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58화 (59/222)

58. 햇살 아래에서

처음 보는 정령의 존재에 카일이 말을 잃었다.

이안이 거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것 같나?”

카일이 황송하게 답했다.

“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건 빛의 정령입니까? 정령사 중에서도 빛의 정령이나 어둠의 정령을 다루는 사람은 희귀하다고 들었는데…….”

카일은 손바닥을 내밀어 빛의 정령에 가까이 대어 보였다.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은은한 따뜻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허…… 죄송합니다.”

“뭐가 말인가?”

“솔직히 말해, 사기꾼이 아닐까 조금 의심했었습니다. 부디 제 무지를 용서해주시길.”

“…… 알아주었으면 됐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카일에게 뜨끔한 이안이 얼른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실 반 정도는 사기가 맞았으니까.

이안은 얼른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이거면 충분하겠지?”

“예! 물론입니다! 이거, 마녀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시름 놓았군요.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어찌어찌 이야기가 잘 돼, 원하는 대로 조건이 맞춰졌다.

모든 게 잘 풀린 셈이다…… 따가운 이네스의 시선을 제외하면.

[이안. 기사도와 영웅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강의할 테니 그리 아세요.]

일방적인 통보에 이안은 두 눈을 질끔 감았다.

***

“자. 정령에게 명령을 내려주세요.”

이네스의 지시에 이안은 한가롭게 주위를 떠다니던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주위에 빛을 밝게 흩뿌려봐.”

빛의 정령은 이안의 어깨까지 날아오르더니. 깜빡깜빡 점멸하며 밝은 빛을 냈다.

이네스가 이어서 지시했다.

“자. 그러면 이제 더 복잡한 명령을 내려보세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다른 곳에는 말고, 내 손바닥에만 빛을 비추면서 내 머리 위를 한 바퀴 크게 돌고. 그다음에 빠르게 아래로 낙하해봐.”

이안의 손바닥을 향해, 정령이 한 줄기 빛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이후의 명령은 기억하지 못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아직 정령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서 이런 거예요. 간단한 명령은 알아들어도, 명령이 조금만 길어지면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게 되죠.”

이네스는 양 손바닥을 그러모았다가, 손바닥을 동시에 젖혔다.

그러자 마법처럼 손바닥 위에 빛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매가 앉아 있었다.

“피요오오오!”

매가 울부짖자, 날개에서 빛의 입자가 휘황하게 흩날렸다.

그 고고한 자태에 감탄할 새도 없이, 매가 날아올랐다.

“피요오!”

후욱!

날개를 펼친 빛의 정령이 좁은 방안을 순식간에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빠르기는 말 그대로 광속.

정령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상만이 그 궤도를 알려줄 뿐이다.

그렇게 한차례 비행을 마친 빛의 매는 우아한 날갯짓과 함께 이네스의 어깨에 앉았다.

이네스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어때요? 굉장하죠?”

“…… 방금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린 거죠?”

“저와 정령들은 하나의 마음으로 이어져 있거든요.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알아서 제가 원하는 걸 들어줘요.”

마음속으로 명령하는 걸 넘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령이 따르게 되는 경지.

이네스는 단순히 검뿐만 아니라, 정령사로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안이 서둘러 물었다.

“이네스 님처럼 정령을 다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검이랑 달리, 수련방법도 감이 잘 안 잡히는데…….”

“정령이랑 친해질 필요가 있죠.”

“…… 예?”

“마법에 있어서 젤 중요한 건 이해. 검술은 직감. 신성력은 믿음이라면 정령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교감이에요. 부리는 정령과 교감할수록 정령은 더욱 강해지고. 실력도 느는 셈이죠.”

화악!

갑자기 빛의 매가 날개를 활짝 펴 그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이네스가 매의 가슴 부분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정령은 더 강해질수록, 원시적인 형태에서 더 고등한 모습으로 바뀌어요. 지능도 높아지고, 실체도 생겨나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죠. 한번 만져보세요.”

이안은 아리송한 얼굴로 매의 가슴 부분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어……?”

손가락이 가슴 부근에서 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실체를 갖춘 빛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이안이 손가락에 힘을 주자, 빛의 매가 화를 냈다.

“피요오!”

손가락을 급하게 되돌린 이안이 중얼거렸다.

“……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없어요. 뭐든지 스스로가 믿는 대로 될 뿐.”

