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오늘은 바깥에서 피로한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오.”
블레어 디망은 그렇게 말하며 말을 붙여 왔다. 쥬리 영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요.”
그러면서 식사를 깨작거렸다.
어차피 블레어 디망은 숨 쉬듯 고백하는 자였으니 그걸 받아 주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죽여 그 기회를 기다렸다.
“이 고기는 오늘 특별히 서부에서 주문해 들여왔소이다. 요리사가 왠지 그러고 싶다더라니, 다 영애께서 오실 것을 느끼고 그런 모양이오.”
블레어 디망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내 요리사를 크게 치하하리다.”
치하하든 말든……! 쥬리 영애가 문제의 고기를 칼로 쑤시듯 잘랐다.
당연히 입맛은 없었다. 고기가 어디 고기든 상관없으니 청혼이나 하라고!
“오늘 낮잠이 길어져 기도를 늦게 올리게 된 것 또한 신의 뜻이 아닐까 싶소. 내 신앙심이 전보다 간절하지 못해져서인가 고민했건만.”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 신께서 영애와 함께 저녁을 들라는 뜻이었나 보오.”
그러면서 블레어 디망은 온갖 이야기를 다 해댔다.
“그런가 보네요.”
쥬리 영애는 대충 답하면서 그가 할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블레어 디망은 들뜬 듯하면서도 그녀가 기다리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아니,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시오?”
그녀의 접시를 살피는 건 평소와 같았다. 배려심이 넘쳐서 문제인 남자였다.
쥬리 영애는 손을 내저으며 고기를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맛있어요.”
“다행이오.”
그렇게 웃으며 블레어는 이런저런 요리를 추천했다.
쥬리 영애는 대충 그의 말에 맞춰 주며 그가 주는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오늘따라 내 말을 길게 들어 주시니 좀 들떴던 것 같소.”
블레어 디망은 식사 끝에 덧붙였다. 그는 조금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탁.
대충 식사한 태가 나는 테이블을 보고는 쥬리 영애가 냅킨을 접었다. 식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탁.
그러자 블레어 디망도 재빨리 냅킨을 접었다.
“휴우, 영애 덕에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였소. 다시는 이런 반짝이는 순간을 볼 수 없을 것 같소이다.”
그는 정말 감동한 얼굴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쥬리 영애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이제 고백할 타이밍인데?
“그래서 말이오, 영애…….”
블레어 디망이 입을 뗐다. 지금이다! 쥬리 영애의 눈이 반짝인 순간이었다.
블레어 디망은 제 가슴에 손을 올리고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간 정말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뭔 뜬금없는 고생이야! 고백이나 하라고! 쥬리 영애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고생은요.”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라고! 그녀가 속으로 외칠 때였다.
블레어 디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매번 이렇게 부족한 저와 함께해 주려 하셔서 정말 감사했소이다. 내 신 앞에 맹세할 수 있소. 영애만큼 내 눈에 빛나고, 반짝이는 보석은 없었다는 사실을.”
좋아! 이대로 고백해! 쥬리 영애가 저도 모르게 웃은 순간이었다.
블레어 디망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 이제 영애를 그만 놓아주려 하오.”
“좋…… 아니, 네?”
뭐라고? 쥬리 영애가 버벅거렸다. 이게 뭔 소리야?
블레어 디망은 고개를 숙였다.
“내 욕심이 과했던 것 같소. 아카데미에서 당신을 내내 사모하였고, 폐하의 육촌이라는 내 피를 이용해 어떻게든 당신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오.”
그는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권력으로 사랑을 취하려 하다니, 신 앞에 이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잠시 마족의 속삭임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리다.”
뭔 속삭임? 쥬리 영애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제 감히 영애를 탐하지 않겠소. 내 새까만 욕심은 이 가슴에 묻고……”
“아니, 무슨 소리예요?”
고백 안 해? 쥬리 영애가 새하얘진 머리로 외쳤다.
조금 놀란 블레어 디망은 이내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많은 상처를 준 모양이오.”
“상처는, 아니.”
상처는 지금 주고 있고! 쥬리 영애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폐하께서도 지켜보고 계신 결혼이잖아요. 전 이 결혼―”
하려고 왔다고! 그러니까 고백 라고! 그렇게 말하려는 그녀의 말끝을 블레어 디망이 부드럽게 받았다.
“그렇기에 이 결혼, 포기하려 하오.”
아니, 왜! 쥬리 영애가 돌처럼 굳은 가운데 블레어 디망이 말해다.
“영애의 말대로 폐하께서도 관심을 보이시는 터라, 이미 연락을 보내 두었소.”
“뭐, 뭐라고요?”
뭔 연락을? 쥬리 영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스럽게도 제가 너무 부족하여, 영애의 마음에 차지 못했노라고.”
“아니, 잠깐.”
“그러니 이 사랑은 이만 포기하겠다고 말이오. 폐하께서도 이미 이해해 주셨소.”
아니야, 이해하지 마! 쥬리 영애가 입을 떠억 벌렸다.
“지금 이 순간도 영애를 보니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만…….”
“흔들리면 나랑 결혼해요!”
쥬리 영애가 간곡하게 외쳤다. 하지만 블레어 디망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권력이라는 속세의 힘으로 영애를 취하려 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소. 이 결혼 건에 대해서 영애께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다, 폐하께서 약조해 주셨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련한 얼굴의 블레어 디망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실수가 영애의 앞길에 부디 어려움으로 남지 않기를…….”
어려운 건 지금 어렵다고! 실수는 지금 하고 있다고!
쥬리 영애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니에요, 저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진짜예요.”
그러니까 고백하라고! 쥬리 영애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블레어 디망은 고개를 저었다.
