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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57화 (58/222)

57. 코헨으로

이네스는 방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의 다른 영혼과 합쳐진 지금. 잃어버렸던 힘과 지식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빛의 정령을 다루는 것.

이네스의 어깨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매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이네스는 정령들을 조심스레 쓰다듬다, 다시 사색에 잠겼다.

또 다른 자신의 영혼과 합쳐진 만큼 그 기억과 감정도 함께 되돌아왔다.

아무래도 코르디스의 창고에 잠들어있던 이네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낸 모양이다.

그래도 그녀가 느꼈던 수백 년 치의 외로움과 고독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이네스는 아려오는 가슴과. 선명해져 오는 기억을 되새기며 오랜 사색 끝에 다짐했다.

‘역시 이안은 더 강해져야 해. 혼자서 악마를 벨 수 있을 만큼.’

***

겨울이 지나고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 되었지만 페어윈드는 여전히 북적였다.

청어잡이 어선과 물자를 운송하는 상선들이 항구에 드나들고.

잠시 정박해 쉬러 온 선원들과 상인들. 그들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술집과 음식점들.

배에 물건을 올리는 잡일꾼부터 어디 돈 되는 거 없나 냄새를 맡고 찾아온 용병들까지.

세상에 뭐 이리 사람이 많은지. 북적이는 인파에 이안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빨리 이곳을 떠야겠어요. 코르디스 근처라 영 불편해서…….’

코르디스에서 어떤 참사가 벌어졌는지, 소문이 퍼질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레아와 플로라가 이안이 전사한 거로 증언해줄 테니, 큰 걱정은 없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또 다른지라.

조금이라도 빨리 코르디스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일단 내 용병패 신분은 당분간 사용하면 안 될 것 같고…… 목적지까지 같이 갈 일행을 구해야 하는 건가?’

기본적으로 크레이 사가에서는 여러 악랄한 이벤트들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이벤트들은 길에서 혼자 다닐수록 조우할 확률이 올라갔다.

게다가 다음 목적지인 코헨 자유도시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 위험도도 더 오르는 셈.

결국, 파티 플레이를 권장한다는 건데, 당장 이안에게는 어려운 얘기였다.

고민하는 이안에게 이네스가 제안했다.

[용병 길드에서 상행을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돈만 지불하면, 상단의 호위를 받으며 갈 수 있잖아요?]

‘그게 무난하긴 한데…….’

이안은 품에 있는 돈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가볍다.

당장 생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이안에게는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에휴. 어쩔 수 없죠. 괜히 아끼려다가 더 손해 볼 수도 있는 거고요.’

[잘 생각했어요.]

결정을 내리고, 사람들 사이에 부대껴 걷기를 한참.

가까스로 용병 길드의 앞에 도착한 이안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바깥과는 달리. 용병 길드 안쪽은 한산했다.

용병들은 이미 의뢰를 받고 아침에 떠난 참이고.

의뢰를 맡기러 온 사람들과 한가롭게 서류작업을 하는 직원 몇이 있을 뿐이다.

후드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낀 이안이 들어오자 시선이 잠깐 집중되었지만 이내 신경을 끄고 사람들은 저 할 말을 했다.

“아침에 코르디스로 배가 뜨던데, 대체 무슨 일이지?”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 안개가 짙게 떠서 코르디스가 안 보이던데.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닌감?”

“에이. 잘나신 귀족들 걱정해서 뭐해. 나는 이번에 계약한 농가의 산출량이 생각보다 더 떨어져서 죽겠고만.”

“예년에 비해 추워져서 그런가? 여름인데도 좀 시원한 것 같고…… 근데 뭘 보슈?”

잡담을 나누던 상인 중 하나가 이안을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아차. 너무 대놓고 엿들었나.’

이안은 대충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엿들은 바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코르디스에 벌어졌다는 소식은 이미 다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서둘러 향한 창구에서 길드 직원이 친절하게 맞이해주었다.

“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코헨 자유 도시로 가는 상단이나 일행이 있으면 같이 동행하고 싶은데요.”

“코헨 말씀이시죠? 잠시 기다려주세요.”

직원은 곧바로 서류 더미를 꺼내 능숙하게 살피다,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꽤 오래 기다릴 수도 있는데, 괜찮으세요?”

“예? 코헨으로 가는 상단이 많이 없나요?”

의아한 일이었다.