이네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빛의 매는 생각보다 다재다능하다고 한다.

빛을 밝히거나, 의식을 공유해 시야를 얻는 건 기본.

심지어 마치 검을 휘두르듯. 날카로운 빛으로 상대를 베는 것도 가능하다니 그 유용함은 의심하지 않아도 되리라.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죠?”

“…… 정령이랑 어떻게 교감하면 되는 건데요.”

“빛의 정령이니까 일단…… 빛을 느껴야겠죠?”

그날부터 또 다른 수련이 시작되었다.

***

“저놈 저거 뭐 하는 거야?”

“몰라. 미친놈인가 봐.”

“주인장은 왜 저런 걸 그대로 두는 거야.”

“돈을 두둑하게 냈다는데?”

“쩝. 그럼 어쩔 수 없지.”

페어윈드에서 가장 볕이 잘 든다고 소문난 여관. ‘찬란한 새벽’에는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얼굴을 후드와 두건으로 가린 괴인이. 지붕 위에 나체로 앉아 온종일 햇볕을 쐰다는 것이다.

그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세상 참 미친놈도 많다며 껄껄 웃으며 술자리 안주로 쓰곤 했다.

정작 그 소문의 당사자인 이안은 죽을 맛이었지만.

‘모르겠다.’

속옷도 모두 벗고 후드만 젖혀 온종일 앉아 햇볕을 쐰 게 벌써 사흘이다.

기묘한 해방감과 어쩔 수 없는 수치심 속에서 몸부림치며 이안이 얻은 건, 건강하게 탄 피부뿐.

참다못한 이안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하루 종일 앉아만 있고. 명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빛을 느끼라니. 애초에 요구가 너무 추상적이라고요.’

[정령은 다른 그 무엇보다 추상적인 존재인데, 설명이 어찌 명확할 수 있을까요. 직접 감을 익히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요.]

“하아.”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검술이나 운동은 나았다.

하면 할수록 눈에 나아지는 게 보이고, 명확한 목표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령술이란 신비는 너무나 원시적이고 추상적이다.

열심히 부딪혀봐도 무언가 눈에 띠는 변화는 없고. 나아진다는 감각도 없다.

둥둥 떠다니는 빛 덩어리 모양의 정령을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다.

새삼, 코르디스에서 만났던 로든이 꽤나 뛰어난 정령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 정령이 인간 모양을 하고 있었지. 생각해보면 음식도 먹었던 거 같고.’

아쉽게도 빛의 정령은 이안이 주는 음식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아직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안되었거나, 음식이 마음에 안 들었거나.

고민하던 이안은 곁에서 떠다니는 정령을 괜스레 툭 하고 건드려보았다.

빛의 정령이 하늘거리며 춤을 추었다.

다른 건 몰라도, 햇볕을 오래 쐬니 기분은 좋은 것 같았다.

‘뭐. 네가 기분 좋으면 된 거지.’

이안은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생각했다.

어차피 조급해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무엇보다, 이안의 주력은 정령이 아닌 검이었으니까.

탓.

앞섬을 여민 이안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꺄악! 변태가 여기로 온다!”

“물러나. 괜히 엮였다가는 피곤해진다!”

“…….”

다소 거슬리는 반응들을 무시하며. 이안은 검을 주었고. 뽑은 뒤. 휘둘렀다.

후욱!

간단한 내려베기 한 번.

이안은 그 한 번의 동작 후에, 그대로 서서 방금의 손맛을 느꼈다.

‘달라졌다.’

성검의 조각을 찾아 이네스의 다른 힘을 추가로 받은 영향인지. 이안의 몸은 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똑같은 동작이라도 실리는 힘이 다르면 완전히 다른 느낌이 되어 버리는 법.

이안은 방금의 동작에 대해 오래도록 사색했다.

“…….”

이안은 이제 반복적으로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지 않았다.

그게 더는 그의 수준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이제 기본을 배웠으니 깊게 들어갈 시간.

이안은 이제 확실히 인정할 수 있었다. 자신이 검술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말이다.

“뭐야 저거. 폼이나 잡고 있어.”

“가자. 그냥 미친놈이었나 보네.”

구경하는 다른 이들은 흥이 깨졌다는 듯 사라지고.

홀로 남은 이안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후욱!

조금 전과 똑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빛의 정령이 검과 하나가 되어 주변에 빛을 뿌렸다.

