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앵무새 (5)
남봉이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그 순간, 몸을 녹이던 독기가 사그라지고 지독한 고통이 멎는다.
“병신!”
남봉이가 비웃던 독왕을 향해 외쳤다. 난 피식 웃곤 당백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 모두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고 있는데 왜 그걸 모를까.
난 깃드는 힘을,
녀석이 내게 전해주는 기운을 받아 들었다. 단지 기를 나누는 교감을 넘어, 동화라 이를 만큼 봉남이와 난 하나가 되어 갔다. 내 그릇이 녀석의 힘으로 채워질수록 백만 마물의 독이 정화되며 괴사된 육체가 재생되어 갔다. 마침내 흉터 하나 없이 완벽하게 몸이 복구되었을 때, 그럼으로 난 녀석의 진정한 이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물이 아니었구나.”
하나가 되어, 봉남이의 과거를 엿본다. 그는 앵무새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마물이 아닌 다른 세계의 ‘신수’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이자 고귀함의 상징. 넌 불사조, 아니… ‘봉황鳳凰’이었구나.
언뜻 보았다.
찬란한 날개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귀하고 신성한 불새를.
고귀함은 어긋나지 않는다. 더럽혀지지 않으며 항상 바르게 유지된다. 그럼으로 녀석은 죽지 않는다. 봉황의 힘은 재생, 그 근본의 이치는 고귀함을 유지하는 것. 상처와 죽음은 고귀함을 잃어 가는 행위이니 죽음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봉황은 제 모습을 되찾는다. 하지만 녀석은 지금 고귀함의 신수라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난 점점 봉남이의 잃어버린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 녀석은…….
아니, ‘너희들은’ 아직…….
*
만독구를 삼킨 내가 멀쩡히 돌아다니자 독왕은 표독스러운 분노만이 남은 것 같았다. 내게 온갖 욕들을 내뱉던 그는 ‘대방주’들이 날 죽일 거라며 협박했다.
“알고 있어.”
난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알고 있는, 원장님에게 전해 들었던 무림의 주왕, 대방주들에 대해서 독왕에게 얘기해 줬다. 당백호는 당황하며 절대 지구의 하찮은 인간들은 우리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며 중얼거렸다. 난 녀석의 뒤통수를 후들겨 패며 말했다.
“너만 빽 있냐, 새끼야.”
큼.
기절한 독왕을 내려다보다 코를 훌쩍였다. 당분간 마물원에 가둬놔야겠네.
호텔 로비엔 카르마 길드 놈들이 잔뜩 있었으나 독왕을 데리고 나오기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굳이 싸우지 않고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놈들을 따돌렸다. 무림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내 경공을 따라올 자 없었다.
*
그날 이후, 몇 주가 지났을 때였다.
봉남이가 갑자기 사라졌다.
난 녀석이 내게 머물던 이유와 사라진 이유도 알고 있었으나 섭섭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작별인사라도 해 주지 어떻게 말도 없이 사라지냐. 아침에 일어나 밥을 차릴 때, 봉남이가 고기 달라 보채던 소리가 사라졌다. 출근길에 아침 햇볕을 맞으며 노래하던 소리도, 마물원에 도착해서 마물 우리에 데려가 달라 소리치던 소리도, 데려가 줬더니 제게 덤비는 마물 녀석들을 보며 병신이라 외치던 소리도. 비어 버린 소리, 공백 속에서 난 봉남이의 빈자리를 느꼈다.
일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가 재건되기까지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난 경비원들을 피해 내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집이 왜 이리 허전하게 느껴지는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며 안주거리를 찾았다. 냉장실에도 봉남이와 단비를 위한 소고기만이 잔뜩 있었다. 단비는 계속 자고 있으니 처치하기 곤란한데.
소파에 앉아 빈속에 맥주 두 캔을 홀짝이다가 침대에 누웠다.
뒤척이다가 잠든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붉은 새 한 마리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비단처럼 곱고 붉은 꼬릿깃이 넘실거리고, 날갯짓을 할 때마다 붉은빛 가루가 흩날려 세상을 수놓았다.
