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95화 (195/258)

# 195화 자이언트 (1)

그곳에 있었구나.

금빛 날개가 펄럭였다.

*

원장님으로부터 그날 이후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 여왕의 분노는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집계된 사상자가 천 단위를 넘었고 배움교는 궤멸했으며, 많은 수의 우딸리깔딸리들들이 죽었다.

미처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던 사태라 국가의 주요 인사들도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 사회는 마치 부품을 새로 갈아 끼우듯 순식간에 공석을 채웠다.

새로운 대표가 선출되어 조직이 새로 개편되는데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반면 능력자들 중에선 죽은 자들은 없었으나 여왕의 존재는 이쪽 세계에서도 큰 반항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대처할 수 없는 이계의 존재가 헌터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고, ‘워커’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합이 만들어졌다고는 하는데, 원장님은 크게 관심이 없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차별금지법은 유지되었다.

얼마 후, 이계의 종족들과 인간 대표들이 모여 국제회의를 가진다. 우딸리깔딸리들의 여왕은 이젠 대전이에 익숙해진 인류에게 새로운 충격을 선사했다.

원장님은 이들이 공존을 택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딱히 좋은 이유에서가 아니라 지금처럼 ‘알지 못하는 걸’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적이 될 수 있는 자는 곁에 두려고 하는 인간의 습성이라나. 변화는 곧바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회의에서 정해진 입법들은 공개된 정보로 모두가 알 수 있게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실질적인 개념으론 아직 시행되지 않았으나 형식적으로 본다면 이제 모든 이종족들은 의무적으로 사회 보장 번호를 받게 되며 인간과 동등한 사회적 신분을 가지게 된다.

또한 국제 연합에 가입된 국가들은 반드시 이계 담당부서를 설립해야 했으며, 새로운 기관은 고용노동부를 포함하여 다른 기관과 협력하여 처우 개선을 주도하겠다고 했다. 치안 유지를 위해서도 이편이 낫겠지. 이번 테러 사태도 우딸리깔딸리들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여 피해가 더 컸으니까. 아무튼 세상은 더 바뀌었다.

재미없는 비유지만 뭐, ‘한 걸음’ 디뎠다고 볼 수 있겠지.

*

난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젠장, 이번 일은 정말 미친 일이었다.

개미 여왕의 침소에서 기생 악마를 찾아 제거하는 임무, 일이 꼬이고 꼬여 결국 수백만 마리의 개미 군대와 대치해야 했다. 코끼리만 한 개미와! 그것도 수백만 마리! 훈련을 받은 전사들과! 교감의 힘으로 오해를 잘 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지하에 묻혔을 자는 악마가 아니라 나였겠지.

“이상해.”

지랄 맞게 힘든 임무를 수행한 건 이번만이 아니다. 난 욱신거리는 몸을 달래며 침대에 누워 지난 한 달간을 생각해 봤다.

이 일 이전에는 차원 휴게소라는 곳에 가서 우주 괴물을 사냥하는 스페이스 오페라를 찍고 왔고, 그 이전엔 모든 걸 녹게 만드는 산성 괴물을 음료수로 가공하는 기괴한 공장을 습격했으며 히어로 흉내를 내는 이종족과 빌런이라 자청하며 범죄를 꾸미는 조직을 소탕하기도 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예전엔 원장님도 최소한의 융통성이란 게 있어 힘든 일이 있은 후론 피치 못할 사정을 제외하곤 날 가만히 놔뒀었다. 지랄 맞은 임무는 몇 개월에 한 번씩 맡겼다. 지금처럼 겹겹이 발생하는 끔찍한 사건들로 지독히 혹사시키진 않았다.

따르릉-!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휴대폰이 울린다. 보지 않아도 원장님이겠지. 무시할까 고민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몇 초 후 공간이동으로 내 앞에 나타날 걸 알기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네.”

[다정 씨, 흉악한 프레데터들이 지구에 도착했어요. 인류를 에일리언 취급하며 사냥하기 전에 지구에서 몰아내야…….]

이 원장놈 좀 보게.

이제 임무에 돌아와 쉬려고 하니 곧바로 일을 시키는 거야? 그것도 듣기만 해도 기겁할 만한 일을 물고서? 역시 그날 이후로 달라진 거야. 우딸리깔딸리들의 여왕을 죽였던 그날이 전환점이었다. 난 그날 이후로 몇 달에 한 번씩 일어나야 정상인 끔찍하고 기괴하고 목숨이 오가는 우주급 스케일의 임무들을 연속해서 수행해야 했다.

이래선 어떻게 죽든 난 죽는다.

난 지독한 악덕 사장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을 하고자 마음먹었다.

“하아.”

[다정 씨, 왜 한숨을…….]

“수고요.”

난 일부러 원장님을 부르기 위해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젠장, 이젠 나도 참을 수 없다.