“내 욕심에 맞춰 주실 필요는 없소이다. 이 부족한 자가 황제의 육촌이라는 속세의 권력으로 당신을 탐했으니,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오.”
아니야! 탐해 줘! 쥬리 영애가 머리를 싸맸을 때였다.
블레어 디망은 불쑥 테이블 아래로 손을 집어넣더니,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오늘 받은 것이외다. 영애를 보고 흔들리는 이 마음을 보니, 이것을 받기를 정말 잘한 것 같소.”
그는 정말 다행이라는 얼굴이었다.
“원래 신전은 황가의 피를 이은 자를 받아 주지 않지만……, 내 간절한 기도를 신께서 들어주신 모양이오.”
들어주든 말든! 쥬리 영애의 시선이 그 상자에 집중되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단출한 상자였지만 저 상자엔 반드시 청혼 반지가 들어 있어야 했다. 청혼 반지가 들어 있기에는 너무 큰가? 그럼 웨딩드레스라도 들어 있든지.
반지, 목걸이, 아니 그냥 밧줄이라도 좋으니까 아무튼 뭐라도 걸면서 청혼해 줘!
그녀가 속으로 간곡하게 외쳤을 때였다.
블레어 디망이 상자를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사락.
안에 담겨 있던 사제복을 꺼낸 블레어 디망이 경건한 얼굴로 사제복을 입었다.
“이제 이 부족한 자에게는 속세의 권력이 없소이다. 권력도, 디망이라는 이름도 내려 두고 그저 블레어라는 사제로 이 한 몸, 평생 신께 바칠 예정이오.”
“안, 아니, 안 돼!”
쥬리 영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블레어 디망은 감동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렇게까지, 내 마음을 감싸 주실 줄은……. 어쩌면 신께서 바라시는 자비는 이 부족한 몸이 아니라 영애께 충만한 것인지도 모르겠소.”
자비는 개뿔! 쥬리 영애가 그의 사제복을 붙들었다.
“아니에요. 우리 함께 있을 시간도 별로 없었잖아요. 네?”
그녀는 제가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를 붙들었다.
“이미 신전에 이름을 올렸소이다.”
블레어 디망은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툭.
쥬리 영애의 손이 그의 사제복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이미 신전에 이름이 올라갔다고?
그럼 이미 그는 황제의 육촌이 아니라 그냥 블레어라는 사제일 뿐이었다.
“신전에 입적하는 것은 폐하께서도 윤허하셨으니, 이제 정말 영애는 자유요.”
블레어 디망은 그녀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신전에서 그대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겠소. 그간, 내 욕심을 받아 주어서 정말, 정말 감사했소이다.”
크흑! 그는 그렇게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
“아, 아니, 가지 마!”
“붙잡지 마시오! 내 유혹이라는 마족의 속삭임을 물리치고 있으니!”
그거 마족의 속삭임 아니라고!!!
쥬리 영애가 속으로 절규했다.
그녀가 털썩 주저앉는 사이 블레어 디망은 눈물을 훔치며 식당을 나가 버렸다.
“행복하시오오오오오!!!”
―쿵!
“야, 이 새X야!!!”
쥬리 영애의 절규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저놈이 갑자기 미쳤나!
아니, 생각해 보면 원래 사제가 되는 게 꿈인 자이긴 했다. 그래서 그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던 거고.
틈만 나면 속세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껄이는 자와 결혼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분명 얼마 전까진 그랬다.
그래서 구질구질하게라도 필레 공작의 계획에 매달렸던 거고.
‘살롱의 주인?’
우연히 그 살롱에 갔다가 살롱의 주인에 대해 들은 후.
그 직후 깨달았으니까.
필레 공작이 살롱의 주인이며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 계획은 구체적이며 살롱에 드나드는 면면만 해도 거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하늘을 뒤집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계획이 시작되면 쥬리 백작 영애, 자신은 끝이었다.
계획에 대해 아는 외부인이라니?
그녀가 살아 있는 건 황제 카리스가 저와 디망의 결혼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으면 눈에 띄니까!
‘오히려 황제의 시선을 받는 나라서 의심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거예요. 아닌가요?’
그 말로 간곡히 필레 공작을 설득한 그녀는 결국 하나를 해냈다.
‘그럼 황성 안에 사람을 침투시켜 게이트를 열 자리를 찾아보게. 그 정도의 진정성은 보여야 하지 않겠나?’
필레 공작의 요구는 쥬리 백작 영애의 능력에는 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해냈다.
비록 침투시킨 자는 죽었지만, 죽기 전에 정보를 빼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렇게 간신히, 간신히 들어간 자리인데!
“왜 이렇게 됐냐고!”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거야!?
쥬리 백작 영애가 땅을 칠 때였다.
―달칵.
다시 식당 문이 열렸다.
블, 블레어 디망이 돌아온 건가?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만찬이라 기다려 드렸는데 안 나오시네.”
그리고 지루한 얼굴의 감찰기사 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 길게 설명할 필요 없죠?”
시엘이 수갑을 흔들어 보였다.
“쥬리 백작가에서 필레 공작 측에 자금 댄 거 다 알고 왔는데, 혹시 이견 있으십니까?”
“그, 그……!”
“상단 이름으로 댔다는 변명은 하지 마시고.”
―철컥!
쥬리 백작 영애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놔! 나는 디망 경의 아내가―”
“아내가 못 되셨죠.”
시엘이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블레어 디망 경!”
쥬리 백작 영애가 절규했다.
하지만 이미 저택에 블레어 디망, 아니 블레어는 없었다.
“크흑! 영애! 행복하시오!”
그는 그 시각, 마차를 타고 신전으로 가고 있었다.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