그리고 붉은 새 옆에는 또 다른 새가 있었다. 봄의 색깔처럼 노란 깃털의 새였다. 그 둘은 서로 꼬릿깃을 엮고 날아다녔다. 난 한참 동안 두 새의 비행을 지켜봤다. 마침내 둘은 하나가 되었는데, 고귀한 날개를 펼치며 날아와 날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난 잠에서 깨어났다.
*
일어나 보니 늦은 점심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던 난 베개맡에 놓인 두 개의 깃털을 발견했다. 붉은색, 노란색 깃털이었다. 난 붉은 깃털을 주워 냄새를 맡았다. 봉남이의 정체를 알았을 때부터 나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봉황은 짝이 있다.
봉과 황은 같이 있지 않으면 섭리가 무너진다. 둘은 하나니 그럼으로써 봉황, 신수가 된다.
그러니 봉남이가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 그들의 삶에 비하면 찰나의 시간이지만 나와 함께 지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난 확실히 잘 알았다. 녀석은 날 떠났지만 오히려 잠시지만 날 둥지로 택했다는 게 고마웠다.
“녀석…….”
깃털의 끝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던 그때였다. 붉은 깃털이 부서져 반짝이는 가루가 되었고, 가루는 내 손에서 물에 탄 듯 녹아서 없어졌다. 비록 형태는 남지 않았으나 이건 확실히 봉황의 선물이었다.
*
만독구의 독은 아직 내 안에 있다.
단단한 그릇에 담겨 독기를 내지 못하고 있으나 내가 그 힘을 끌어올리면 기다렸다는 듯 사기를 내뿜는다.
마물의 독이나 원래 내겐 없던 것.
마물에게 있던 것이나 별개의 것이기도 하여 독은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독구의 독을 끌어올리자 몸의 혈관들이 모두 불타는 것 같았다. 지독한 고통, 없느니만 못한 힘.
그러나 봉남이가 내게 주고 간,
고귀함을 유지하는 봉황의 기를 같이 끌어올리자 지독한 독기마저 날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다. 봉황의 기를 머금고 있으면 독은 쇠그릇에 담긴 듯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난 조심스레 손에 고인 독을 한 방울 아래로 떨어트렸다.
마물이 없는 빈 우리, 잡초와 나무만이 가득한 숲에 만독구의 독이 떨어지고, 그 순간 초록빛 녹림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난 다시 독을 흡수했다.
비록 봉황의 기와 병행해야 하지만 무시무시한 힘이다.
그리고 봉황의 기.
봉남이가 나와 하나가 될 때처럼 완전한 재생은 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뛰어난 힘이었다. 이제 마데카솔은 필요 없겠네.
*
몇 달 동안 평화로웠다.
물론 일은 여전히 힘들었으나 이제 웬만한 상처도 문제없으니 원장님이 있을 때처럼 작업의 진행에 막힘이 없었다.
“끝났다.”
원장님이 주고 간 작업 목록.
드디어 일을 모두 끝냈다.
이제 남은 건 원장님이 돌아오기 전, 꿀 같은 휴식뿐.
난 마물원에 들려 자동급식기(드래곤이 제작한 공간 이동 기능의 대형비행기보다 더 큰 대형 골렘)에 먹이를 가득 채우고 어디 따뜻한 나라로 력셔리 여행을 떠나고자 생각했다. 사실 여행 따윈 아무래도 좋다. 이 위험하고 지긋하고 끔찍한 숙제를 모두 끝냈다는 것만으로도 하늘을 훨훨 날 만큼 기뻤다.
들뜬 마음으로 마물원에 출근해서 마물 먹이를 준비할 때였다.
“오랜만이구나.”
관리실의 문이 열렸다.
난 문을 열고 들어온 자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불길한 예감이 휘감겨오기 시작했다.
“스승님……?”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회색 단벌옷을 입은 중년인, 언뜻 추레한 꼴이지만 그의 정체는 무림인, 기천수호문의 문주이자 독왕도 두려워한 도성 곽운이다.
내 스승이기도 하고.
“뭐여.”