코헨은 연금술의 도시.

상업의 발달 또한 페어윈드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런 코헨으로 향하는 상단들이 없다니?

그런 이안의 의문에 직원이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아, 그 소식 아직 못 들으셨군요.”

“무슨 소식이요?”

대답은 뒤쪽에서 들려왔다.

“코헨에서 마녀들이 밀려 쫓겨났소. 뭐, 이교도랑 손을 잡았느니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그냥 알력 다툼에서 밀린 거지.”

아까 이안이 엿듣고 있던 상인 중 하나였다.

그는 마침 심심했는데 아는 척 할 기회가 생겨서 기꺼운 듯, 직원을 대신해 설명했다.

“그 마녀들이 코헨과 이곳 사이의 늪지에 터를 잡았소. 그리고 지나가는 여행자나 상단을 습격하고 있지.”

늪지의 마녀.

이안도 알고 있는 이벤트였다.

자세한 건 잊었어도, 이것만은 기억에 남았다.

‘아주 지랄맞은 이벤트였지.’

기억을 잠시 되새긴 이안이 물었다.

“도시에서는 별 대처를 안 하는 겁니까? 상단들이 약탈당하면 피해가 막심할 텐데.”

“왜 안 보냈겠소. 이미 두 차례나 병사들을 보내 토벌을 시도했었소. 그럴 때마다 늪지 깊숙한 곳에 숨어 버려서 허탕만 쳤을 뿐이지.”

감당할 수 없는 상대가 오면 도망치고, 그들이 물러나면 다시 돌아와 여행자를 습격한다.

아무래도 이 마녀들은 꽤나 영악하게 행동하는 듯했다.

“그래서 코헨으로 가는 여행자들과 상단들은 웬만큼 숫자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가려 하고 있소. 우리가 이 중요한 시기에 이런 곳에서 죽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고.”

직원도 여간 골치가 아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건으로 페어윈드 영주께서 고심이 크십니다. 마녀들의 수장의 목에 현상금까지 걸었고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충분히 규모를 갖출 때까지 코헨으로 향하는 상단은 출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직원은 이안에게 코헨으로 출발하는 상단의 총책임자 격 되는 인물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카일 상단의 지오 카일 님을 직접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 이안의 등에, 아까 신나게 설명하던 상인이 말했다.

“카일 님을 뵈러 갈 때는 그렇게 안 입고 가는 게 좋을 거요. 신뢰를 중요시 여기는 분이거든.”

호의로 알려주는 건가, 아니면 비아냥거리는 걸까.

어쨌든, 후드와 두건으로 꽁꽁 싸맨 이안은 빈말로라도 신뢰를 주는 모습은 아니었으니, 상인의 지적은 실로 합당했다.

‘딱히 이걸 벗는다고, 내 머리랑 눈 색 보면 의심이 줄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상단의 호위에 참여하려면 책임자에게 허락을 맡아야 하니. 이안은 걸음을 다시 서둘렀다.

카일 상단은 도시의 외곽. 한산한 곳에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다들 한가하게 이곳저곳 늘어서 있었고.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 사내만이 다른 상단의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카일 씨 맞나요?”

이안이 다가서니 이름을 불린 사내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고, 이안의 위아래를 훑었다.

숙련된 상인답게 그 시선의 움직임이 몹시 빨랐는데.

대충 이안에 대한 판단을 마쳤는지, 카일이 물었다.

“내가 카일이 맞네만 누구신가?”

“코헨으로 가는 상단에 합류하고 싶은데, 길드에서 말하길 카일 씨한테 찾아가 보라 해서요.”

“그렇다면 맞게 찾아왔군. 한데…… 흠. 자네, 돈을 지불할 여력은 있나?”

미심쩍은 시선이 이안에게 꽂혔다.

상인의 말마따나, 카일의 이안에 대한 첫인상은 썩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거, 호위비라 해야 얼마나 한다고.’

이안은 품에서 자루를 꺼내며 호기롭게 물었다.

“얼마인데요.”

“은화 스무 개일세.”

“미…….”

‘친놈아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삼켜냈다.

이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이렇게 비싼 겁니까.”

“우리라고 이렇게 받고 싶어서 받는 건 아닐세. 안전을 위해서라면 용병들을 많이 고용해야 하는데,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용병들은 늪을 별로 지나고 싶지 않아 해. 그러면 별 수 있나. 웃돈을 얹어주고라도 고용할 수밖에.”