예상대로 몇 초 뒤 내 방에 원장님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미묘하게 들린 눈썹이 몹시 화가 났다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난 원장님이 말하기 전에 행동으로 나섰다. 내가 얼마나 굳은 마음을 먹었는지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싫어요. 안 해요. 이제 무리입니다. 독감 걸렸어요. 이번 주에만 골절 여덟 번, 사지 절단이 두 번, 세뇌 한 번, 괴물의 입속 탐험 한 번, 빌어먹을 것이 잘렸다가, 돋아났다 한 번. 차라리 날 죽여요. 이름 모를 우주 사냥꾼에게 죽을 바에야 원장님 손에 죽을래.”

악을 바락바락 쓰며 달려들었다. 평소엔 무서워서 반항이라곤 시시한 말장난이 다지만 사람이란 게 생존권이 걸려 있으니 이처럼 용감해질 수 있었다.

다른 의미론 무모하다는 거겠지만 어쩌라고. 배 째. 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불안한 침묵이 계속되어 슬며시 한쪽 눈을 떠 원장님의 눈치를 살폈다.

후우, 젠장.

원장님은 내 거친 투정에도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날 내려다보기만 했다. 문득 TV 프로그램 ‘우리 아이가 달라졌네요.’가 생각났다. 상담사가 그랬었지. 부모의 무관심이 아이에겐 엄청난 공포가 될 수 있다고. 난 부모가 없어 잘 모르고 이런 상황에 비유할 건 아니지만 한 가지 공통된 건 있었다.

무관심은 정말 무섭다는 것이다.

차라리 화를 내 줘요, 원장님아.

“일어나요.”

사람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선택에 따라 후회만이 남을 때도 있고, 그 선택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한 번 더 개길까, 얌전히 말을 들을까.

다행히 난 끝이 죽음인 선택은 기가 막히게 잘 피한다.

“네.”

이불을 고이 접고 벌떡 일어나 원장님을 마주했다. 앞서 말한 상처들과 경험은 모두 진짜 있었던 일이었지만, 원장님이 치료해 주어 멀쩡한 것도 사실이다. 난 이번 한 번만 우주사냥꾼 프레데터와 맞서 싸우고 그 뒤에도 힘든 일을 시키면 제대로 반항을 해 보자고 결심했다.

정말 이러기 싫었다.

하지만 누가 보면 난 화난 주인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아직까지 용은 무서운 걸 어떻게 해.

원장님은 눈썹을 살짝 추켜 올린 그대로였다. 언제 화를 풀까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던 그때, 원장님이 콧바람을 내쉬더니 표정을 풀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요. 확실히 내가 너무 많이 ‘기대한 것’ 같군요. 프레데터 일은 됐고, 한 가지 일만 해 주세요. 이번 일이 끝나면 원하는 만큼 휴가를 드리죠.”

난 어깨를 으쓱했다.

내게 너무 많이 기대했다고?

졸지에 난 원장님의 기대를 저버린 꼴이지만 일단 내 몸 간수하는 게 우선이지.

“어떤 일인데요?”

“무량성계.”

설명은 그 한마디만 됐다.

왜 원장님이 이번 일을 끝으로 원하는 만큼 휴가를 보내게 하려는 지 깨달았다. 게임으로 치면 난이도 극상의 던전이 무량성계다.

무량성계는 내가 가 본 세계 중 가장 골치 아픈 세계였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수련을 했었으나 내가 가본 세계는 기껏해야 무량성계의 동네 어귀에 지나지 않았다.

거수들의 세계이자 거인들의 고향인 그곳은 지구의 수십 배나 큰 차원인 것이다.

“시공간이 비틀려서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내가 수련을 그만둔 건 무량성계의 시공간이 지구와 같아지며 그 여파가 상당히 위험했기 때문이다. 원장님이 당분간 그곳으로 향하는 포탈을 봉인하여 적어도 몇 년간은 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시간의 선이 정리되어서 괜찮아요. 다만 이제 세계의 전이가 가까워졌다는 의미가 되겠죠.”

원장님이 말했다.

무량성계가 지구에 전이될 때쯤이면 과거의 대전이보다 훨씬 거대한 전이가 될 거라고.

원장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마물원에서 하자며 날 데리고 갔다. 내가 거절할 거라는 선택지는 없었던 것이다.

원장님은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 올 테니 준비한 자료들을 읽고 있으라고 했다. 난 잠자코 관리실에 앉아 원장님이 건넨 노트북의 화면을 바라봤다.

무량성계에서 일 년이나 지낸 덕에 익숙한 세계였으나 자료를 읽어 보니 이번에 할 일은 ‘거수’들을 상대하는 비교적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두근두근, 내 마음이 떨려 와~”

마치 치과 치료를 기다리는 불안한 심정으로 원장님을 기다렸다. 슬쩍 긴장이 돼 노래나 불렀다. 트루러브의 ‘내 사랑은 담지 못할 거야.’ 은근 중독성 있단 말이야.

