들은 그녀를 실질적으로 디망 부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아니, 지금까진 그랬다.
오늘따라 집사는 물론이고 디망 가 사용인들의 분위기가 묘했다.
“경께서는 계신가?”
그녀가 저택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저택 한쪽에 신성한 하얀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블레어 디망은 또 기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엔 그 모습이 지긋지긋했지만 지금은 반가웠다.
“물론 계십니다. 그런데 바깥에서 험한 일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대체 어쩌다 이런…….”
하녀들이 그녀의 수척해 보이는 얼굴에 놀라 다가왔다.
“일단 목욕부터 하시지요. 모시겠습니다.”
곧 마법으로 데워진 따듯한 욕탕이 그녀의 앞에 준비되었다.
“후우.”
시중드는 하녀들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쥬리 백작 영애는 이제야 조금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디망 경의 기도는? 끝나려면 멀었나?”
그녀가 시중드는 하녀들에게 물었다.
하녀들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평소에는 가주에게 관심도 없었던 쥬리 영애가 오늘따라 유독 관심이 많다 싶었던 것이다.
“이 시간이면 끝나셨을 거예요.”
하녀가 말했다. 그러자 시중을 받던 쥬리 백작 영애는 도중에 일어섰다.
―촤악!
물이 튀어 주변이 부산스러워졌지만 그녀는 그런 데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영애님!”
“거품이라도 닦아 드리겠습니다!”
하녀들이 쩔쩔매며 그녀를 따라왔다. 그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녀의 앞길에 미리 카펫을 까는 건 물론이었다.
누가 봐도 가주를 푸대접하는 이 영애를 하녀들이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건, 모두 가주 블레어 디망의 뜻이었다.
‘내가 부족해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알레로 영애의 탓으로 돌리지 말거라.’
그렇게 말하는 블레어 디망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쥬리 백작 영애에게는 아까운 신랑감이었다.
“어디 계시지?”
쥬리 영애는 그러거나 말거나 블레어 디망만을 찾았다.
제 목숨줄부터 붙들고 봐야 했다.
“저녁 식사 예정이십니다.”
“그럼 거기로 안내해.”
쥬리 영애가 손짓했다. 그 말에 하녀들이 수건을 툭 떨어뜨렸다.
“예?”
“나도 같이 식사하지.”
그 말에 하녀들이 입을 떠억 벌렸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는 블레어 디망이 어디 있는지 묻고는 그곳만은 피해서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정반대였다.
영애께서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못 들었어?”
“아, 알겠습니다.”
하녀들은 급히 그녀를 안내했다.
“모시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혼자 식사했어야 할 블레어 디망이었다.
그는 쥬리 영애가 저택에 들른 것도 모자라 저와 함께 식사한다는 말에 들뜬 얼굴이었다.
“오, 쥬리 영애. 어서 오시오.”
식당에 있던 그는 밝은 얼굴로 그녀의 자리를 빼 주었다.
내 유일한 목숨줄!
쥬리 영애는 그런 그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