검에서 반사되는 빛은 상대의 시야를 효과적으로 가려낼 수 있었다.

이안은 검의 단면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실전에서 어떻게 사용할지를 상상했다.

그 모든 수련을 이네스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예전과 달리. 이네스가 조언을 건네는 경우는 크게 줄었다.

[일단 기본이 쌓이면,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게 제일 좋으니…….]

남이 알려주는 것과 직접 몸으로 깨닫는 것.

그 깨달음의 깊이가 차이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안의 자습이 한참을 이어졌다.

새벽같이 떠오르던 해가 어느새 카스크 내해의 수평선 아래로 넘어가고.

세상이 오렌지 빛으로 바뀔 때쯤에야 이안의 수련은 끝이 났다.

‘후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강한 집중력은 시간의 흐름도 잊게 했다.

이안은 이마에 난 땀을 훔쳐내고 여관의 문을 열었다.

몸을 혹사한 뒤에는 적절한 영양 섭취를. 그리고 적당한 휴식을.

특히, 이안의 사전에 있어서 끼니를 대충 넘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지.’

이안이 들어서자,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상황에서도 단박에 알아본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오셨군요. 그래, 오늘도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

처음에 지붕을 쓸 수 있냐고 물을 때에만 해도 경멸 가득하던 얼굴이 지금은 친절하기만 하다.

그만큼 이안이 지불한 금액이 두둑하다는 의미였다.

‘돈이 참 대단하긴 해.’

예나 지금이나 느끼는 인생의 진리였다.

“식사나 주세요. 3인분으로.”

“허허. 먹성이 좋으시군요. 알겠습니다!”

신체가 강해질수록 점점 먹는 양이 느는 기분이었다.

점점 식비가 늘어나는 게 아까웠지만, 그렇다고 아낄 수도 없는 게 바로 몸에 대한 투자다.

“많이 드세요.”

얼마 안 가 음식이 나왔다.

이안은 맨손으로 훈제한 닭 다리를 잡아 빠르게 뜯어먹었다.

다리를 해치운 뒤,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까지 빨아먹는 걸 잊지 않았다.

생각보다 빠른 이안의 먹는 속도에 질려 있던 주인장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카일 상단에서 사람이 왔다 갔어요.”

“…… 상단에서?”

이안이 닭 다리뼈를 내려놓으며 쳐다보자, 주인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일 아침 출발하니, 짐 챙겨서 오라는 데요?”

“원래는 1주일은 걸릴 거라 했는데?”

“저야 모르죠 허허……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환불은 안 됩니다.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내는 거로 값을 좀 깎아드리는 게 애초의 거래였으니.”

사람 좋게 웃던 주인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냉철한 상인의 그것으로 뒤바뀌었다.

그 분위기가 어찌나 완고한지, 환불 해달라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뭐. 일정이 앞당겨지면 좋은 거니까.’

벌써 페어윈드에는 코르디스에서 있었던 일이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는 성국에서 교황이 직접 조사원들을 보냈다 했다.

아마도 페어윈드는 더더욱 소란스러워질 터.

‘그러기 전에 빠져나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다짐하며 이안은 다른 닭다리를 뜯었다.

***

하룻밤을 자고.

새벽같이 일어난 이안은 얼른 목적지로 향했다.

워낙 여러 상단과 여행자들이 참여하는 행렬이라 그 숫자가 무려 100에 달했는데.

그래서인지 여정을 준비하는 상인들로 분위기가 몹시 부산스러웠다.

그중에서 핏대를 세워가며 지시를 내리는 카일이 보였다.

이안은 한차례 헛기침을 한 뒤,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흠흠. 이보게.”

“아이 바빠 죽겠는데 누구…… 아. 오셨군요.”

짜증을 내려던 카일이 이안의 얼굴을 보고 공손해졌다.

이안은 서둘러 물었다.

“원래 못해도 1주일은 걸릴 거라 하지 않았나? 왜 갑자기 일정이 앞당겨진 거지?”

“아, 그게 말입니다. 대단한 용병이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대단한 용병?”

“예.”

카일은 마치 대단한 비밀 얘기라도 하는 양, 이안의 귀에 대고 소곤 댔다.

“서부의 대수림에서 온 전사이자 금패 용병, 나바혼입니다. 아, 마침 저기 보이는군요.”

카일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인간 같지 않은 사내가 멀뚱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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