잠시 후 원장님이 무언가를 들고 왔다.

“무량성계에 도착하면 꼭 착용하세요.”

원장님이 건넨 건 목걸이였다. 은줄에 사파이어로 보이는 보석이 장식된 세련된 목걸이. 하지만 남자가 쓸 만한 장신구는 아니었다. 나보다 원장님이 더 잘 어울리겠는데. 목걸이를 둘러보던 내게 원장님이 말했다.

“무량성계의 전이가 가까워지니 이제 그곳의 주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죠.”

무량성계의 ‘주민’.

거수들이 아니다.

물론 그들도 주민이라면 주민이겠지만.

지금까지 원장님과 내가 겪었던 무량성계는 거수들이 서식하는 대륙이었다. 그러나 ‘대륙거북이’가 사는 무한의 바다 ‘아프수’ 너머엔 진정한 무량성계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거인들… 윽, 놈들이 생각이란 것도 한답니까?”

무량성계의 주민은 딱히 거창한 의미 없이 그냥 ‘거인’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거대한 인간이다.

생김새도 인간과 가깝다. 하지만 직접 마주하면 결코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 새끼들이다. 난 놈들과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거수들과 다투며 어느 정도 수련을 끝마쳤을 때, 아프수를 건너 거수들을 사냥하러 온 거인들과 마주쳤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 중에 하나가 되었다. 딱히 싸우거나 하진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역겨웠었지.

“팬티도 안 입는 녀석들인데.”

놈들의 덩치는 고층 빌딩만 하다.

모든 게 크다.

모든 게 크다는 건,

결국 다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난 그들에 비하면 개미만 한 크기였고, 어쩔 수 없이 놈들이 지나갈 때 올려다봤어야 했다. 안 돼, 생각나려고 해. 그 엄청난. 아니, 생각하지 마!거인들은 ‘종족’이라 부를 만큼 지성은 가졌으나 인간에 비해 야만적이었다.

특히 자기보다 작은 생명체를 업신여기고 깔보는 성질이 있어 날 만나면 깔아뭉개려고 하거나 짓밟으려고 할 게 뻔했다.

원장님은 피식 웃더니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나름 문화를 가지고 있는 종족이에요. 그 목걸이, 다정 씨의 어떤 힘을 ‘안정화’시켜 주는 아티펙트니까 거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난 사파이어 목걸이를 바라보면서 인상을 구겼다. 단번에 원장님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했다.

“정말요?”

내가 가진 어떤 힘은 ‘거대화’를 말한다. 예전에도 대륙거북의 알을 훔치려고 한 헌터들과 상대하며 난 거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력이 강해질수록, 그릇이 커질수록 거대화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 수는 있으나 힘의 낭비가 커 주화입마가 오기 딱 좋았고, 마력이 강할수록 육체의 부담감도 커졌으며 굳이 거대한 육체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힘의 크기는 똑같기에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을 땐 거대화를 유지해도 육체의 부담을 느끼지 못할 거예요. 웬만한 힘을 발휘해도 버틸 수 있게 설계했으니 너무 많은 힘을 끌어올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아요.”

원장님이 건넨 목걸이는 거대화를 유지시킬 수 있는 마도구. 즉, 나더러 ‘거인’이 되어 무량성계의 거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것이다.

“마침 축제 기간이니 어울려서 알아보세요. 수고요.”

내가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뒀는지 원장님은 평소에 쓰지도 않는 말로 대화를 종결시켜 버렸다.

젠장, 결국 갈 수밖에 없다.

거인들과 지내는 게 좀 역겹긴 하지만 근래 해 왔던 일에 비하면 위험하지도 않고 쉬운 편이지.

문제는 이거, 오랜만에 꽤 깊은 수치심을 자극시키는 사건이 될 것 같은 기분이다.

“팬티, 어떻게 해요?”

설마 거인들처럼 나도 가죽 치마만 입어야 하는 건가? 내 질문에 원장님은 얼굴에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내게 말했다.

“알아서 해요. 아, 내게 알려 주진 말고.”

고민이다.

마치 찜질방에 들어가기 전 팬티를 입을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다.

결국 난 싫어하는 원장님에게 부탁해서 ‘마법 팬티’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가죽 치마는 거수들의 가죽을 두르면 대지만 팬티는 어쩔 수가 없다.

“이거면 될 거예요. 참, 드래곤이 이런 것까지 만들어야 하다니.”

난 신축성 지존의 강력한 팬티를 얻게 되었다. 헐크의 팬티보다 더 강력해 심지어 내가 고층 빌딩처럼 커져도 버틸 수 있겠지. 무량성계에서 누가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절대 그들처럼 무자비한 몰골을 노출하는 건 극구 사양이다. 윽, 또 생각나려고 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