요컨대, 호위를 위해 사용하는 돈이 많아. 비용이 터무니없이 올라갔다는 소리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다는 게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일까.

하지만 카일은 이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코헨을 찾아가야 하는 듯했다.

카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나도 미치겠다네. 약초를 빨리 기한 내에 납품하지 않으면 오랜 거래처가 무너질 판인데…… 늪을 통하지 않으면 한참을 돌아가야 하니. 아주 곤란해.”

“그냥 용병은 최소한도로 쓰고. 대충 사람 많이 받아서 몸집만 불리면 마녀들도 안 건드리지 않을까요?”

“자네는 마녀들을 바보로 아나? 그년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안 그래도 답답한 상황에서 누군지도 모를 놈이 계속 질문을 던지니. 카일은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카일이 거칠게 말았다.

“거, 아무튼.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돌아가게. 나는 바쁜 몸이야.”

이안이 재빨리 말했다.

“혹시 제가 호위에 도움이 되면 값을 좀 깎아줄 수 있나요?”

“호위? 그건 용병 길드에 물어볼 문제지.”

“제가 지금은 신원을 밝히기 곤란해서요.”

“자기 얼굴로 안 밝히고 신원도 안 밝히는 사람을 호위로? 자네 미쳤나?”

카일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안은 고민했다.

‘막무가내로 받아달라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거 같고. 그렇다고 은화를 스무 개나 내는 건 너무 아깝고. 그렇다면…… 아.’

순간.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흠흠. 내 이건 안 밝히려 했는데…….”

이안은 한차례 헛기침한 뒤, 품을 뒤져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하얀 방패에 롱소드가 겹쳐 있는 문양이 달린 목걸이.

에스테반이 헤어지기 전에 준 화이트가드 가문의 증표였다.

경험 많은 상인인 카일은 그 증표를 단박에 알아봤다.

“화, 화이트…….”

“쉿. 조용히.”

이안이 검지를 들어 코에 가져다 대는 제스쳐를 취하자.

카일이 고개만 끄덕였다.

“난 사실 화이트 가문에 봉사하는 사람이네. 가문의 장남, 에스테반 경에 대해서 혹시 들어봤나?”

바뀐 이안의 말투에 카일이 급격하게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아, 알다마다요.”

“내가 그분의 종자일세. 지금은 경께 비밀스러운 임무를 받고 코헨으로 향하고 있지.”

“그렇군요.”

이안은 청산유수처럼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뒤 섞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 실력은 확실히 보장된 셈이지. 이 정도면 값을 깎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돈을 받아야 할 지경이네. 아니, 내가 호위에 도움을 줄 테니 나한테 돈을 주게.”

“…… 예?”

처음에는 값을 깎아달라 하다, 갑자기 오히려 돈을 요구하는 급격한 요구 변화.

숙련된 상인인 카일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흥정방법이었다.

아니. 흥정이 맞기는 한가?

그냥 갈취가 아닌가?

카일이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안이 몰아쳤다.

“어쨌든. 어떻게 할 텐가. 내 자네들의 사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호위비용으로 큰돈을 요구하지는 않을 거야.”

[이안. 기껏 양심적으로 행동하더니 왜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버린 건가요…….]

이안은 이네스의 한탄을 꿋꿋이 무시하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빨리 돈을 내놓으라는 압박에 저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던 카일이 우뚝 멈춰 섰다.

상인의 직감이 말했다.

무언가 수상쩍다고.

게다가 마스크 위로 보이는 저 두 눈동자.

새까맣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점점 쌓여가던 신뢰가 훅 내려앉았다.

카일이 이안에게서 한걸음 떨어지며 물었다.

“뭐. 일단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아직 잘 모르겠군요. 뭔가 따로 증명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화이트 가문의 증표로는 부족하다는 겐가?”

“정말 죄송스럽지만. 의심하는 게 제 직업 병인지라.”

이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빼면. 오히려 의심만 더 키울 뿐이겠지.

이안은 한손을 피며 물었다.

“카일. 정령에 대해 들어보았나?”

“아, 예. 귀족들만 다룰 수 있는 신비의 일종 아닙니까.”

“그럼 이게 뭐인 것 같나?”

이안의 손에 나풀거리며 떠 있는 빛 뭉치.

빛의 정령을 본 카일의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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