스승님의 방문이었다면 이리 당황스럽지 않았을 텐데. 난 스승님의 뒤로 슬며시 관리실로 들어오는 덩치 큰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관리실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내게 시선을 고정했는데 날 보자마자 껄껄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 반갑다.”
그가 다가와 악수를 건넨다.
난 그의 얼굴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봤을 때 곰인 줄 알았다. 속마음이 들려오지 않아 인간인 걸 깨달았지. 무림인인가? 키는 2m가 넘어 보인다. 머리는 산발로 정리가 되지 않은 긴 머리였는데 거지꼴이나 오히려 그완 어울렸다. 추운 겨울에도 도복 같은 복장만 입었는데 언뜻 보이는 속살엔 무시무시한 흉터들이 잔뜩 있었다. 목소리와 첫인사만 들어도 호탕한 느낌인데, 편견일지 모르나 머리는 무척 나쁘게 생겼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싸움꾼의 모습이다.
“으하하.”
보통 악수를 받아 주지 않으면 머쓱해서 손을 거두는 법인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수를 받아 줄 때까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곽운 스승님을 힐끔 쳐다보자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할 수 없이 악수를 하며 말했다.
“그래, 반갑다.”
반말했으니, 반말로.
솔직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정말 막강했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그러나 ‘드래곤’은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꿀릴 이유가 없다.
악수를 하며 손을 흔드는데 아귀힘이 장난 아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황소 마물의 괴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악수를 나눈 후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으하하, 당돌함이 멋진 사내로군! 그래, 반갑구나. 반가워. 내가 네 사형, 강태풍이다.”
난 두 가지 이유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곽운 스승님과 같이 등장해서 무림의 고수인 줄 알았더니 사형이라니, 내 사형이라면 스승이 같다는 것. 곽운 스승님의 제자였었나? 두 번째는 그의 이름이다. 강태풍, 세상에. 강태풍이래.
“스승님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용의 수호자라니, 으하하! 용의 수호자!”
강태풍, 그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한참 껄껄대다가 눈물까지 찔끔 흘리더니 자길 가리키며 스스로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난 ‘무신’의 재능을 가졌다. 곽운 스승님의 첫 번째 제자로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모든 기의 유형을 깨우쳐 제자를 받지 않는 도성의 첫 제자가 되었고, 지구인임에도 불구하고 화경의 경지를 넘어…….”
그는 무언가 대답을 기대한 듯했지만 난 눈을 까뒤집으며 무시했다.
“엥? 사제, 눈이 왜 그래.”
그가 당황하며 되묻지만 난 뒤집은 눈을 원상태로 돌리지 않았다. 아마 상대는 말로 해선 잘 알아듣지 못하는 타입일 확률이 높았다. 이처럼 듣기 싫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게 나은 방법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 까뒤집은 눈이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해 준다. 그가 당황한 손짓으로 내 눈꺼풀을 이리저리 만졌지만 난 절대 검은 눈동자를 보여 주지 않았다.
*
곽운 스승님에 의해 정식으로 소개를 나눴다. 그는 강태풍, 지구인이며 한국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곽운 스승님의 첫 번째 제자기도 했는데 그가 말한 무신의 재능이라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내가 스승님에게 무공을 배울 당시에 난 재능이 너무 없어 결국 내 스스로 무공을 창조하는 형의권을 배워야만 했다. 그때 곽운 스승님은 내가 두 번째 제자라고 하였고, 모든 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신의 재능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를 두고 말한 것이다. 내키진 않았으나 그래도 스승님 체면을 봐서라도 일단 사형 대접은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다지 나와 엮일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
난 커피를 여섯 잔째 먹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성격이 나와 정반대에 있는 자라 이유 없이 싫었지만, 솔직히 그의 힘은 무시하지 못했다. 독왕의 기운도 그에 비하면 하찮게 느껴질 정도다. 그마저도 대충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지 완전한 힘을 유추하기도 힘들었다.
“다정, 우리가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겠지.”
곽운 스승님이 용건을 말하기 시작했다. 역시 제자 간 소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
“우선 독왕 당백호, 그자를 봤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